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에 대한 사랑, 즉 대담하게 독창성을 추구하며 조소를 당할 때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인정받지 않아도 견딜 수 있으며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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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니이체의 구원론의 차이 이영수(동아대)
니이체는 고전문헌학자이다. 그는 희랍예술에 정통했다. 그는 희랍예술에서 구원의 힘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리스 사람들의 예술체험은 이원적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올림푸스 신화에 나타나듯이 인간은 자기에게 닥치는 두려움을 알고는 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그들을 자신의 보호 벽으로 장막을 쳤다. 질서와 무질서, 빛과 어둠,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섞바뀌어 회전하면서 희랍비극의 내용을 구성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심스럽고 두려운 특징만이 아니라 그 존재의 비극성까지도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예술은 행동하는 사람의 구원이다.행동하는 사람이란 모든 것의 두렵고 의심스러운 특징만이 아니라 그 특징과 더불어 살려는 사람이다.예술이란 고통받는 자의 구원이다.구원의 길이란 고통을 달게 받고 승화시키고 나아가 신성화한다.고통이 커다란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예술이란 삶을 비극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파괴력을 제거해 갈 뿐만 아니라 비극적 행위자이며 동시에 고난의 피해자인 인간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을 한 순간 잊게 만들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힘의 의지는 곧 비극이요 이 비극은 또 다른 힘을 위한 순환의 흐름을 만든다.
이때 예술이란 곧 비극성을 사물에서 확인하고 행동하는 것, 고통의 승화, 창조의 말로서 예술을 논할 수 있고 이런 예술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덕의 관점에서 본 니체의 헤라클레이토스 김기선(명지대)
비극적 근본경험, 디오뉘소스적인 것
니체에게서 디노눠소스라는 이름을 들을 때 우리는 이와 동시에 반드시 디오뉘소스의 타자, 즉 그의 대극인 아폴론의 이름을 떠올려야 한다.그것은 이 두 이름이 상호불가분한 대립적 통일을 이루는 한쌍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헤시도오스가 전하는 희랍 신화의 요체는 결국 카오스와 코스모스, 혼돈과 질서의 다름없는 투쟁의 대극구도인 것으로 드러났다.그런데 그는 신들의 탄생의 태초의 장에 카오스와 다이어리는 대극쌍과 동시에 제3의 인격인 에로스를 등장시킨다.에로스는 생식의 신, 사랑의 신이다. 성애는 분리된 것의 결합을 지향한다. 분리 없이는 사랑의 작용도 없다.그러나 결합은 소생의 형태로 다시 분리를 산출한다.사랑은 분리와 결합의 역동성이다. 카오스와 가이아의 분리는 이 우주적 에로스의 최초의 작용이다. 이들은 다시 분리되어 카오스는 어둠과 밤을 낳고 가이아는 하늘과 산, 바다를 낳는다. 에로스는 이렇게 분리되어 대척하며 대극으로 내닫는 이들 소생을 각각 다시금 서로 끌어당겨 새로운 개채의 생산으로 이끈다. "신들가운데 가장 오랜 신"인 이 에로스는 스스로는 형체를 취하지 않으면서 모든 형체를 가진 것들로 하여금 대극적 사랑의 관계성의 장으로 진입하게 하는 가능성의 근거이다.
이러한 비의적 디오뉘소스에 반해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과의 연관성 안에서 아폴론과 더불어 예술원리로서 거론하는 디오뉘소스는 우주적 에로스가 예술적 창조혼으로 전이되어 예술의 차원에서 구현된 신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그런데 니체에게서 아폴론과 디오뉘소스의 대극구도는 비극의 구성원리임을 넘어 예술 일반의 원리로 전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희랍의 비극을 단지 예술의 탁월한 역사적 예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전성의 구현으로 즉 예술을 예술이게 라는 규범을 내포하는 예술일반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비극이 가지는 예술로서의 규범성에 대한 설명이 요청된다. 니체는 그것이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상호적 필연성"에 입각하여 설명한다.아폴론은 빛의 신, 로고스의 신으로서 절도, 한계의 인식, 조형성, 질서, 단순성, 규칙과 개념의 정동으로 작용하는 "개별화의 원리"을 구현한다. 그에 반해 디오니소스는 반면 디오뉘소스는 도취와 파토스의 신으로 무절제, 과도, 한계와 구분의 해체를 초래하는 융해의 원리를 구현한다.비극에 있어 이 두 원리는 형식적으로는 대화를 통해 전개되는 무대사건의 아폴론적 형상성과 이를 근저에서 떠받치는 가무단의 디오뉘소스적 음향성의 병존으로 구현되며 내용적으로는 무대사건의 플롯을 구성하는 영웅의 운명, 그 부상과 몰락에 있어 드러난다.영웅은 도시의 건설자, 문화의 창조자, 공동체의 입법자이다.가이아적 질료의 범칙과의 투쟁에서 제우스적 형상을 탈취하여 제우스 왕국의 질서를 확립하는 아폴론적 원리의 현현이다.이러한 영웅은 그러나 바로 그 자신의 영웅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몰락한다. 영웅성은 가이아적 신성에 대한 독신hybris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영웅의 존재는 이 독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디케의 엄정한 법칙에 필연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웅의 아폴론적 부상과 디오뉘소스적 몰락이라는 비극의 무대사건의 서사적 형상성은 개개 사건을 음향의 바다로 함몰시키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다시금 용해되면서 그 비극성을 극도로 고조된다.비극에서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뉘소스적 요소는 그 상호요청적 병존에 있어 도달가능한 최고조의 긴장과 동시에 그 긴장의 최고도로 극적인 와해를 가져온다.절정과 전기의 이러한 역동성은 이 두 요소의 팽팽한 균형에서 설명된다.
우리가 체험하는 바와 같이 디오뉘소스적 힘들이 그렇게도 격렬하게 고양되는 곳에는 이미 아폴론적인 것 또한 구름에 휩싸여 우리에게로 하강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Friedrich Nietzsche :sat lithe werke 1,155)
이처럼 이들 두 요소의 정중이 구현됨으로써(K.Kim: mythos und tragodie 287쪽 이하 참조) 비극은 신화를 완성으로 이끈다. "비극을 통해 신화는 그 가장 심오한 내용, 가장 풍부한 표현의 형식에 도달한다."(1,74)는 니체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그가 비극에 경도하는 것은 비극이 구현하는 엄정한 대립적 조화, 그리고 이 조화가 구현하는 생의 역동성이다.이 조화는 불화를 배제하고 얻어지는 정태적 조화가 아니라 대립되는 것들의 투쟁의 한가운데서 분별과 선택을 떠나 이들 대립항 모두를 이를테면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동적 조화이다.
지극히 생소하고 가혹한 문제들에서조차도 이루어지는 생에 대한 긍정; 자신의 최고 유형들의 희생에 있어서도 자기 고유의 무진장한 본성에 환희하는 삶의 의지-그것을 나는 디오눠소스적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비극적 시인의 심리학에 이르는 다리임을 알아챘다(6,160)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비극적 철학자, 자신이 이해하는바 "고전적" 고대정신을 유일하게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의지는 그 바라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의지는 자기의 의지를 바라기"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또한 그것은 "동시에 자기를 앞지르며 자기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따라서 니체는 일반적으로 의욕하는 것은 <더욱 강하게 되려는 것>, <더욱 큰 힘을 바라는 것> 그리고 <더욱 생장하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미학적 문화에서 창조성의 개념은 누구나 자신을 삶의 예술적 조형가로 보고 "스스로를 작품으로" 형성하려는 의식적 노력에 본질이 있다.따라서 미학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니체의 문화철학은 탈주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의 재구성, 즉 몸의 미학적 재구성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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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니체 - 예술가적 철학자 New 니체 100배 즐기기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유진상 엮음 / 휘닉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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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의 산허리에 건설하라. 그대들의 배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바다 한 가운데에 띄워라.
그녀는 변덕스럽고 제멋대로 군다.
그녀는 작은 악마이며 성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나쁘게 말하며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유혹 당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왜 그토록 나약한가.대체 무엇 때문에 굴종하는가. 그대들 마음 속에는 어째서 그리 많은 부정과 부인이 존재하는가.그대들의 눈은 왜 이 작은 운명밖에 볼 수 없는 것인가. 그대들은 운명을 탐하지 않는다면서 `용서할 수 없는 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왜 나와 함께 승리하기를 거부하는가.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을 감추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람이 무엇을 쓰는 경우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확실히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알아주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오늘날 `교양`이라는 것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자신이 직접 구입한 집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가, 혹은 시내를 활보할 때, 유행하는 미술관에 들렀을 때 어느 정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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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ee4 2015-01-1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무엇을 쓰는 경우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확실히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ㅡThis one is gorgeous~!!

 

섹스로서의 성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서 반드시 식과 결합되어 있다.
니체의 권력은 자신을 치외법권적인 위치에 놓는 초월자(존재자)를 상정하고 있다.
지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빛을 찾아야하고 아버지를 찾아야하는 것처럼 귀결되지만 인간은 빛-아버지를 보기 이전에 자궁 속에서 어둠-어머니를 먼저 경험한다. 어둠-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이다.
"예술에의 충동은 환상에 대한 동경이자 환상을 통한 구원에 대한 동경이다."
권력자는 사람을 가지고 논다.
놀이야 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그래서 노동 속에서 놀이를 발견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진화된 인간이다.아니면 노동을 놀이로 만들 힘이 있는 자가 능력자이고 지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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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묻고 싶은 것들 휴머니스트 피노키오의 철학 4
앙운덕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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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가장, 위장하는 것이지.이런 속임을 통해서 하나의 놀이판을 만드는 것이지.
니체는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 때문에 삶에 고통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제거하려는 위험한 노력을 하지 않지.고통과 행복이 짝을 이루니까 고통을 완전하게 없애려면 행복, 즐거움도 같이 없애려면 행복, 즐거움도 같이 없애야지.
그래서 현실의 고통에 맞서기 위해서 고통이 넘치는 삶을 비난하고 고통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서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천국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세계 안에서도 삶을 긍정하고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하지만 제목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니체는 존재가 참을 수 없을만큼 가볍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아. 그는 존재가 가볍고 우연의 놀이에 참여하고 걷기보다는 춤추는 경쾌함이 좋다고 보지. 이런 면에서 니체는 직관적 인간들이 갖는 풍성함을 가상의 세계, 기만의 세계, 위장의 세계, 예술적 창조의 세계에서 찾고 있지.
예술은 변하는 가상세계에서 가상을 긍정하면서 삶의 충동, 예술적 충동으로 아름다움과 도취의 세계를 만들지. 그래서 그렇게 꾸며진 세계에서 즐기고 춤추고 뛰놀 수 있지.삶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라고 보면 되지.전통적인 사고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경우에 현상을 뚫고 심층으로 지하로 파 내려가지. 이런 사고는 진지함과 무거움을 좋아하지. `경박하다` `얄팍하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등의 표현은 비난이 섞인 것이지.니체는 이런 태도를 `중력의 정령`으로 빗대어서 표현하지. 높이 오르려는 자를 지하로 끌어내리고 하늘을 날아 오르려는 자의 발에 무거운 쇠공을 달아주는 존재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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