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2세 나남 셰익스피어 선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성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극은 감상자의 공포와 연민을 환기시켜 카타르시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비극의 플롯, 주인공은 이 목적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짜여야 한다. 서양 비극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 비극을 총괄하여 비극 일반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은 완전무결한 도덕적 선인이나 극악무도한 악인이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명망과 번영을 누리고 있으나, 덕과 정의에서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 결점은 범죄 때문이 아니라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비극의 인물은 '사상'을 대사로써 표현한다.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클레온이 각각 가족주의적 윤리와 국가주의적 윤리를 대사를 통해 드러낸 것이 그 예이다. 비극의 등장인물은 사상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들이 가진 사상과 결점이 그들과 상황을 파국으로 이끈다. 더 이상의 설명이 낭비라고 여겨질 정도로 희곡과 영문학 전체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셰익스피어의 비극 역시 이러한 비극의 구성준칙이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사극 <리처드 2세>를 상술한 일반적 준칙을 사용하여 이해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사극으로 분류되는 작품은 총 열 개이다. 그중 8편은 두 묶음의 4부작이며, <존 왕>과 <헨리 8세> 두 작품이 다른 나머지 작품이다. 4부작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인 리처드 2세와 랭커스터 왕가의 왕들을 다룬 <리처드 2세>, <헨리 4세> 1~2부, <헨리 5세>, 그리고 '헨리아드'라고도 불리는 <헨리 6세> 1~3부와 <리체드 3세>를 말한다. <리처드 2세>는 다른 사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늦게 집필되었지만, 시대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 그러므로 셰익스피어의 다른 사극을 읽기 전에 먼저 <리처드 2세>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사극으로 분류되어도 이 극은 비극의 특징도 갖추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비극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리처드 2세>를 비극으로 읽는다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리처드 2세는 어떠한 사상을 가진 인물인가? 그는 무슨 결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대사로 어떻게 표현되었고 결말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줄거리를 요약하며 분석해보자.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와 왕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 그는 자신의 왕위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행동은 오만했다. 한마디로 폭군이었다. 그는 볼링브로크와 모브레이의 대결을 멈추고 그들을 일방적으로 추방시켰다. 존 오브 곤트가 자신을 힐책하자 그에게 격분하였으며, 곤트가 죽자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통치자로서 실정을 거듭한다. 세금은 무거웠고, 재정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반란 진압 원정을 떠나려하고, 자신이 그 원정에 직접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여 긴급한 순간에 왕궁을 비우려고까지 했다. 2막 1장까지의 내용은 리처드 2세의 실정과 악정을 부각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득의양양하게 행동할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왕권의 신적 정당성을 강하게 확신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2세를 질책했던 곤트도 이를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하느님 권세의 대행자, 도유를 받아 하느님을 대리하는 분"(1.2.37-38) 자연인 리처드 2세는 결점 많은 인물이지만, 그의 왕관은 신성한다. 그리고 그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은 '왕' 리처드 2세 역시 신성하다. 저딴 인간이라도 왕이니까 대접받는 것이다. 그 권위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왕권신수에 굳세게 의존하기 때문에 쉽게 자아도취에 빠지고 자신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으며, 실책을 저질러도 하느님의 은총이 보호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견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리처드 2세의 모습은 볼링브로크의 역모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사실상 이 극은, <오이디푸스 왕>을 연상시키듯이, 오아권의 신성함을 믿고 자신감에 차 있던 리처드 2세가 점진적으로 자신의 확신을 잃고, 신의 대리자에서 인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3막 2장 초반에서 리처드 2세는 아직 자신의 왕위의 신성함을 믿고, 신의 대리자에게 부어지는 하느님의 보호와 은총을 확신한다. 볼링브로크의 반역은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속의 인간(worldly man)들이 내뿜는 숨결은 결코 주님께서 점지하신 대리인을 폐하지 못"(3.2.56-57)하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선 리처드 위해 천상의 보수 약조 받은 영광스런 천사 기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군세가 흩어지고 패배가 확정되자, 그의 확신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극의 반전이 시작된다. 신의 대리자라는 '왕'의 신성한 신체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가 되고, 결국에는 그마저도 사라지고 인간의 필멸하는 신체만이 남게 된다. "무덤과 지렁이와 묘비명 이야기나 하자꾸나...마침내 죽음은 오고, 작은 바늘 하나로 군왕의 성벽을 뚫느니, 그리되면 왕군이여 안녕!"(3.2.145 이하) 3막 3장 이후 리처드 2세의 대사는 '왕'과 '인간'의 대비를 보여주는 상징과 비유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극적인 반전은 셰익스피어의 고급진 대사와 만나 한층 더 풍부해진다. 단순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여 한탄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 '지렁이' '묘비명' 같은 은유를 동원하여 리처드 2세가 느꼈을 절망감이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모든 것을 체념한 리처드 2세는 볼링브로크의 가신 노섬벌랜드의 제안을 수용하여 볼링브로크의 추방령을 철회하고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볼링브로크가 주재한 중신회의에 불려와 왕위를 그에게 넘겨주는 탈관식을 연출한다. 왕위를 상실한 리처드 2세는 이제 런던탑으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된다.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후에는 볼링브로크의 부하 엑스턴과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신의 대리자' 리처드 2세는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반대로 볼링브로크는 추방자 신세에서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가 헨리 4세이다.

<리처드 2세>는 신성한 왕좌에 앉아있던 왕이 인간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다. 리처드 2세는 통치의 정당성을 신적인 것에서 구했고, 왕좌가 신적 정당성을 가진다는 믿음이 견고히 유지되는 한, 자연인 리처드 2세의 결점이나 악덕은 왕위의 신성성에 의해 문제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 비극의 본질이 있다. 곧 절대적이며 신성한 왕권과 유한한 인간성의 대립이 그것이다. 존 오브 곤트가 말한 것처럼 리처드 2세는 "성유 바른 몸"을 지니고 있어도 "조심성 없는 환자"(2.1)이다. 전자는 왕으로서의 신성한 신체이고, 후자는 물리적 인간으로서의 리처드이다. 전자가 있음으로써 리처드 2세 같은 무능한 군주도 신성시될 수 있었다. 자신의 통치를 예수의 신적 통치와 동일시하던 이 폭군은 왕위를 뻬앗긴 채 인간이 되었고, 최후에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죽었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는 시적 언어를 통해 이 흠 많은 폭군의 운명을 보여주어 그를 '영원불멸한 왕의 신체'에 대한 영원한 상징으로 남게 만들었다.

그러면 헨리 볼링브로크는? 현세를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왕이 된 그이다. 그는 신적인 것에서 와위의 정당성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리처드 2세의 살해 보고를 받은 그는 양심의 가책에 짓눌려 다시 종교적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독을 필요로 하는 자 독을 좋아하지 않으니...나 리처드 죽기를 바랐으나, 그분을 죽인 자를 혐오하고, 죽임당한 그분을 애도한다...카인과 더불어 밤의 그늘 속을 헤매거라...나는 성지 향한 여정에 올라, 내 죄지은 손에 묻은 이 피를 씻으려 하고"(5.6.38 이하) 정치는 늘 정당성을 요구한다. 정치란 현실적 필요에 따라 행해지고, 목적을 위해서는 악을 행할 수도 있음을 아는 그였지만, 헨리 4세는 그러한 필요만으로는 왕위를 정당화하는 데 충분치 않음을 알았기에 그는 다시 신앙으로 회귀한 것이다. 리처드 2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왕위 찬탈로 인하여 그것을 더 극적으로 깨달았을 뿐. 그렇지만 리처드 2세와 달리 헨리 볼링브로크는 이미 인간의 필멸성과 왕의 절대성에 내재한 긴장을 인지하고 있었다. 헨리의 마지막 대사에 드러나는 고뇌와 괴로움은 여기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이로 미루어볼 때 <헨리 4세> 1~2부의 갈등 구조도 <리처드 2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예상해볼 수 있다. 자세한 건 읽어봐야 알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