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펴보니 그 대관은 말도 행동도 결코 식견 있는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모든 관직을 세습하는 도쿠가와 정치 탓으로, 이제 폐정의 극치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깊이 생각해보니 '나 자신도 앞으로 이 같은 햐쿠쇼 생활을 하게 되면, 저 벌레 같은 인간처럼 지혜나 분별도 없는 자에게 경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 정말 유감천만한 일이다. 정말 햐쿠쇼에서 벗아나고 싶다. 너무나 바보 같은 일이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37~38쪽)




나카쓰는 봉건제도를 유지하면서 마치 물건을 상자 속에 가지런히 넣어둔 것처럼 질서가 잡혀 있어 몇 백 년이 지나도 전혀 변함이 없는 상태였다. 가로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가로가 되고, 아시가루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아시가루가 되고, 그 중간에 위치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몇 년이 지나도 변화라곤 없다. (중략) 아버지가 45년 평생을 봉건제도에 속박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만을 참고 살다가 헛되이 세상을 떠난 것이 유감스럽다. 또한, 젖먹이의 장래를 걱정하여 중 노릇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에 이름을 남기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그 괴로운 속마음, 그 깊은 애정.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봉건적 문벌제도에 분노하는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어 혼자서 울곤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28쪽)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모두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이행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직접 몸으로 체험했던 인물들이다. 시부사와는 메이지 정부에서 잠깐 관직 생활을 했다가 이후 민간에서 가장 저명한 경제/기업인이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치에 몸 담지 않고, 민간에서 활발한 저술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였던 문명개화 사상가이다. 위의 책들은 두 사람이 쓴 자서전이다(시부사와의 경우는 구술 자서전).


인용한 부분은 당시 일본의 엄격한 세습신분제에 강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다. 에도시대 일본은 신분뿐만 아니라 신분 내에서 구체적인 직분까지 세습되었던 매우 엄격한 세습신분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당연히 의지와 능력이 있더라도 개인은 자신의 직분만을 수행할 수 있다. 문지기의 가문에서 태어나면 그 사람의 아들도, 그 손자도, 몇 대 손까지도 문지기이다.


이렇게 엄격한 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에서 유학이 보급된 것이었다. 무사가 다스리던 일본에서는 원래 유학의 비중이 매우 미미했으나, 무사에게도 점차 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유학을 배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평화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더 이상 전투만을 무사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기 어렵게 된 사정이 있다. 결국 1790년, 주자학을 가르치는 기관이 설립되고, 빠르게 지방에서도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 무사 계급뿐만 아니라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평민층에서도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 많아졌다.


유학의 목표는 수기치인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궁극적으로는 통치에 임하는 것이다. 통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에 나가 천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일본의 세습신분제 하에서는 지배자는 정해졌고, 피지배민은 언제나 피지배자이다. 이러한 갈등 위에서 전통적인 지배 질서와 사회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위의 두 인용문은 그러한 유학적 이상과 현실적 제약으로 분노하였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능력이 있어도 신분제 때문에 변변찮은 인생을 살다가 죽은 것에 강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자서전의 다른 곳에서는 '번벌은 나의 원수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의 분노는 유학적 이상과의 괴리된 현실 때문만이라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유학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한 요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햐쿠쇼, 말하자면 평민 집안 출신이었다. 그중에서는 호농층이라고 꽤 재산을 축적한 계층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시부사와 역시 <논어> <맹자> 등을 공부하여 어느 정도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유학을 공부하게 되면, 농민이더라도 학문을 통해 천하를 다스리는 방향을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시부사와처럼 존왕양이 운동에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었다.


덧붙여서, 하급 무사의 불만 역시 유학 이외에 당시 경제적 요소도 있다. 직분이 고정된 사회에서 하급 무사의 봉급 역시 시간이 지나도 고정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일본은 이미 상업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쌀 같은 물건의 가격이 하급 무사의 봉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사가 죠닌(상인 계층)에게서 돈을 빌리기도 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무사가 죠닌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근대 일본에서 존왕양이 운동이나 메이지유신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거 엄격했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이는 당시 일본의 유학화 흐름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학화 경향에 대해서는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도쿠가와 체제 말기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앤드류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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