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앎 -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다시 보기 로완 윌리엄스 선집 (비아)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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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피조물을 위해 죽었다는 거대한 역설을 붙들고 몸부림친 그리스도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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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 -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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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해 보이고 일상적인 것들의 소비의 역사,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젠더갈등, 제국주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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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노동에세이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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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개인의 선함과 악함이 아니라 구조와 시스템. 비건이 되는 건 아니더라도 육식을 줄일 필요가 있겠다.
다 읽으면 며칠 고기 트라우마 앓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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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사랑>은 사랑에 대한 에세이다. 서양 고전 전통에서 사랑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논의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나온다. <항연>은 아가톤이라는 작가의 비극 경연 대회 우승 후 열린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여러 연사들이 에로스를 찬미하는 연설을 아폴로도로스가 전해들어 이야기해주는 구성을 취한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이지만,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이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리는 에로스와 인간은 어딘가 '비극'적이다. 그는 사랑의 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태초에는 세 종류의 인간, 즉 남성, 여성, 자웅동체가 있었다. 머리는 하나인데, 얼굴이 두 개였고 네 팔과 네 다리, 두 개의 생식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만하여 제우스의 격노를 사고 말았다. 제우스는 천벌을 내려 이들을 반으로 잘라 하나의 얼굴, 두 팔과 두 다리만 지닌 반쪽의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들의 본성이 둘로 잘렸기 때문에 반쪽 각각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줄곧 만나려 들었네. 서로 팔을 얼사안고 한데 뒤엉켜 한 몸으로 자라기를 욕망하다가 결국에는 상대방과 떨어진 채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어서 혹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죽어갔네...바로 그래서 오래전부터 내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인간들에게 나면서부터 들어 있게 되고, 그것은 옛 본성을 함께 모아 주며, 둘에서 하나를 만들어내어 인간 본성을 치유하려 노력하네.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한 인간의 부절()이네. 마치 넙치들 모양으로 하나에서 둘로 잘라져 있으니까 말일세. 각자는 자신의 부절을 하염없이 찾아다닌다네."(강철웅 역, <향연>, 이제이북스)


에로스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아서 이전의 온전한 존재로 돌아가려는 열망이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사랑이란 인간의 불완전, 자신의 결핍으로부터 시작한다. 타인에게 호의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 안에 자신에게 결핍한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다른 인간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사랑받는 대상이 갖고 있는 특성이 사랑하는 쪽의 사람에게는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한자인 인간의 사랑은 결핍에 대한 자각이므로, 인간은 사랑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필요의 사랑이다. 따라서 무한자, 즉 신은 필요의 사랑을 하지 않으며 그가 사랑을 한다면 언제나 무엇을 주는 이타적 사랑일 것이다.


C.S.루이스 역시 처음에는 사랑을 위와 같이 이해했던 듯하다. "들어가는 말"에서 그는 원래 저술 구상 계획을 고백한다. "저는 인간의 사랑이란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을 닮은 한에서만 비로소 사랑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필요의 사랑Need-Love'과 '선물의 사랑Gift-Love'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 필요의 사랑은 "무력한 존재"인 인간이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타인을 필요로" 하며 "무엇을 알기 위해선, 또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할 때조차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랑이다. 이는 <향연> 속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을 염두에 둔 개념 구분임이 분명하다. 루이스는 이 필요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전적으로 다르며, 선물의 사랑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루이스가 봤을 때, 필요의 사랑은 '이기심'이 아니며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은 사실상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에 필요의 사랑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나아가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한 구절("최하층 없이는 최상층이 없다")을 인용하며 루이스는 필요의 사랑이 없는 선물의 사랑은 "악마적인 환상"이 된다고 경고한다. 실상 필요의 사랑은 "인간의 가장 높고 가장 건강하며 가장 실제적인 영적 상태...그 주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게 된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영광스러운 형상일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사랑과 신의 사랑은 서로서로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랑=필요의 사랑=소유하려는 사랑/신의 사랑=선물의 사랑=주기만 하는 사랑'이라는 도식은 상당히 편협한 사랑론이다.


p.s.

나는 C.S.루이스가 존 밀턴과 성서의 충실한 독자였던 만큼이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충실한 독자였다고 믿는다. 비록 루이스의 문학비평서(<실낙원 서문><폐기된 이미지> 등)에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적지만 말이다.


플라톤의 <향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같은 책들이 루이스와 별 관련 없어 보여도, 실제로 루이스는 이들을 의식하며 글을 썼을 것이다. <네 가지 사랑>에는 <향연>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여러 곳 있었다. 그래서 <네 가지사랑>은 부분적으로 'C.S.루이스의 <향연> 독해의 산물'로도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규정은 인상론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리스도교의 층위에서 사랑을 논하고 있다는 점, 루이스의 얘기와 <향연>의 얘기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다. 


그래도 두 책을 같이 읽으며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독서가 될 것이다. 그 어렵고 난해한 <향연>을 읽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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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김덕영 해제.

 

1.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이 연구의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그의 가족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이 연구의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이 연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아버지 살해의 지적 산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

 

베버는 그의 개인적 배경과 체험을 통해서 칼뱅주의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관계, 즉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문제의식이나 통찰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베버의 어머니는 근대 자본주의의 담지자 집단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담지자 집단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의 소유자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신앙이 그녀의 세계관, 인격 및 행위를 통해 외적으로 표출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장()인 기업이나 시장에서 행위하지는 않았다. 당시 여성들은 다양한 문화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가정의 영역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버가 종교적이고 경건한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그녀와 대척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아버지와의 대비를 통해 종교적 이념과 경제적 윤리, 즉 칼뱅주의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과 근대 자본주의 정신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적 관계를 인식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 아니 논리적 개연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적 배경이나 체험이 어떤 사상이나 이론 또는 지적 저작이 형성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거나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생애사를 여러 가능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및 지적 담론과 연계해 고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설령 개인적 배경이나 체험이 특정한 주제에 대한 관심이나 문제의식을 불러온다고 할지라도 과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는 변수들과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 설정, 접근 방법과 논증 과정의 선택, 자료의 수집과 정리 및 이용, 그리고 지식인 공동체 내에서의 토론과 논쟁 등 인식의 구체화 과정은 개인의 생애사에 의해 적절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

 

당시에 자본주의는 비단 경제학뿐만 아니라 문화과학과 문화철학 일반의 주된 인식 관점이었다...당시 문화과학이나 문화철학에서 관심을 가졌던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문화로서의 자본주의, 즉 근대 세계에서 인간의 문화적 삶을 구성하고 결정짓는 중요한 구조적 요소로서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자본주의도 자체도 문화에 속한다. 즉 그것은 물질문화 또는 경제문화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이해에 입각해 문화과학자들과 문화철학자들은 자본주의라는 물질문화의 발전과 이것이 인간적인 것, 정신적인 것, 제도적인 것, 사회적인 것에 끼치는 영향,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인식 관심을 가졌다."

 

 

정신분석학의 틀은 역사 연구에서 유의미한 인식 틀이 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지점.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비투스 개념도 참조할 것 cf.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 개념은 결국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즉 사회적 '주체'는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정신이 아니란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의 실천을 이해하려면 그에게 가해진 자극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모종의 성향 체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면서 어떤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됩니다...행위자는 역사를 가지며 개인사의 산물이자 환경과 연관된 교육의 산물이고, 집단적 역사의 산물입니다. 특히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등은 사회구조가 체계화된 산물입니다."

 

 











2.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감명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역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다. 먼저 만약 제2부가 미국 체험을 통해 형성되었다면, 190411월에 미국 여향을 마치고 돌아와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해 불과 6개월 만인 19056월에 그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

 

그의 진정한 인식 관점은 칼뱅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교파와 분파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대해 갖는 문화의의였다. 베버가 미국에서 관찰한 자본주의 정신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발전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그 어느 곳보다 순수한 형태로 표현된 것이었다.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이념형적' 순수함이었다. 결국 베버에게 미국은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씨름해오던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보다 명백한 형태로 확인해주는 실례였던 것이다.

 

(...)

 

베버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이미 1897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의에서 부분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었다고 한다."

 

 

 

3. 마르크스의 망령과 싸웠다?

 

"베버는 마르크스의 망령과 싸우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자본>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으로서 상호 배척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베버가 마르크스의 '망령'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다른 '망령들'과는 싸웠다는 사실이다. 즉 마르크스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폄훼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망령', 자신의 연구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의 유산을 극복하고 청산하려는 시도로 보고자 하는 '망령', 그리고 유물론을 엄격한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이 아니라 형이상학과 세계관 그리고 예언의 수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망령'과 싸웠다.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해서는 이를 화폐 획득 및 화폐경제와 동일시하려는 '망령'과 싸웠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망령들이란 구체적으로, 베르너 좀바르트, 루요 브렌타노, 게으로크 짐멜을 말한다.

 

 

4. 베버는 칼뱅주의가 자본주의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연구에 대한 비판은 상당수가 오해와 무지 또는 단순화되고 도식적인 접근이나 해석의 오류 등에서 기인한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베버는 칼뱅주의가 자본주의를 창출했다는 잘못된 테제를 내세웠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나 문화권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에 베버의 테제는 역사적으로 반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버가 진정으로 내세우고 입증하려는 테제는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기계적 '일대일' 인과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의 다양한 구성요소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다시금 이 자본주의 정신의 다양한 인과 요소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정신은 광범위한 근대적 합리성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베버의 입장이다." (5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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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2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의 수많은 행정학 도서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됩니다...

Redman 2023-11-23 12:20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렇군요 ㅠㅠㅠ 수정되어야 할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