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때부터 미대를 가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엄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공부를 했고 나중에 미대를 간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니까 정말 돈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못다 이룬 꿈같은거라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래서그런지 미술관에 자주는 아니라도 인상파화가들이 전시를 할 때는 꼭 간다.
이 책은 미술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은 것 같다.
저자의 블로그도 있어서 이웃추가를 했다.
인상파 화가들을 가장 좋아 한다.
빛을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마네로부터 시작해서 모네로 종지부를 찍는다.
고흐는 자신의 붓이나 물감을 살 정도로만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해서 마음이 짠했다.
죽은 다음에는 고평가를 받는데 살아 있을 때 피카소나 모네처럼 인정을 받지 못해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행복은 주관적인 가치니까 자신의 열정을 불살라서 그림을 그렸으니까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그림을 수정하는 걸 수십 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네의 그림은 비평가나 전문가처럼 뭔지는 잘 몰라도 감성을 건드리는 그림같다.
전시회에 가서 봤더니 모네의 집이나 정원도 정말 아름더웠다.
자신의 정원에 수련이 많았다.
74세에 백내장이 왔는데 수련 연작 8점과 버드나무를 그렸다고 한다.
눈도 안 좋았는데 그 그림들의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모네는 처음엔 캐리커쳐를 해서 유명세와 부를 쌓고 인상파에 합류했다.
50세에 귀가 먼 베토벤이 떠오른다.
귀가 안 들리는데 소나타 30번을 작곡하고 백내장수술을 해서 잘 안보이는데 수련이나 버드나무를 그리고 신기하고 경이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정신이나 예술가적인 역량은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다.
난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말이다.
모네그림의 자연이 반사하는 무수한 빛의 향연을 보면 우주적인 감성이 생기는 것 같다.
모네의 그림을 사진으로만 봐도 깃털들이 수만개 모여서 빛과 어떤 형태를 이루는 것 같다.
감성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모네를 생각하면 신기한 감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장수를 해서 그런지 삶의 공감각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통찰력과 초연함, 넉넉함, 은은함이 그림에서 느껴진다.
모네 생 자르역은 30대 모네가 지방도시에 있다가 파리라는 도시에 와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걸 그렸다고 한다.
인상파화가들의 그림은 자연이나 정적인 모습, 사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는 역동적인 기차를 그렸다.
기하하적인 기차, 소음이나 증기에서 나오는 연기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때 시절은 사람을 옮기는 수단이 마차가 다 였을텐데 기차를 보고 충격을 어지간히 받았던 것 같다.
기차의 연기도 몽환적으로 표현해 낸 것 같다.
하늘의 구름이 있다면 기차역에는 기차가 뿜어내는 연기가 있다.
그 연기가 디테일한 모습이 아니라 주변을 연기로 삼켜서 모든 풍경을 평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인상주의파는 대상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것보다는 풍경속에서 변화하는 빛을 잡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과거에는 그의 그림을 보고 그림이 온통 안개 투성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네는 정말 그림에 안개를 접목해서 그리는게 유일한 관심이자 목표였다고 한다.
기차 그림을 그릴 때 모네가 역장에게 부탁을 해서 기차를 세워서 증기를 뿜게 해달라고 했고 역장은 잘 모르는 화가의 말을 들어 줬다고 한다.
정말 좋은 역장이다.
그 역장이 있어서 역사적인 그림이 탄생했다.
그런 역사적인 순간을 느끼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다른 화가들이나 그림, 관련된 일화들도 궁금해서 읽었고 저자가 화줌마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00여 회의 국내외 전시를 한 화가이며 미술 에세이를 쓰는 작가이다.
일년에 한 달은 해외에 살며 미술관 탐방을 하고 있다.
얘기를 들어 보니까 멋진 인생을 사는 것 같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일본을 다녀왔고 해외에서 한 달 살기는 계속 한다고 한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책이벤트도 하는 걸 봤다.
그림을 알아 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돌아 보는 것이다.
그림을 많이 접하다보면 저절로 친해지고 나아가 그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러면 그림 보는 재미가 생기고 삶이 풍부해진다.
그림을 볼 때 뭔가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냥 느낌이 좋고 끌리는 그림을 좋아한다.
인생이 담기고 그림을 보고 삶의 방향을 잡아가면 그것도 멋진 일일 것이다.
현대는 미술의 시대라고 할 만큼 우리 가까이에 미술이 있다.
여행을 가서도 미술관 탐방은 필수 코스이고 우리가 지나가는 어느 곳이든 고개를 돌리면 그림이 보인다.
미술이 교양의 척도가 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미술은 재대로 알기가 쉽지 않다.
이론과 비평이 주를 이루는 미술 전문서는 너무 진지하고 미술 에세이는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너무 주관적이다.
이 책은 미술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이나 그림이 좋긴 한데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미술관에 혼자 가기 두려운 사람, 그림한 점 구입해 볼까 싶은 사람 등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구분없이 모두 읽을 수 있는 미술이야기이다.
내가 해당되는 것은 그림이 좋긴 한데 궁금한 점이 너무 많이 생겨서 이 책을 읽었다.
화가의 사소한 이야기부터 미술사를 바꾼 위대한 그림,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가볍지 않은 미술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근거는 직접 미술관을 다니면서 느낀 경험과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이 어우러진 것이다.
어려우면 멀어지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미술식견을 바탕으로 최대한으로 쉽고 재미있게 이 책을 썼다.
어려우면 멀어진다는 얘기는 다른 공부에도 적용되는 얘기같다.
영어, 중국어, 일어 로스쿨준비공부들은 어려우면 멀어지는 것이다.
어렵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모든 공부를 저자의 얘기처럼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 그동안 너무 멀고 의사소통이 안 됐던 그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하니까 아주 큰 기대를 가지고 보면 될 것 같다.
루벤스의 조선남자를 보면 1617년 작이라고 돼어 있는데 그 시대는 이탈리아에 간 조선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아주 옛날 엄마께서 읽은 책에서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1983년 영국 크리스터 경매에 루벤스의 조선남자가 등장했다.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인 6억 6천만 원에 미국 J.폴게티미술관이 낙찰을 받았다.
그림 속 주인공은 한복을 입은 조선 남자였다.
머리는 상투를 틀어 탕건을 쓰고 조선 중기의 도포를 입었고 두 손을 가지런히 마주 잡은 모습이 조선남자처럼 보인다.
루벤스는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바로크 미술의 대가이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와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킨 그림이다.
루벤스는 1600년, 23세에 8년간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올랐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의 궁정화가 되어 장대하고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
루벤스는 어떻게 조선남자를 그렸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알게 됐다.
1592년과 1598년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 났다.
침략자 일본은 조선인을 생포해 유럽 각지에 노예로 팔았다.
그 글귀에 갑자기 열을 받았다.
그때 당시도 노예로 끌려 가다니,,,,,
조선에서 유렵으로 팔려간 사람이 루벤스의 그림 속 모델이라고 추측한다.
모델의 이름은 안토니오 코레아로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쓴 [라조나멘티]에 그 내용이 있다.
[라조나멘티]에서 카를레티는 아버지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던 중에 일본 나가사키항에 정박한다.
그때 임진왜란 당시 생포된 조선인 5명을 노예로 산다.
으이구~~~~화나~~~~
항해중에 부친이 인도에서 사망하면서 노예 4명을 풀어주고 피렌체에 도착한 후 다시 1명을 풀어준다.
풀려난 조선인은 로마에서 세레명인 '안토니오 코레아'로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을 근거로 안토니오 코레아가 로마에 있었던 시기에 루벤스도 로마에 있었다고 가정하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조선 남자 안토니오이다.
루벤스가 1618년에 그린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도 중앙에 한복 입은 남자가 있다.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을 찾아 보니까 진짜 중앙에 노란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조선남자 같았다.
이것은 추측일 뿐이라고 한다.
루벤스가 외교관으로 아시아 지역에 다녀온 후 외교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아시아 의복을 입은 모델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추측은 루벤스가 일본이나 명나라에 파견된 예수교선교사가 보내온 조선인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조선 복식 전문가들은 이 그림의 옷은 조선 옷과 일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동정 폭이 넓고 바지는 그려져 있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허술하기 때문에 상상력으로 그린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래도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 흉내 낸 것만 해도 사실성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 두차례 전시되었다.
조선 남자가 진짜 조선 사람이 맞다면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조선 사람이 된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시기에 일본 노예무역이 있었고, 카를레티의 책에 조선인 노예에 대한 언급도 있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
화가들이 모델없이 상상력으로 그리기는 정말 힘들다.
루벤스도 모델을 보고 그렸을 것 같다.
400년 전 한복을 입고 루벤스 앞에 선 남자 이 드로잉은 미국 J.폴게티미술관에 소장되면서 작품명이 [한복입은 남자]에서 [조선남자]로 바꿨다고 한다.
미국에 가면 J.폴게티미술관에 가서 꼭 조선남자그림을 보고 싶다.
직접 보면 그림의 스토리를 아니까 짠 할 것 같다.

고흐그림이 제일 비싼 줄 알고 있었는데 모나리자의 그림이 제일 비싸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스페인의 상징이 가우디와 피카소라고 한다.
가우디를 정말 좋아한다.
가우디가 건축한 건물들을 보면서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과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에 간다면 가우디건물을 제일 보고 싶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그냥 싫다.
뭘 얘기하는지 모르는 것도 있지만 분위기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
가우디와 피카소의 연결고리는 스페인이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입체주의를 창시한 화가이다.
추상화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입체주의인가보다.
학교 다닐때 배웠는데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의식적으로 까먹은 것 같다.
스페인을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가우디와 피카소의 작품을 보러 온다고 한다.
이 두 천재는 생전에 크게 부딪힌 적이 있다고 한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가우디는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로 아스트로가 주교관을 지으면서 종교에 심취하게 됐다.
굉장히 신앙이 깊고 결혼도 안하고 하나님께 집중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가우디는 성 테레사 학원을 짓고 나서 신께 정결한 몸을 바치기 위해 40일 금식에 들어 갔다.
금식은 주교의 만류로 그만 뒀다고 한다.
이 일로 가우디는 확고한 가톨릭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과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어났다.
진보적인 젊은 예술가들은 교권 반대 운동을 벌였고 '성 육 예술원'을 만들어 예술가의 타락을 막고자 했다.
나도 신앙적으로는 극보수라서 성적인 개방이나 술은 완전 반대하고 터부시한다.
성경을 보면 술을 보는 것도 하나님은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성관계도 결혼말고는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았다.
난 결혼외 성관계는 죄악이고 범죄라고 생각한다.
가우디도 그런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끌리는 사람이다.
성형도 하나님의 형상을 망가뜨리는 거라고 생각해서 절대로 반대이다.
성형을 한 사람은 만나지도 결혼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우디는 성 육 예술원의 회원이었고 반대편에는 피카소가 있었다.
성 육 예술원의 첫 번째 규칙은 수업시간에 옷 벗은 여자가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자유를 내세우는 민주주의에도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하나님은 구별돼고 거룩하라고 하셨다.
야한 영화나 누드화를 보면 자기들하고 같은 몸인데 왜 남의 것을 보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가우디는 부자나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니까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고 젊은 예술가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피카소는 성 육 예술원의 가치를 거부했고 가우디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많이 했다.
그런 점은 피카소도 잘 한 것 같다.
피카소에게는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가우디가 한심해 보였다.
피카소도 성공을 해서 굉장히 부유하게 살았다고 알고 있는데,,,,,
마르크스도 프롤레타리아계층이 아니라 부르조아 계층이었는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얘기했다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
피카소는 가우디의 제자 오피소에게 가우디를 지옥에나 보내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가우디도 피카소를 무진장 싫어 했다고 한다.
두 세력간의 싸움은 보수층의 승리로 끝났다.
실망한 피카소는 파리로 떠났다.
오늘날의 스페인은 두 천재 예술가가 먹여 살린다는 얘기가 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하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런 항상 짠하다.
고흐가 살았을 때 그림을 한 점 팔았다는 건 여러 번 들어서 알지만 그 그림이 무엇인지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었다.
아를의 뭐라는 다른 작품도 있는 것 같다.
1890년 다른 이에게 약값으로 준 그림은 [데이지와 양귀비 꽃병]이라고 한다.
그 그림을 받은 사람은 대박이 났을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124년이 지난 2014년, 소더비 경매에서 700억원에 판매됐다.
헉,,,,,비싸다.
고흐는 16에~23세까지 7년간 화랑의 점원으로 일했는데 충동적인 행동으로 해고 당했다.
고흐영화도 봤는데 그런 얘기가 나왔다.
그 후 특정한 직업없이 방랑 생활을 했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해준 동생 테오 덕분에 기초생활은 가능했다.
30세가 된 고흐는 안정이 돼어 가면서 유화 200점, 데생 250점을 그린다.
고희의 그림은 가짜도 몇 십만원 한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고흐의 그림을 따라서 꼭 그리고 싶다.
반고흐는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아카데미에 들어 갔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파리 생활을 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사용한 어두운 색채를 탈피하고 밀레의 그늘에서 벗어 나게 되었으며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를 익히게 된다.
하지만 파리 생활 역시 적응하지 못하고 남프랑스 아를로 이사한다.
아를의 자연은 고흐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 시기에 그는 색채 화가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강렬한 노란색은 삶의 기쁨이었고 별을 그리며 희망을 꿈꾸었다.
그러나 아를의 안정적인 생활도 친구 고갱과의 불화로 끝을 맺는다.
그는 고갱과 함께 방을 쓰고 작업도 하면서 의지하고 싶었는데 자존심 강한 고갱이 거부하면서 두 사람은 크게 부딪힌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귀를 자르며 자해한다.
영화에서는 자른 귀를 가지고 창년에게 주는 것을 봤다.
그의 정신병은 더 심해지고 15개월 동안 유화 190점을 그렸다.
고흐는 자발적으로 생레미 정신 병원에 들어가 [별이 빛나는 밤] [삼나무가 있는 밀밭][아를의 병원 정원]같은 작품을 그렸다.
1890년 고흐는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살면서 가셰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의사이자 화가인 가셰박사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가셰박사에게 그림을 약값으로 준 것이다.
가세박사는 영화에서 고흐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르느와르라는 철없는 은행장아들이 쏜 총에 죽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생전에 화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지만 그의 형수가 그의 그림을 전시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이다.
그중에서도 집중적으로 그린 기간은 아를에 이사해 오베르에서 죽기까지 3년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그림은 900여 점이다.
900여점중에 생전에 판매된 그림은 딱 한 점이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은 동생 테오가 형의 친구이자 화가이며 시인인 외젠 보쉬의 여동생 안나 보쉬에게 팔았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의 그룹 작품전에 출품되었던 이 작품은 400프랑에 팔렸다.
안나보쉬는 인상파화가였으며 고흐의 친구였다.
태어나서 사랑한 남자는 아빠와 반 고흐 딱 두명이다.
고흐에 대한 책들을 대체로 전부 읽는 편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가장 좋아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아름답고 짠하고 그의 희망과 소망이 전부 담겨 있는 것 같다.
고흐의 팔린 그림에 대해서 들어서 또한 좋았다.
고흐가 살아서 성공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항상 든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고 했다.
그런 점이 위로가 되기는 한다.
고흐에 대해서 새로운 점을 안게 가장 기쁜 일이다.
고흐,,,사랑하는 최초의 화가,,,그의 그림을 보면 정말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다.
얼마나 힘들었어요,,,고흐,,당신은 불어를 하나요,,네덜란드어를 하나요,,,영어는 알아 듣나요,,부모님이 너무 엄격해서 힘들었나요,,
짝사랑만 해서 힘들었나요,,당신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전부 모르지만 당신은 정말 열정이 가득한 사람같아요,,
전 요즘 미술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으려고 하는데 그 책마다 당신이 안 나올 때가 없어요,,
살아서는 힘들었지만 당신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위로가 돼죠?
고흐전시회도 요즘 열리고 있고 얼마전에는 유화에니메이션영화도 나왔어요,,
그때 엄마랑 같이 얼른 보러 갔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림과 얘기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뒤샹의 소변기가 작품이 된다면 작품이 안되는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샹은 앙데팡전에 6달러를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이다.
뒤샹에 그곳에 소변기를 배달했다.
주최측은 소변기를 검열한 후 전시를 거부한다.
이 일은 리처드 머트 사건으로 번지면서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논쟁이 시작됐다.
소변기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런 작품을 레디메이드라고 기성품을 말한다.
뒤샹은 예술이란 망막에 의한 것이 아닌, 개념으로 봐야 한다라고 했다.
개념 자체가 미술이 된다는 것이다.
화가가 오브제(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해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물체)
를 선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된다라는 뜻이다.
오브제는 시험에도 많이 나온다.
그것은 소변기이든 삽이든 자전거이든 대상의 한계는 없다.
뒤샹의 샘은 남자소변기를 전시장으로 옮긴 뒤 뒤집어 놓고 작품 제목을 샘이라고 했다.
소변기를 뒤집으니 원래 이것이 무슨 용도인지 헷갈린다.
뒤샹의 의도는 어떤 사물이라도 선입견없이 순수하게 보자는 것이다.
그래도 소변기는 소변기같은데 말이다.
목적과 용도가 분명한 기성품을 다른 환경이나 장소에 옮기면 본래의 목적성이 상실되는데 뒤샹은 이 점을 미술로 표현한 것이다.
미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경계를 허문 것이다.
뒤샹은 레디메이드 작품과 직접 제작한 작품을 전시하며 기존 예술의 표현과 가치를 부어하고 도전적인 행보로 고정관념을 깬다.
뒤샹의 유파를 다다이즘이라고 한다.
미술시험에 안 빠지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다다이즘은 1915년~1924년에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실존주의, 반전통주의 예술운동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해 반전 메시지를 전하는 무정부주의 예술 사조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에 가면 뒤샹의 레디메이드작품을 볼 수 있다.
뒤샹은 회화의 역사는 끝났다고 했다.
그리지 않아도 작품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궁금했던 미술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다.
고흐를 또 만나서 너무 좋았다.
그동안 모르던 고흐의 얘기를 또 알게 돼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얘기하는 방법도 알게 된 정말 고마운 책이다.
앞으로도 궁금한 작품을 보면 이 책을 다시 펼쳐 보면 될 것 같다.
어쨌든 미술은 재미있다고 했는데 묻지도 따지지 않아도 그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