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전설 - 현대의 신화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 그린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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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모든 선의 창조자, 하느님을 창조하기 위해 흩어지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을 숨길지도 몰라."
"팍토렘 카일리 테라이 factorem coeli et terrae라는 표현은 '나는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는 뜻으로 무엇보다도 '유일하게 좋고 온전히 좋고 따라서 거룩한 창조를 믿는다면, 전달을 믿을 수는 없다'는 의미야."
"하느님은 창조하나 악마는 창조하지 않아. 여기에 하느님과 악마의 차이가 있어. 창조만이 선과 악을 구별해.
창조된 세계를 하느님에게서 제외한다면, 그때 하느님은 악마야."
"천사들의 몸은 한계를 넘어서고, 그 수는 계산을 우롱하고, 그들의 논리는 경직성을 거부하지.
천사들에겐 차원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간 슬쩍 빠져나올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메시지의 정보를 빼내 간직할지도 몰라."
"해석자는 실제로 대화를 방해할지 몰라."
"또한 번역자는 반역자라고들 하지."
"그리고 대표자는 자신이 대표하는 권위를 스스로 지니고 있는 체할지 몰라."
"오빠는 어떤 사람과 오빠가 그의 언어를 말하지도 않고 그가 오빠의 언어를 말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이야기해 본 경험이 있어? 그럴 경우 오빠는 통역자의 도움을 받는데 그는 제3자로서 개입해. 갑자기 대화가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의사소통이 쉬워지는 데다 거침없어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닿을만큼 가까이 다가섰다는 느낌을 갖는 거지! 중개자의 이러한 용해는 신비의 경험과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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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 본 기억의 역사 - 플라톤의 밀랍판에서 컴퓨터까지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정준형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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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뒤인 1682년, 인광체는 훅의 연구에 다시 등장하는데, 뜻밖에도 인간의 기억에 관한 논문에서였다. 그것은 1682년 6월 21일 훅이 왕립학회에서 강연한 내용으로, 뒤에 <기억에 관한 가설적 해석: 마음이 어떻게 인체 기관을 사용하는지 기계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An Hypothetical Explication of Memory: how the Organs made use of by the Mind in its Operation may be Mechanically understood>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훅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뇌에 전달된 인상을 보유하고 재생하는 뇌의 특정 물질과 연결돼 있다.
훅은 이 가설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발두인의 인광체나 볼로냐석 등을 인용했다. 훅의 주장은 이러한 인광체들도 빛의 인상을 수용, 저장하고 어둠 속에서 발하는 능력이 있는데, 살마의 뇌에 빛 자극을 저장하는, 다시 말해 시각기억의 물리적 흔적을 형성하는 물질이 왜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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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절정 동문선 현대신서 80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은민 옮김 / 동문선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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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악의 파괴는 선의 파괴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거짓의 파괴는 진실의 파괴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이 가치들은 다른 가치들을 통해 자신들을 비춘다-선은 악을 통하고, 거짓은 진실을 통해, 추함은 미를 통해, 남성은 여성을 통해, 그리고 역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장 보드리야르: 근데 악은 가치라기보다는 오히려 형태입니다. 나는 도덕적 의미로, 게다가 비도덕적 의미로도 그것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비도덕성이 되기 전에 악은 우선 절대적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매번 악의 종교적 견해로부터 부정, 환상, 파괴라는 사상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선은 선과 악의 명백한 대립 속에 있습니다. 악은 이 둘의 불분명함 속에 있습니다. 선과 악이 서로 교환될 수 있는 한, 한 쪽은 변증법적으로 다른 한쪽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선의 세계 속에 있습니다. 악은 선과 악의 대립 이쪽 혹은 저쪽에 있습니다. 혹은 선은 여전히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침수된 이 빙산의 대부분은 악의 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없고, 다만 눈에 보이는 바와 투명성만이 있을 것입니다.
필리프 프티: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삭제하는 것 자체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저주 받은 부분에 대한 정리이다. 저주받은 부분의 에너지, 저주받은 부분의 폭력, 그것이 악의 원리이다”라는 부분을 <악의 투명성>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세균이 문제였던 것처럼, 우리 사회가 악을 쫓아내려는 일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 사회는 “자신의 싹과 박테리아, 기생충, 생물학적 적을 추적하여 제거하는 육체 자체가 이완과 암의 위험을 무릅쓰듯이 전반적 전이에 의한 재앙의 위험을 무릅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고유한 세포들을 삼키는 확실한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은 우리가 더 이상 어떤 사물을 입증할 수 있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책임질 사람들을 찾느라, 죄인들을 찾아내느라 시간을 보낸다고 말합니다. 피로 얼룩진 사건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장 보드리야르: 그것은 반항적입니다. 하나의 망은 한 요소를 타인에게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정지시킬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것이 독성입니다. 거기에는 책임 정지도, 화상 정지도 없습니다. 회전하는 것 자체는 배우를 그의 행동과 진정으로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일관적인 시퀀스들, 원인과 결과들을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거기에는 더 이상 법도, 동등함의 양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책임성, 그것은 동등함의 양식, 도덕적 규범의 교환 양식으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윤리적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계획은 좌절되었고, 분명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수록 거기에는 윤리위원회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에는 실존이 없고, 악은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들이 늘 연기한다고 믿습니다. 형태들의 이 작용에 대한 이와 같은 열정은 지속되지만 우리는 심리학적 연출로, 정서와 욕망의 작용으로 거기에 저항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속으로 재진입하고, 이 모순 속에서 주체들은 그들의 상호 차이성에 따라 기능합니다.
그러나 경제와 심리학, 에너지론의 영향하에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조차 자의적이고, 동시에 불확실한 다른 유형의 관계가 스스로 작용하며 하위의, 감지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그러나 동시에 우월하고 모종의 음모를 품고 있는 관습의 형태를 세웁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법률에 따라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를 포함한 연기의 차원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은밀한 법칙이 있습니다.
이 파생의 유형, 교환과 무의식적 이타성의 유형이 없다면 호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다만 거기에 결부되어 있는 힘의 관계들과 가치 체계들의 소진이 서로 다른 상황, 원천적인 상황을 창출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리프 프티: 정신적 영역이 당신의 취향이 아닌가요?
장 보드리야르: 인간들에게는 우선 운명이, 그 다음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혼자 말할 수 있고, 지나온 곳을 통해 그들의 원천을 상기하며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오로지 역사적이고 일상적인, 개인적인 차원에서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떠한 역사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살아갈 것이고, 역사 없는 자기들의 운명을 경험할 것입니다. 개인성, 인격은 그만큼 미약한 개념들입니다. 삶에서 사건을 만드는 것, 그것은 현재의 세계와 최선 및 최악이 항상 작용하는 세계 사이의 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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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 라이브 이론
폴 헤가티 지음, 윤상호 옮김 / 책세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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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전문용어와 주장들은 크게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지만 보드리야르는 무의식이, 아마도 결여와 죽음 때문에, 결여와 죽음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는 관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상징의 자리를 대신 꿰찬 것은 이 현실에 관한 후자의 형식이었으며, 현실은 ‘상징적인 것의 시뮬라크럼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상징적인 것은 개념도, 행위자도, 범주도, ‘구조‘도 아니라, 교환의 행위이자 실재를 종결시키는 사회적 관계이며, 이는 실제를 해소하고 동시에 실재와 상상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종결 시킨다.
상징적 교환의 세계가 더 현실처럼 보임에도 진실은 모호성, 죽음, 희생 폭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보통의 현실처럼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사라졌으며 그래서 실제 현실 대신에 우리는 자신을 현실로 제시하는 다양한 유형의 시뮬라크르를 얻는다. 시뮬라크르가 더욱 완전해질수록 우리는 실재에 대한 감각을 더 갖게 된다. 따라서 실재는 상징적 교환과 시뮬라시옹의 중간항이지만 시뮬라크르의 산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보드리야르가 세계에 대한 지각 또는 ‘경험‘의 지배적 양식으로 간주하게 된 시뮬라시옹에 대한 첫 번째 분석은 <상징적 교환>에서 나타난다.
시뮬라시옹이 순수하게 사회적/역사적 수준(즉 실재의 단계)에 놓인다면,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 이론이 작동하도록 허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문제적인 역사의 한 버전을 갖게 된다.
그런다음 우리는 직접(적인) 질문에 대해 시뮬라시옹되지 않은 응답을 얻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을 보게 된다.
모델과 코드는 배제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닌(상징적 교환 관련해서는 제외), 선동incitement과 가깝다.
<상징적 교환>에서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마침내 완전해지는 (이전까지는 감춰지거나 부정되거나, 아니면 흡수되었기에) 죽음의 배제에 대해 서술하며, 특히 <악의 투명성>에서 그것을 어떤 악의 존재든지 부정하려는 시도로 확장시킨다.
체제는 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환영이기에, 우리가 속한 싸움은 실재와 환영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환영끼리의 싸움이라고 보드리야르는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진부할지언정 더욱 평범한 차원에서는, 개인이 스스로를 항상 ‘다른 존재’로 바꾸고자 할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 불가능한 교환이 이루어진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의 생명을 교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갈 곳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주체의 세계 너머에는 객체의 반응이나 현실 그 자체가 존재한다. 그것이 지식과 가시성에서 소비되기에, 그것은 수동성을 버리고 관찰자들을 속이기 시작한다
가장된 세계에서 시뮬라시옹 이외에는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교환은 긍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결코 탈출구가 아니다. 선은 언제나 ‘체제’의 편이다: 모호한 것만이, 어떤 의미에서는 악만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다. 그 곳에 도달해봤자 또 다른 ‘허위’로 돌아올 뿐이며(시뮬라시옹의 형태를 택할지, 환영의 형태를 택할지의 문제), 그 과정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안다면 유용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과도 현실적 세계 내의 나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우리가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이원적인 형태가 시사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는게 허용되는 근본적 정적주의quietism이니 말이다.
DNA는 시뮬라시옹된 사회를 작성하는 ‘코드’의 생물학적 실현이며, 그것이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무의식이 근대성에 속하듯, DNA는 포스트모더니티, 즉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해석방법이다.
매트릭스The Matrix가 전체 인류를 보존하여 꿈을 꾸게 하고 그들을 배터리로 이용할 때,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존재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다.
사진의 향수는 보인 객체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적 없는 현실에 대한 향수이며, 그 현실은 그것이 이미지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더욱 제거된다. 바르트가 ‘푼크툼’을 죽음과 부재 주위에 모여 바라보는 주체와 이미지인 객체 간의 상호작용의 공간이라고 정의한 바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어느 정도 흥미를 보였는데, 그것은 특정한 무언가도 누군가도 아니고, 놓쳐야 할 죽음조차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 즉 세계이다.
니체는 시뮬라시옹의 개념들을 미리 ‘예측’했으며 특히 <우상의 황혼>과 <권력에의 의지>에서 그것을 잘 보여준다.
‘표면의 세계와 진정한 세계의 대조는 “세계”와 “무nothing”의 대조로 환원되며’ ‘우리는 표면 세계로부터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범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시뮬라크르의 질서’는 <사물의 질서>의 스타일로 시대구분을 재현하고,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닌 효과적으로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서 푸코의 ‘담론’의 중심성centrality 개념은 어떻게 다른 시뮬라크르에 의해 지배된 시대가 시뮬라시옹된 것 외부에 어떠한 현실도 갖지 못하는 가를 보여줄 수 있다.
엘리아스 카네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서 왔다. 우리는 너무 적은 것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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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 동문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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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용어들(죽음, 숙명, 여성, 시뮬라시옹)이 일종의 악순환에 따라 서로 동화변형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오직 그들의 변신의 순간에만 그들의 종말을 갖는 많은 패러다임을 대강 살펴보았을 뿐이다. 만약 개념들이 죽는다면, 그것들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아가면서 천수(天壽를 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유는 동시에 인간에 관심을 갖는 인간주의적인 것으로 머물러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의 가역성,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가역성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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