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공장과 광산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가 급증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질적 발전도 상당히 이루어졌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일본인 노동자의 일부가 징용되어 나가고 그 공백을 조선인 노동자들이 메우게 되면서 직장 내에서 조선인들이 좀 더 상위 직급으로 승진해 올라가는 경우도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략) 조선인 노동력이 질적으로 좀 더 성장하게 된 것은 명백하다. 단 이 성장은 식민지적 한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 P165

1942년 초 조선 내 산업설비 투하자본 중 조선인에 의한 부분은 ‘조선 내 주요 산업자본 계통’ 중 ‘조선인계’에 속하는 것과 ‘기타의 일반 조선 내 재적회사’에 속하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자의 1%와 후자의 4%를 합해 약 5%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반면 ‘일본 산업자본의 직접진출’ 74%를 포함하여 일본인 자산이 95%를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말 조선에 투하된 공업회사자본은 모두 일본이 회사자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77

각종 거시적 통계에서 나타나는 일제시대 조선 광공업의 발달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분석결과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소수의 일본인 거대 자본 계통의 성장사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 성장한 일본인 자본이나 조선인 자본도 절대적으로 성장했지만, 성장의 나용은 근대적 공업의 발달이라기보다는 자급적 및 부업적 가내공업과 재래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영세 중소공업, 그리고 정미업이나 정어리기름 제조업과 같은 1차 산품의 단순가공에 그치는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비중도 후기로 갈수록 저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발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 P182

농업과 공업의 생산수단인 토지와 자본이 민족별로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소유되고 있던 조선에서는 위에서 본 일본에서와 같은 이중구조 문제가 민족문제와 겹쳐서 한층 더 격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42년 초가 되면 조선의 광공업 회사자산의 대략 95%를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는 그러한 소유구조 하에서는 분업구조의 고도화나 우회생산의 확대, 공업구조의 고도화나 무역구조의 고도화 등은 모두 이 일본인 자본의 성장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고, 또 주로 일본인 기업간의 분업과 우회생산의 증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P184

일본인 대공업과 조선인 공업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관계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포령적(enclave) 혹은 비지적인 존재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P190

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까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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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니 그 대관은 말도 행동도 결코 식견 있는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모든 관직을 세습하는 도쿠가와 정치 탓으로, 이제 폐정의 극치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깊이 생각해보니 '나 자신도 앞으로 이 같은 햐쿠쇼 생활을 하게 되면, 저 벌레 같은 인간처럼 지혜나 분별도 없는 자에게 경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 정말 유감천만한 일이다. 정말 햐쿠쇼에서 벗아나고 싶다. 너무나 바보 같은 일이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37~38쪽)




나카쓰는 봉건제도를 유지하면서 마치 물건을 상자 속에 가지런히 넣어둔 것처럼 질서가 잡혀 있어 몇 백 년이 지나도 전혀 변함이 없는 상태였다. 가로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가로가 되고, 아시가루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아시가루가 되고, 그 중간에 위치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몇 년이 지나도 변화라곤 없다. (중략) 아버지가 45년 평생을 봉건제도에 속박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만을 참고 살다가 헛되이 세상을 떠난 것이 유감스럽다. 또한, 젖먹이의 장래를 걱정하여 중 노릇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에 이름을 남기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그 괴로운 속마음, 그 깊은 애정.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봉건적 문벌제도에 분노하는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어 혼자서 울곤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28쪽)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모두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이행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직접 몸으로 체험했던 인물들이다. 시부사와는 메이지 정부에서 잠깐 관직 생활을 했다가 이후 민간에서 가장 저명한 경제/기업인이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치에 몸 담지 않고, 민간에서 활발한 저술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였던 문명개화 사상가이다. 위의 책들은 두 사람이 쓴 자서전이다(시부사와의 경우는 구술 자서전).


인용한 부분은 당시 일본의 엄격한 세습신분제에 강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다. 에도시대 일본은 신분뿐만 아니라 신분 내에서 구체적인 직분까지 세습되었던 매우 엄격한 세습신분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당연히 의지와 능력이 있더라도 개인은 자신의 직분만을 수행할 수 있다. 문지기의 가문에서 태어나면 그 사람의 아들도, 그 손자도, 몇 대 손까지도 문지기이다.


이렇게 엄격한 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에서 유학이 보급된 것이었다. 무사가 다스리던 일본에서는 원래 유학의 비중이 매우 미미했으나, 무사에게도 점차 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유학을 배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평화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더 이상 전투만을 무사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기 어렵게 된 사정이 있다. 결국 1790년, 주자학을 가르치는 기관이 설립되고, 빠르게 지방에서도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 무사 계급뿐만 아니라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평민층에서도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 많아졌다.


유학의 목표는 수기치인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궁극적으로는 통치에 임하는 것이다. 통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에 나가 천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일본의 세습신분제 하에서는 지배자는 정해졌고, 피지배민은 언제나 피지배자이다. 이러한 갈등 위에서 전통적인 지배 질서와 사회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위의 두 인용문은 그러한 유학적 이상과 현실적 제약으로 분노하였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능력이 있어도 신분제 때문에 변변찮은 인생을 살다가 죽은 것에 강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자서전의 다른 곳에서는 '번벌은 나의 원수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의 분노는 유학적 이상과의 괴리된 현실 때문만이라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유학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한 요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햐쿠쇼, 말하자면 평민 집안 출신이었다. 그중에서는 호농층이라고 꽤 재산을 축적한 계층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시부사와 역시 <논어> <맹자> 등을 공부하여 어느 정도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유학을 공부하게 되면, 농민이더라도 학문을 통해 천하를 다스리는 방향을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시부사와처럼 존왕양이 운동에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었다.


덧붙여서, 하급 무사의 불만 역시 유학 이외에 당시 경제적 요소도 있다. 직분이 고정된 사회에서 하급 무사의 봉급 역시 시간이 지나도 고정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일본은 이미 상업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쌀 같은 물건의 가격이 하급 무사의 봉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사가 죠닌(상인 계층)에게서 돈을 빌리기도 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무사가 죠닌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근대 일본에서 존왕양이 운동이나 메이지유신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거 엄격했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이는 당시 일본의 유학화 흐름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학화 경향에 대해서는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도쿠가와 체제 말기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앤드류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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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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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는 20세기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이 강조될 경우, 아우슈비츠 이전에 많은 학살과 죽음이 은폐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아우슈비츠가 전체 희생자의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학살에서는 구덩이에 사람을 단체로 줄지어 눕게 하여 죽게 하거나, 자동차 엔진 배기가스로 질식사시키는 등 그 수법도 더 잔혹했다. 무엇보다 아우슈비츠가 이렇게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역설적으로 생존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생존자가 거의 없던, 그리고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조차 없던 죽음의 장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게 된다. 실로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아우슈비츠 폄하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1930년대 초 최소 330만 명(저자 추정)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7~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 1939~1941년 소련과 독일의 폴란드 학살, 독소전쟁 중 나치에 의한 계획적인 소련인·유대인 대학살, 전후 스탈린의 인종 청소 작업. 이 모든 일이 블러드랜드,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체제하에서 일어났다. 이 책은 이때 죽어간 1400만 명의 이야기다.


 

2.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


 

저자가 결론에서 던지는 이 질문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전제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질문인 듯하다. 어떻게 그러한 대학살이 가능했을까? 이를 스탈린과 히틀러라는 피에 굶주린 광기에 찬 악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해석은 역사의 진실과도 맞지 않거니와, 별다른 시사점을 주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싹이 보이는 인물을 배제해버리는 것 말고는 없다. 대학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살의 원인을 묻는 일은 오늘날에도 매우 긴요하고 절실한 작업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블러드랜드에서 저지른 학살의 전개와 결과를 아주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히틀러와 스탈린, 독일과 소련,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학살을 살펴보고 비교하여 수많은 사람의 폭력적인 최후의 원인을 밝히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스탈린은 즉각적으로 이 사태를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공격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역 지도자와 외세의 체제 전복 행위에 전가하였다. 대숙청 과정에서는 안보적 우려 때문에 수많은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는 그 실체가 너무도 모호하고 불확실한 허구적 조직과 관련시켜 죽였다. “폴란드의 음모 따위는 실체가 없었기에,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은 폴란드계 및 폴란드와 관련된 다른 소련인들, 폴란드 문화나 로마 가톨릭교를 박해해야 했다.” 대숙청에서는 정적들과 집단화에 저항하던 때를 상징하는 부농도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부농의 저항이 많았던 우크라이나가 살육의 중심지였는데, 이곳은 폴란드계 소련인의 대다수가 살던 곳이기도 하였다.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 출신이라면, 당연히 부농이다.” 여기서 폴란드인은 개인이 실제로 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규정된 그 존재 자체때문에 처형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나치와 히틀러는 스탈린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폴란드에 대한 파괴적 열망을 공통으로 가졌다는 점에서 두 체제는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들의 주 학살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못지않게 나치는 폴란드인들에 대해서도 대량학살을 벌였다. 1939,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나온 전쟁포로를 독일의 지휘관들은 빨치산, 즉 전시 국제법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는 비정규 집단으로 규정했다.” 독일군은 폴란드라는 나라는 없으며, 따라서 폴란드군도 존재하지 않는 군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또한 폴란드 유대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 미개한 폴란드 땅을 더욱 오염시키는 병균이나 해충쯤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폴란드 지역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하려 하였고, 하인리히 힘러가 이 일을 전담했다. 이 원대한 이상을 이루기 위해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은 사라져야만 했다. 그 자리는 독일인으로 채워 넣을 계획이었다.

 


독소전쟁은 더 크고 더 잔혹한 학살이 자행된 사건이었다. 독일 군인은 레닌그라드를 포위 점령하여 인위적으로 500만 명 이상을 굶주리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점령지에 수용소라는 이름의 살인 공장을 지었다.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등지에서 학살 시설이 세워져 약 13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사망하였다. 이 학살 작전은 라인하르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이다. 이 시설에서는, 총살, 구덩이 파기, 엔진 배기가스로 질식시키기, 독가스 살포 등 유대인을 죽이는 데 여러 방식이 동원되었고, 경찰들은 열차로 보낼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까지 끌고 갔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이들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의 원흉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였다. 이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독소전쟁에서 패배가 거의 확실해지자,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복수에 가까운 살육전을 펼쳤고, 수용소는 폐쇄, 매우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아우슈비츠가 마지막 해결책의 마지막 장소로 지정되었다.



 

4.

사람을 죽이는 체제, 수사, 방식에서 양자는 소름 돋도록 유사하다. 저자가 밝혀낸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 여겨질 권리를 빼앗는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 희생되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듦으로써 살해 행위에 도덕적 부담을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체제 모두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여기에는 두 지도자(스탈린과 히틀러)가 내세운 애초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적 비전이 공격받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다. 도덕적 딜레마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두 조직을 앞세워 집단학살을 덜 나쁜 일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데 선수였다.” 마지막으로 소련과 나치 독일은 이라는 규칙 자체를 정하는 유일한 집단이 지배하는 일당독재체제 국가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최소한의 민주적 질서의 부재, 특정 집단의 인간에 대한 비하와 악마화, ‘막연하지만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의 맹목적인 헌신 강요, 개인 숭배. 그 수많은 사람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자,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 죽음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5.

이 책을 읽을 때,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저자가 최대한 복원하고 담아내고자 노력한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죽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살은 기본적으로 개인에 대한 것이며, 그러므로 희생자 개개인의 죽음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 곳곳에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죽은 자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가족관계, 그들이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주 상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아마 여건만 되었다면, 학살당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저자는 옮겼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저자는 대학살의 희생자들이 단순히 몇백만’ ‘몇십만이라는 추상적인 숫자로 기억되는 것에 반대하며, 나치와 소련의 체제하에서 죽은 개개인에 관심을 가진다. 그 일환으로, 책 전체에 걸쳐서 저자는 어림수를 쓰는 것을 되도록 자제하며, 반드시 죽은 이의 숫자를 일의 자리까지 적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은 그 수가 어림수가 아닐 때, 다시 말해서 마지막 단위가 0이 아닐 때 쉬워진다.” 저자는 단순한 수치로 죽은 이들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며, ‘하나의 ~로 표현할 것을 힘주어 강조한다.

 


‘1400이라는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죽은 이는 이름도 없이 그저 ‘1400속에 한 명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 압도적인 숫자에 개인성이 묻혀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개인성을 제거하고 사람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나치와 스탈린의 정신에 가까운 것이며, 인간성을 가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은 그 숫자들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와 삶에 주목한 책이기도 하다. 역사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와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숫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주어 고유한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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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우님 완독 하셨군요! 부럽습니다. 저도 내일부터 더 열심히^^*

Redman 2021-04-05 09: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미미님도 꼭 완독하십쇼!! 이 책은 결론이 진국이에요!

han22598 2021-04-1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역사 속에 하나의 숫자로만 기억되는 그들을 되살려 기억해야하는 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거.... 저도 이 책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Redman 2021-04-15 11:38   좋아요 0 | URL
네 여러 함의가 담긴 책이죠 길지만, 저도 꼭 추천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ㅎㅎ
 

일본은 북해도에서부터 조선까지 일본인화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에서 동화를 작동시킬 때마다 항상 문명화 논리를 동반하며 이민족에게 다가갔다. 달리 말하면 동화, 곧 이민족의 일본인화를 현실에서 작동시키는 양 축이 기본적으로 일시동인과 문명화 논리였다...일본은 문명동화를 내세웠더라도 궁극에 가서는 일시동인의 세상으로 간다는 주장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지배자들이 언설로서는 단계적 지향을 이식하고 발언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현실에서는 단계적이지도 선택적이지도 않았다. - P218

이처럼 조선총독부는 대권을 위임받은 총독을 정점으로 조선특별통치주의 전략을 제도화하고 이를 헌병경찰제를 빌려 조선인의 일상에 침투시키는 한편, 언어동화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내면에 지배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조선은 한때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였고, 조선인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소유한 채 일본문화에 비해 상대적 우월심리도 품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이 군사력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을 진압한 데서도 시사받을 수 있듯이 조선인의 내면 깊숙이 반일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립학교와 서당의 활발한 교육활동은 계몽적인 형태로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표현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1910년대 동화정책과 조선인의 깊은 내면 사이에 거리감은 헌병경찰제와 상주 사단에 의해 메워지고 있었다. - P257

조선인과 일본인은 다른 민족이라는 현실과 천황제의 핵심논리인 가족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모순 때문에, 일본의 지배자들은 친일파의 일본인화 내지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결국에 가서는 신뢰할 수 없다. 여기에 점진적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정책의 딜레마가 있었다. - P264

조선인과 일본인은 다른 민족이라는 현실과 천황제의 핵심논리인 가족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모순 때문에, 일본의 지배자들은 친일파의 일본인화 내지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결국에 가서는 신뢰할 수 없다. 여기에 점진적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정책의 딜레마가 있었다...다른 하나는 조선인이 일본인화기 위해 국민, 곧 조선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점이다. 그러면서도 미나미 총독의 훈시에서 국민의 일원으로서 조선인에게 주어져야 할 권리를 언급한 부분을 전혀 찾을 수 없다. - P273

학교 교육의 종착점은 교육 포기와 학교의 군대화였다. 달리 말하면, 조선총독부는 결전체제기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에게 황국신민의 자질을 내면화시키기 위한 황민화교육도 포기한 채 학생을 군인이자 노동자원으로서만 활용하였다. - P283

혈연관계에 기초한 가족주의적 세계관은 일본민족과 이민족간의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짓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동화가 강조될수록, 동화정책이 추진될수록, 지배민족인 일본인과 피지배민족인 사이에 차별화와 차이화의 간격만 커질 수밖에 없고, 권리평등이 없는 대신 의무평등만 강요하는 상황이 심화되는 것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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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한정한다면 모든 나라가 60년이 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후‘를 60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아시아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 P12

전후 일본의 체제는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을 공존시켜 미군의 주둔으로 국방예싼을 억제하고 경제성장을 우선시했다.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기지(전용시설)의 75%를 집중 배치, 즉 미일 안보체제의 부담과 모순을 오키나와에 떠넘김으로써 그들의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 P14

물론 법적으로는 전쟁도 점령도 끝났다. 현재 오키나와는 전투를 치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주민이 60년 전 수용소를 떠나 도착한 고향 마을은 미군기지가 되어 있고, 그 후에도 오키나와인은 총검과 불도저에 토지를 빼앗겼다. 미군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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