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함으로 답하다 - 분노 사회, 우리가 잃어버린 예수의 마음
스캇 솔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내 조카중에 한 명 이름이 온유이다.

이름대로 성격이 온유하다.

나한테 가장 연락을 많이 한다.

고모뭐해,,고모 자? 고모 나 여행가고 있어,,고모 나 숙제하는데 하기 싫어,,고모 나 태권도 하러 가,,고모 나 춘천가고 있어,,고모 나 카약 타려구,,고모 나 잘려구 고모는 뭐해? 고모 나 공부하고 있어,,고모 나 이뽑았어,,등등 성경의 온유든지 온유라는 말만 들으면 나의 조카가 생각난다.

만나도 내가 머리를 땋고 있으면 나처럼 해달라고 하고 내가 멜빵바지 입고 있으면 자기도 멜빵바지를 따라서 입는다.

남동생이랑 올케가 키가 크니까 온유도 키가 커서 나랑 거의 비슷한데 만나면 항상 내 무릎에 앉는다.

항상 내 옆에만 있으려고  한다.

온유라는 단어는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분노에 대한 대답이 기독교인은 온유로 한다는거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요즘 사회가 분노로 넘쳐나는 것 같다.

보복과 갈등에서 온유로 대답을 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에게는 온유가 무기가 된다.

분노가 넘치는 세상에서 나도 무기를 가져야 겠다.











책은 온유함으로 답하라고 하는데 벌써 분노가 일어나는 일이 생겼다.

일본어시험이 코로나때문에 취소됐다.

급수를 올려야 하는데 정부를 잘 못 만나서 일본 급수를 못 올리는거다.

미세먼지를 중국이랑 나누자구?

국민을 호구로 알지,,

우린 미세먼지를 나눌 생각 없으니까 너네가 먼지 다 먹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 조나단 에드워드이다.

난 20대 중반부터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기독교명문가문을 이루게 해달라고 지금까지 매일 기도하고 있다.

교회 성경에서 코로나가 묻을 수 있어서 성경을 다 치운다면서,,

우체국이나 은행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쓰던 볼펜을 주던데 그건 괜찮은거야?

어떻게 코로나는 성경에만 묻고 다른 거에는 안 묻냐,,

조나단 에드워드는 온유함은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영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의 진정한 특징이라고 말했다.

온유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다.

온유함은 그냥 부드러운 걸 많이 생각한다.

온유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아에 대해서 말씀하신거다.

온유함은 예수님의 가장 깊은 차원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삶을 온유함으로 살아내야 한다.

온유함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풍기는 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주께서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시18;35)

하나님의 온유함은 자기를 크게 한다.





예수님은 날카롭고 재치가  넘치고 지적이고 강력한 분으로 산상수훈과 감람산 설교, 수많은 비유에 놀라운 분이다.

예수님의 이런 놀라운 가르침 외에도 남들의 삶에 생명과 건강, 소망을 더해 주는 놀라운 역사를 펼치셨다.

병자를 고치고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약자를 옹호하고 권좌에 있는 자들에게 진실을 말씀하셨다.

자신의 가치도 보도록 도와주셨다.

그분은 스스로 정치인 같은 유력한 자로 나서질 않으셨다.

사람들을 볼 때 화려한 이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주목하시지 않았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각 사람 속에 흐르는 내면의  가치에 주목하셨다.

의로운 분노는 많이 들어 봤는 데 건강한 분노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들었다.

분노는 강력한 에너지다.

분노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나 집단의 손에 들리면 건설적이고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엄마랑 조금 지나면 보수단체 대표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 대표님은 어린 학생들을 후원한다.

어릴 때부터 보수로 잘 키우기 위해서이다.

그런 분들은 의로운 분노나 건강한 분노를 하시는 것 같다.

성경에는 분노로 충만한 동시에 은혜로 충만한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성경이 권하는 건강한 분노는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독한 형태의 분노도 있지만 건강한 형태의 분노도 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건강한 분노는 오래 참음이라는 성경의 열매와 비슷하다.

이 분노는 반격하고 복수하려는 욕구를 거부한다.

이 분노는 궁극적인 정의의 분별과 실행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하지만 동시에 건강한 분노는 파괴하기도 한다.

독한 분노는 악을 퍼뜨리기 위해 선을 파괴하지만 건강한 분노는 선을 퍼뜨리고 보호하기 위해 악을 파괴한다.

분노를 해도 악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예수님은 항상 순하시지만은 않았다.

순한 사람은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남들의 기분을 잘 맞춰 준다.

하지만 순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순한 사람들은 대립하기 싫어하는 기질 탓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곤 한다.

하나님의 뜻이나 신앙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대립될 때가 더 많다.

온갖 비난과 비방이 난무한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친절하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신다.

그분은 화를 내시는 것이다.

붉은 나비의 영혼처럼,,

성전 내의 부패한 예배 관행과 태도에 분노한 예수님은 성전의 탁자들을 엎으셨다.

베드로가 충성보다 위안을, 지기 희생보다 힘을 추구하려는 유혹에 빠지자 예수님은 그를 사탄으로 부르셨다.

죄의 삯이요 죄로 구속된 이들의 최대 적인 죽음은 예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 돌아오실 때 사탄과 불의를 행한 자들의 악을 갚아 주실거다.

예수님은 악한 상황에 불같이 노하셨고 이런 분노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라고 했다.

인격을 잃지 않고도 화내는 것이 가능하다.

건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분노는 건설적이고 생명을 주는 결과를 이룰 수 있다.

온유하지만 또 분노를 내라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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