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회고적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여,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계기요 은총이었음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서이다.

 

<고백록>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었으나(in te) 허영과 정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된 상태(extra te)에서 다시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in te) 구조를 가지고 있다.

 

2614절은 이 책 전체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영혼이 당신을 등질 때에는 외도를 하는 것이고, 당신을 떠나서 순수하고 청정한 것을 찾더라도, 당신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결코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둘 때, <고백록> 11장의 유명한 문장이 더욱 명확하게 이해된다. “당신을 향해서(ad te)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인간의 본래적 삶은 하나님을 향해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인간 실존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부터도 빗겨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소외가 인간 실존이 느끼는 불안감의 근본적 원인이다. 따라서 불안과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인간의 본래적 삶, 즉 하나님을 향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회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위의 내용을 도식화면 다음과 같다.

 

1) 본래 신 안에 있는 존재(in te)

2) 신으로부터 멀어짐.

3) 회심, 그리고 신을 향해

4) 신 안에 있는 존재(in te)

 

셋째 단계를 통해 넷째 단계, 다시 신 안에 있게 된 존재는 자각적 정신의 여부에 따라 차이가 난다. , 본래 신 안에 있는 존재는, 아직 신의 존재도 신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회심을 통해 다시 신앙으로 돌아간 존재는 자기의 의식 속에 신의 존재와 신의 사랑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첫째 ‘in te’에서 둘째 ‘in te’로의 변화는 질적으로 고양된 상태로의 변화이다.

 

10~13권은 신의 사랑을 자각적으로 인식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조적 내면 성찰이 이어지고 있다. <고백록> 서두에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는 13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13.36.51)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지옥 1.1~3)

(출처는 digitaldante.columbia.edu)

 

어두운 숲으로 번역된 말은 ‘selva oscura’이다. 이는 나무가 매우 빽빽하게 있는 숲을 가리킨다. 서구 사상사에서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신의 은총조차 미치지 못한,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를 말한다.

 

단테가 이 단어를 썼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총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절망과 고통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냈어야만 하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심정을 한 단어로 집약하여 총체적으로 보여준 이미지가 바로 어두운 숲’, ‘selva oscura’인 것이다.

 

시속의 어두운 숲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윽고 자신이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눈을 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행성의 빛살에 둘러싸인 언덕의 등성이가 보인다. 빛의 언덕은 당연히 어두운 숲과 대비된다. 그런 점에서 빛의 언덕어두운 숲의 절망과 대비되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이미지는 이후 그의 저승 여행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지옥> 1~3행의 상황은 본래 신 안에 있었다가 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테의 저승 여행 과정은 회심을 통한 질적인 고양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 단테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가 되고, 그의 여행도 끝이 난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천국, 33.142~145)

“A l’alta fantasia qui mancò possa;

ma già volgeva il mio disio e ’l velle,

sì come rota ch’igualmente è mossa,

l’amor che move il sole e l’altre stelle.”

 

 

- 르네 데카르트 <성찰>

데카르트가 살던 17세기는 일반위기의 시대라고 불린다. 기상이변,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사이의 대규모 살육전 등 복잡하고 혼돈한 시대상황이 그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의 한 단락을 인용해보겠다. “오늘날에는 1605~1650년의 기간이 안락한 번영의 세월이기는커녕 유럽사에서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 심지어는 광란으로 점철되었던 시기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과학과 근대철학을 여유와 풍요의 산물로 간주하는 기존의 견해를 따르기보다는 거꾸로 그것들을 동시대의 위기에 대한 반응들로서 취급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이러한 일반위기의 시대에 사상가들은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도 확실성의 추구라는 시대적 경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혼란한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이며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성찰>6개의 성찰로 구성되어 있다. 1성찰에서 그는 감각과 감각의식 등 기존의 의견에서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모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악마의 가설까지 주장하여 모든 반박의 여지를 차단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회의를 끝마친 뒤에 불안해한다. 그 어떤 참된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자신이 난국의 암흑 속에서 지내는 것은 아닐까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심 속에서 의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설령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있어도, ‘속는 나가 존재해야 속임수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로부터 데카르트 인간론의 제1테제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즉 정신(mens), 영혼(anima), 지성(intellectus) 혹은 이성(ratio)”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사유하는 나를 자각하는 나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회의는 종결되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발견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내가 정신의 눈을 나 자신으로 향하면, 나는 불완전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내가 의존하는 있는 것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관념은 더 상위의 관념에서 유래하는바, ‘의 관념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에게서는 유래할 수 없다. ‘의 관념의 원인은 신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이 완전하고 선한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이 실존함을 증거한다. 신의 관념 속에 완전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악령의 속임수는 불가능하다. 사기와 기만은 결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유한함을 철저히 자각한 바로 그때 신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이 신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하다.

 

그뿐만 아니다. 그 체계적 완성도가 <고백록>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는 하지만, <성찰>의 구조 자체도 <고백록>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처음에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에 대해 그 어떤 확실한 것을 찾지 못해 난국의 어둠속에 있었다. 대상 세계는 의심스러운 것이기에 그는 대상 세계를 보장해주는 기제로서의 신에게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신에 도달함으로써 대상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감은 없다.

 

3성찰을 마무리하면서 외부 세계를 보장해주는 신을 발견한 그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봐보자. “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이 완전한 신을 명상하고 그의 속성을 음미하며, 황홀감에 눈을 먼 정신이 그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비할 수 없는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장엄한 신의 명상 속에 내세의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이 있음을 우리가 신앙을 통해 믿듯이, 이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성찰을 통해 현세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사라지고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이 남았다. 의 이미지 자체도 다분히 아우구스티누스적이다.

 

<고백록> 8권 회심의 장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버렸습니다.”


 

 

-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을 자기 회피, 소외, 그리고 타락함으로 규정한다. 그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봐보자.

 

현존재는 원초적인 현사실적 삶의 경향, 즉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경향과, 세상에 동화되면서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경향으로 인해 끊임없이 좌절을 경험한다. 하이데거는 현사실적 삶이 세계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자신에게서 낯설게 되는 한 퇴락에의 경향은 [자기 자신에게서] 낯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 실존의 불안과 소외는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의 형이상학과 데카르트의 유산인 근대 인식론에 대한 거부와 비판에서도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은 세계--존재인 인간을 앞서 규정함으로써, ‘실존혹은 현사실적 삶의 영역에서 고유한 원초적 경험이 갖는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 영역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우리의 가장 고유한’, 즉 우리의 가장 본래적인 혹은 본연의 영역을 의미한다.”

 

세상과 동화되어 자신의 본래적 영역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인간 실존의 소외는, 따라서 다시 원초적 현사실적 삶의 경향을 회복해야 한다. 그가 현상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현상학만이 경험의 바탕을 근원적 직접성 속에서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원적 본래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소외되고 불안해하는 인간이 다시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가 이를 극복한다는 하이데거의 사유 구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해 보인다. 물론 하이데거는 기독교의 종교적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기독교 사상의 현상학적 측면과 의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20대 중반의 하이데거는 가톨릭과 결별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르케고르 등의 개신교 문헌을 탐독했다. 하이데거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련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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