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에 구입한 책 목록이다. 원래는 왼쪽의 책부터 읽어 나가다가 서너번째 책부터는 읽을 수 있을 때, 나중에 읽자.. 뭐, 이런 심산이었다. 허나 박스에서 책을 한 권씩 한 권씩 꺼내들고 디자인과 색감, 표지의 질감과 페이지 모서리의 감촉, 속지의 색감 같은 것들.. 시각과 촉각, 그리고 후각을 총 동원해서 첫 느낌을 만끽한 후, 원래의 계획은 다 삭제하고 새로운 순서를 정하게 되었다. 책의 상품성,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단지 내용으로만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아마 지금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한다지.
결국, 순서는 이렇다.
안그라픽스에서 나온 창조성을 지켜라 > 여행의 공감 ≥ 들뢰즈 개념어 사전 > 나머지들..
역시 안그라픽스의 책들은 표지 디자인과 책의 만듦새에 있어서 만큼은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다. 심플한 타이포그래피, 매력적인 짙은 파랑색의 표지와 녹색인 띠지와의 조화, 탄력있는 표지의 질감, 깔끔한 모서리 처리, 시원스레 활짝 잘 펼쳐지는 제본. 만졌을 때의 만족감이 워낙 다른 책들과 달라서, 나는 결국 이 책을 제일 먼저 읽었다.(내용과는 별개다.)
북노마드의 <여행의 공감>도 잘 나왔다. <창조성을 지켜라>가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을 위한 자기계발서라는 내용에 걸맞게 세련되고 지적이며 전문가적인 페르소나를 보여준다면, <여행의 공감>은 그보다 아마추어적인 신선함, 편해보이는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여행의 공감>의 책 두께도 그런 표지의 이미지와 잘 매칭되어 있다. 속지에 인쇄된 호텔방을 그린 손그림의 색감도 아주 자연스러워 만족감이 높다.
갈무리에서 나온 <들뢰즈 개념어 사전>은 비싼 인문학책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페르소나를 잘 갖추고 있어서 보통의 점수를 주려고 했으나, 책의 내용을 보고는 더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앞 부분만 조금 읽자라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150페이지 정도 진도가 나갔다. 물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은 건 아니고, 앞부분을 읽으니 계속 읽고 싶어져서 토요일 오후 시간을 이 책과 보냈다. 마침 푸코의 <말과 사물>도 한 150페이지를 읽어둔 터라 두 권의 독서 마무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푸코의 책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고 있는데(이해와는 별개로), 들뢰즈 개념어 사전은 '정의' 부분이 난해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허나 '연대기'와 '비평' 부분을 읽으면 어느 정도 더 감을 잡을 수 있었고, 가장 눈에 띄게 좋은 점은 각각의 개념어를 읽을때마다 앞에 나온, 뒤에 나올 개념어들이 계속 연관되어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예습과 복습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에 비해 가장 실망한 책이 다산책방에서 나온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내용은 아직 한 줄도 안 읽었다. 내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디자인과 만듦새에 대한 실망이다. 하드 카버와 겉 표지는 겉돌아 싼 티 나고, 표지에 흐릿한 사진을 사용한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그럼에도 조잡스러움은 어쩔수 없고, 띠지는 촌스러우며, 특히 속지의 질감과 페이지 당 두께가 '지적인' 줄리언 반스의 페르소나와 너무 동떨어진 기분이다. 좀 더 얇은 종이였다면... 근래에 읽었던 문학동네의 <호프만의 허기>와 문학과지성사의 <로마의 테라스>에서 사용한 종이들이었다면 그나마 좋았을텐데, 이 종이의 질감은 반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는 오자마자 읽을려고 했지만.. 지금 당장은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드네.. 차라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가로:세로 비율만이라도 좀 배울 것이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이 퉁퉁해 보이는 가로:세로 비율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줄리언 반스의 새 소설을 많이 기다렸기에 실망은 더욱 크다.
결론.
e-book이 대세가 되기 전에는, 아니 대세가 된다면 더욱 더..
출판사 관계자분들이여, 제발 (종이)책의 디자인과 만듦새에 신경 좀 더 써 주시라.
문질빈빈. 이 말, 상품으로서는 기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