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얀 키에르케고어 -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비아 문고 5
매튜 D.커크패트릭 지음, 정진우 옮김 / 비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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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키에르케고어의 모든 저작을 개괄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할 법한 몇 가지 핵심 개념들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매튜 D. 커크패트릭은 개인과 윤리의 '토대' '체계' '내용'으로 나누어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문제의식, 그 해결, 실천적 의미 등을 개략적이지만 핵심을 위주로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키에르케고어의 물음은 하나로 귀결된다 - "당신은 진정으로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거나, 자신의 직업, 성격, 국적 등등. 그러나 키에르케고어가 봤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직업, 이름, 자기 앞에 직접 드러난 현재 상태, 관습(이런 것을 포괄하여 "직접성"Immediacy으로 개념화한다) 등을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갈 뿐이며, 이렇게 외적인 행위나 지위로만 규정된 삶은 자기 자신의 상실로 이어지며, 개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규정할 때에는 자신이 중시하는 것,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것. 키에르케고어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버렸고, 자기 규정의 토대를 상실했다. 자신을 의미있게 만드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토대의 상실의 결과는 불안과 절망이다. 이는 인간의 외적 행위와 내면적 본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생기게 된 특수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배향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당연히 하나님으로의 귀향이어야 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신 없이 세계를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실재(Reality)"를 확립한다. 여기서 키에르케고어가 기독교의 '우상' 개념을 재해석하여 진술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실재'는 신 없는 세계에서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가 되고자 하는 인간"이 불안과 절망을 버티기 위한 버팀목으로써 창조한 어떤 규정이다. 그러나 "그 실재는 근본적으로 유한"하며, 그에 따라 "결국 붕괴한다." 신이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신념과 삶의 방식은, "올바른 방향을 지시해줄 어떤 방향등도 존재하지" 않은 "어지러운 자유"에 불과하며, 그 무한한 자유 속에서 인간은 자기 마비에 걸린다. 실재의 귀결은 "실재의 체계화"이다. 자신의 유한함을 버티지 못하는 인간은 유한성을 잊기 위해 스스로 만든 실재로 진리로 삼아 거기에 의존하고, 실재로 세계를 일관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인은 다를까? 키에르케고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교인이 더 절망적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영원한 진리와 하느님의 은혜를 값싼 은총으로 둔갑시켜 버리며, 고정된 종교 형식을 만들어냄으로써 하나님을 인간적 종교적 실재에 가두고 허위의 심리적 안정만을 구한다. 이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저속한 물질적 요구를 총족시켜줘야만 하는 민원 창구인으로 전락한다. 이는 최악의 범죄이다. 이렇게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환상적 실재에 매몰된 개인은 "자신을 상실해" 버리고 "우리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망각한다."


방향을 잃고 자신을 상실한 상태는 확실히 "곤경"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키에르케고어의 대답은 간단하다. 너 자신, 즉 개인(단독자)이 되어라". 이는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는 '실재'에 기초한 삶을 거부하는 "탈구축(De-Construction)이며, 둘째는 결단을 통한 자아의 창조라는 "재구축(Re-Construction)이다. 실재의 기만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거부하고 거짓된 토대에 기반한 삶을 거부하는 이 이중의 거부를 통하여, 그리고 "자아와 진실로 마주"함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나'가 된다.


나 자신이 되는 과정은 고독하며 고통스럽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듯한 경험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제게도 저 자신이 확연치 못했습니다(nec mihimet ipsi vel ipse conspicuus, 7.1.2.)"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탈구축과 재구축은 나 자신에 대한 성찰, 즉 나를 낯설게 볼 것을 요구한다. 내 삶은 무엇에 기초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나를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나를 상실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변화는 반드시 나 자신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외피만 바꾼 것에 그친다. 그리고 이것은 단독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고백록> 8권 회심 직전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모든 것에서 벗어나 홀로 되어(essere solo)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무엇으로 나를 재구축할 것인가? 단독자의 삶, 단독자이기를 거부하는 삶,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누구의 도움이나 압력이 개입될 수 없고 개입되어서도 안 되는 단독자의 의지적 선택의 영역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나 자신을 바라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키에르케고어를 반쪽만 이해한 꼴이 될 것이다(혹은 아예 이해하지 못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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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김민우 2022-06-11 07: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하라 2022-06-1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축하드립니다. ^^
기쁜 소식과 함께하시는 행복한 주말 되세요~~

김민우 2022-06-11 07:56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매달 감사합니다. 이번주 주말 잘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6-1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