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모티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역사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 유서 깊은 역사만큼 복수 모티프를 다루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햄릿>처럼 복수를 앞둔 개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묘사한 작품도 있는 반면에
철저하게 복수가 성취되는 과정에만 집중하여 일종의 쾌락을 선사하는 작품도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는 후자에 속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제목만큼이나, 무척 단순하다.
킬러의 삶을 살던 블랙 맘바가 조직을 떠나 한 남자와 만나 새출발을 하려했지만
결혼식날 조직에서 온 킬러들이 자신의 남편과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그녀 자신도 죽을 뻔했다.
죽다 살아난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 한 인물들을 차례대로 찾아가 처치한다.
주인공의 복수의 달성이라는 목표가 이 영화의 유일한 지향점이며,
그 과정에서 영화는 액션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하며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복수의 딜레마나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이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복수 액션 활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중 등장하는 액션 장면은 감독이 좋아하던 아시아 액션 영화에서 대부분 모티프를 따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비평가들이야 무슨 영화들이 차용되었는지 잘 알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아예 모르지만 (대충 이소룡이랑 성룡 영화 오마주는 보였다)
영화의 흐름이 너무나 재밌어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원래 감독은 킬 빌 시리즈를 한 편의 영화로 기획했지만,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 때문에 1/2부로 나누어서 개봉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편의 영화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1부와 2부의 느낌이 매우 다르다.
액션의 종류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B급 액션 영화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다.
1부는 일본 액션 영화에 대한 오마주들이 느껴졌다.
블랙 맘바는 최고의 일본도 명인이자 검객이었으나 현재는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껴 오키나와에서 스시 장사를 하는 핫토리 한조를 찾아가 칼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설정 많이 익숙하다)
한조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자신의 제자였던 빌을 저지하겠다는 블랙 맘바의 요구에 심혈을 기울여 그녀만을 위한 칼을 제작해주었다.
(찾아보니 한조 역을 맡은 배우가 과거 야쿠자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배우라고 한다)
이 칼은, 1부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청엽정에서의 전투씬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블랙 맘바는 청엽정에서 자신의 죽이려 한 인물 중 한 명이자 도쿄 야쿠자계를 평정한 오렌 이시이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크레이지 88'의 88명을 혼자서 처치해 무쌍을 찍는다.
2부는 과거 홍콩 액션 무협 영화의 오마주가 주를 이룬다.
블랙 맘바는 무림의 고수 파이 메이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받는다.
물양동이를 지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주먹으로 나무판을 때린다거나 모두 무림 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던 전형적인 수련법들이다.
이것도 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다만 주인공이 성룡이 아니라 금발의 백인으로 바뀌었을 뿐.
또 2부에서 사용되는 플롯도 과거 무림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것인데,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인물이 사실 자신의 스승까지 죽인 것을 알게 되자 스승의 복수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참고로 파이 메이 역을 맡은 배우 '유가휘'도 홍콩 무술 영화로 명성을 떨친 배우라고 한다.
이쯤되면 그냥 감독이 자기 좋아하던 배우들 만나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액션 영화이니만큼, 이 영화에서는 어딘가 웃기면서도 수려한 액션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앞서 말한 청엽정 전투는 1, 2부 통틀어서도 최고의 액선씬인데,
고고 유바리와의 전투도 액션 합이나 안무가 너무나 잘 만들어져 멋있었지만,
당연 최고는 오렌 이시이와의 전투였다.
눈이 내려서 눈이 소복이 쌓인 일본식 정원 위에서 두 인물이 일본도로 건곤일척을 벌인다.
이런 요소들이 합해져 감독은 매우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액션 장면 못지 않게 영화의 OST를 적절하게 활용한 것도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특히나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하면 바로 생각나는 노래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의 박자에 맞춰
칼을 맞대는 오렌 이시이와 블랙 맘바의 전투 장면은 그중에서도 내 원픽.
영화 OST를 르자(RZA)가 담당한 것도 웃긴 부분이었다.
르자는 힙합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힙합 크루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리더이다.
우탱 클랜의 멤버들은 모두 홍콩 무협 영화의 팬인데(우탱이라는 이름도 무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들의 1집 'Enter the Wu-Tang (36 chambers)'은 90년대 뉴욕 붐뱁 감성을 대표하면서
또 수록곡 곳곳에 무협 영화를 오마주한 부분이 인상적인 앨범이다. 앨범 제목 자체도 '소림 36방'의 영어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인물이 아시아 액션 영화의 오마주로 가득 찬 영화의 OST를 담당했다는 것에서 감독의 진심(?)이 느껴졌다.
음악, 액션 등을 통해 감독은 액션 오락 영화로서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 같다.
복잡한 설정이나, 무거운 주제의식과 복수의 딜레마 같은 것은 없다.
감독은 액션 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할 뿐이다.
따라서 <햄릿>과 달리 복잡하지 않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의 맛은 좀 떨어졌을 것 같다.
간혹 교복을 입고 모닝스타를 들고 싸우는 17세 여고생 고고 유바리처럼
말도 안되는 설정이 등장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설정의 존재가 도리어
이 영화의 픽션성과 오락성을 강화하여 장르적 재미는 도리어 배가 된다.
그래서 유혈이 낭자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기 예사인 잔인함 속에서도
이 영화는 특유의 유쾌함과 리드미컬함을 잃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에는
복수를 달성한 뒤 차를 타고 돌아가는 블랙 맘바의 얼굴이 흑백에 클로즈업된 채 보여준다.
아무 대사 없이 그녀의 얼굴만이 나오는데,
여러번 죽을 위험을 넘기고 목표를 이룬 인물의 표정을 잘 보여준 것 같아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액션, 음악, 코믹 등 오락영화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추었고
거기에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연출까지 가미되었으니,
매우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머리 뜨거운 여름철에, 머리 식힐겸 가볍게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