습관성 위경련 때문에 단골 병원에 가기 위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팔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어기적어기적 건널 때, 오지 않는 약속 상대를 기다리며 소란한 카페 구석에 웅크려 앉아 문 쪽을 바라볼 때, 또다른 악몽에서 깨어나 고개를 떨며 천장의 어둠을 올려다볼 때, 그 모르는 벌판에 눈이 내리고 검은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밀려들어온다고.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7

하지만 바람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하면 마치 거대한 팝콘 기계가 허공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듯 눈송이들이 솟구쳐오른다. 눈이란 원래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끝없이 생겨나 허공으로 빨려 올라가는 거였던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62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76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그러지 않으면 그 불덩이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0

부리가 젖은 운동화 속 발가락들이 시렸다. 파카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주먹들이 딱딱하게 얼었다. 머리에 더 눈이 쌓여 이젠 마치 흰 털실로 뜬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는 인선이 입을 벌려 말할 때마다 반투명한 불꽃 같은 입김이 흘러나와 어둠 속에 번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8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0

계속해서 엄마는 말했어.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0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3

더이상 달리지 않는다.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속도가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 같은, 내 걸음도 거기 맞춰야 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걷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6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7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 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8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9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9

마침내 노인이 입술을 떼었다. 통역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놀라운 집중력으로 오직 카메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좋아. 내가 이야기해줄게.
카메라 렌즈를 꿰뚫고, 그 뒤에 서 있었을 인선의 눈까지 관통해 날아온 그 눈의 빛이 내 눈을 찔렀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2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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