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여름에 집착하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꽃이 피고 지기는 했지만 날은 오랫동안 습하고 추웠다. 겨울이 길었던 만큼 여름이 다가오는 속도는 더뎠다.

-알라딘 eBook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중에서 - P7

가장 큰 문제는 그 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전국의 우체국도 파업에 동참했다. 그래서 내가 진학할 대학에서 보낸 합격 서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돌았다.

-알라딘 eBook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중에서 - P9

이곳에 온 지 몇 달 만에 깨닫게 된 사실은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아니 보여줘도 되는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을 드러낸 채로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중에서 - P12

우리는 서로 잘 지내느냐는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잘 지내라는 당부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과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그냥 휴대전화의 화면을 껐다. 액정의 불빛이 사그라져 사방에는 다시 어둠뿐이었다.

-알라딘 eBook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중에서 - P17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국의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칠 때까지 걷다가 멈춘 채 카페나 레스토랑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발아되지 못한 말의 씨앗들이 천천히 내 안에서 번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알라딘 eBook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중에서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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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58

속을 보이면 어째서 가난함과 평안함이 함께 올까. 그날 ‘맹이의 대모험’이었던 블로그 이름이 ‘돌멩이의 대모험’으로 슬쩍 바뀌었고, 이런 글이 올라왔다.
‘구르더라도 부서지진 않았지.’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61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63

한낮의 아스팔트 위에 죽은 것이 있었다.
검붉은 피가 엉겨붙은 잿빛 털 뭉치. 얼마 전까지 작은 동물이었던 것의 잔해. 자세히 보기는 꺼림칙했다. 일곱 살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작고 둥근 흙무덤을 잠시 상상했다. 만화에서는 그런 무덤 앞에 나뭇가지 두 개를 엮은 십자가가 으레 꽂혀 있었다. 곧 그는 더러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말을 떠올렸다. 횡단보도 앞에서 좌우를 살폈다. 약국과 복권 가게 사이로 난 차도는 한산했다. 신호등도 없는 곳이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66

관건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에게는 꽤 많은 경험이 누적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적절함’ 안에는 ‘적절한 정도의 의외성’, 즉 이유 없는 작은 선물이나 늦은 밤의 괜한 연락, 심지어는 의도적인 무관심도 포함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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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저녁 일곱시의 급행 전철에 실려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대체로 선 채였는데 가끔 인파에 끼여 두 발이 떴다. 내리거나 타려고 맹렬히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키다리들 사이에 끼인 그림은 조금 우스웠다. 덩치에 안 맞게 비굴한 하루를 보낸 사내 몇은 어깨 아래 쪼그라든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 여자 머리 위에 팔을 걸치면 편하겠어.’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34

다만 〈솔로농장〉은 시청자들로부터 ‘리얼리즘이 살아 있는’ 부동의 원조 맛집으로 여겨졌다. 맛집 중에서도 청국장같이 냄새나고 소대창만큼 기름을 튀기는데 등뼈찜처럼 손가락을 빨게 만드는, 우아하지도 산뜻하지도 않지만 그래서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봐도 부끄럽지 않은 프로그램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44

그래야지. 그런데 당신 혹시 따뜻하고 향긋한데다가 장 건강과 피부 미용에도 좋다는 우엉차 같은 남자니. 따뜻한 흰쌀밥과 언제나 어울리는, 자기주장은 약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우엉조림 같은 남자냐고.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48

상투적이지만 정중해. 우엉 당신, 거절도 마음에 들게 하네. 다만 이제 산 아래로 바위가 굴러떨어질 차례.
맹희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이렇게 대화를 맺었다.
"그래도 전 삽질한 거 후회 안 해요."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55

방송을 보며 맹희는 생각했다. 저게 나인가. 아니지. 저것도 나인가. 그건 맞지. 완두는 맹희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이긴 했다. 나 생각보다 관종이었을지도.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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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전 또는 세계문학으로 불리는 책들이 모여 형성된 거대한 도시를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산책자라고 생각한다. 책으로 가득한 이 도시의 모습은 매시간 변하고 있으며, 어느 불 켜진 창문 안에서 지금도 새로운 고전이 쓰이고 있다. 저 먼 곳으로부터 금빛 종소리가 들려온다.

-알라딘 eBook <금빛 종소리> (김하나 지음) 중에서 - P5

또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마다, 이전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온 것이 바로 조금 전이라고 느껴져, 막 울려온 시각이 또 다른 시각 옆 하늘에 새겨지면서 그 두 금빛 기호 사이에 끼어든 작고 푸른 궁형 안에 육십 분이라는 시간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가끔 때 이르게 찾아온 이 시각은 바로 앞 종소리보다 두 번 더 울리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듣지 못한 시각이 한 번 더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 잠과 마찬가지로, 마술적인 독서의 이점은 환각에 사로잡힌 내 귀를 속이고, 고요라는 창공의 표면에서 금빛 종을 지워 버린다는 데 있다.1)

-알라딘 eBook <금빛 종소리> (김하나 지음) 중에서 - P9

다시 출발하기 전 우리는 오랫동안 풀밭에 앉아 과일과 빵과 초콜릿을 먹었는데, 우리가 앉아 있는 풀밭까지 약하기는 하지만 조밀한 금속성 생틸레르 종소리가 수평으로 들려왔다. 종소리는 공기 속을 그토록 오래 지나왔는데도 공기에 섞이지 않고, 그 모든 연속적인 울림으로 골이 진 채, 우리 발아래 꽃들을 스칠 듯 지나가며 파르르 떨었다.2)

-알라딘 eBook <금빛 종소리> (김하나 지음) 중에서 - P10

그는 여러 서가에서 고전이 된 작가들의 옛날 책이 가득 꽂힌 곳을 발견하고 대충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도리고 에번스가 원하는 것은 고대의 위대한 시가 아니라, 그런 책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책이 발산하는 그 분위기는 그를 안으로 끌어들여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었으며, 그 세상은 그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이런 느낌, 이런 영적인 소통의 느낌에 그는 때로 압도당했다. 그럴 때면 우주에 오로지 그 책 하나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책들은 모두 영원히 살아 있는 그 위대한 작품으로 통하는 문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 책 속에는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아름답고 지칠 줄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 그런 책에는 시작도 끝도 없었다.3)

-알라딘 eBook <금빛 종소리> (김하나 지음) 중에서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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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
아무에게나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해도 될까. 질문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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