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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차가운희망보다뜨거운욕망이고싶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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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책은 어떤 사실을 말하거나 설득하기보다는 보여준다. 그렇기 떄문에 이 책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설명하기보다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느낀 것에 대한 내 나름의 느낌을 적었다.

장애인과 정상인,

 이 두 단어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정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공산주의라고 민주주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왕정에서 자본주의 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것처럼, 하지만 쉽게 (특히 감정적으로)혼동하는 단어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장애인의 반대되는 개념의 '정상인'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지만, 사실은 둘은 다른 단어일 뿐이다. 이 책은 '정상인인 장애인'이 쓴 글이다. 정상인의 사회와 장애인의 사회 양쪽에 속하고, 양쪽 모두에서 활동하는 그가 본 장애인의 사회,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장애의 이야기가 주가되기 때문에 많은 비장애인은 TV에서 장애인 후원 프로에서 보는것과 같은 장애로 인한 고생 이야기, 또는 장애를 극복한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이야기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야 또다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구도에 갇힐 뿐, 그것이 어떠한 변화를 낳지도 못할 것이다. 같은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틀림'과 '다름'의 구도로 가져가는것도 그다지 옳은 일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화 하나가 아니라는 의식이 짙어지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장애인도 우리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고 무엇보다 같은 '사람'이라는 '같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왜 저자는 '뜨거운 욕망'을 이야기 했는가에 대한 내 나름의 결론이다.


장애인의 인권
 저자는 장애인이 나와서 시위를 했을때, '사람들은 장애인들도 살기 좋아졌다. 나와서 데모도 하고'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연한 소리이긴 하다. 하지만, 생존하기 편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은것이 문제이다. 다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분명 전보다는 살지 좋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모자란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사회의 참여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렇기 떄문에 끊임 없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통으로 가지게 되는 권리인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이기 때문에 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투표하고, 취업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이지만, 이런 일을 외면하고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하는것은 기본적으로 다른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속한 사회에는 없다고 믿고 싶은 거북한 마음이 그들을 다른 사회로 몰아 넣고, 그들의 인권을 외면하게 만든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장애인에 대한 동정
 대부분의 경우, 동정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동정은 기본적으로 대상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떄문에 장애인들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것은 그들을 멸시하는것보다 조금 나은 행동일 뿐이다. 저자도 장애인으로서 어렸을때 '쿨한척' 자신을 꾸며왔던 이유가 그것 이었고, '꽃동네가서 봉사한번 하면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안든다'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가 그런것 아닌가.

  난 동정이 싫다. 동정 받는것도 싫지만, 그 못지않게 동정 하는것도 싫어한다. 하지만 그 동정이나마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줄 정도로 부지런하거나 유능하지 못하다. 그래서 난 그저 외면 할 뿐이었다. 나를 지목해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그것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고 다른사람의 문제였다. 장애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이 바라보기만 하면서, 내가 이 책, 장애인의 사회, 그리고 저자를 평가 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인권에 관련된 무엇인가를 실천할 자신은 없다. 다만 지금은 우리와 같지만 '다른존재'로 인식되는 그들에게 약간의 관심을 더 주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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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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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악에 대한하기위한 악: 폭력 -

 영화 <엑소시스트>에 보면, 첫 부분에서 신부가 악마를 상징하는 조각을 보며 "Evil against Evil..."이라고 말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보는 폭력의 시각이 대체로 비슷하다. 이 책의 서문격인 1장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Liviathan을 인용하면서, 개인적 폭력이 난무하던 그 시절부터 합의를 통해 질서를 만들고 다시 무너뜨리는 과정을 그대로 설명한다. 무차별적 폭력을 피하기위해 무질서에서 질서를 합의해 냈지만, 오히려 이제는 질서가 폭력을 행사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폭력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 폭력에 대한 성찰: 그 시발점들 -

 이 책은 전체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입부인 1장 질서와 폭력, 맺음말인 12장 문화와 폭력을 제외하고는 폭력의 속성 또는 발현에 대하여 하나씩 고찰을 한다. 이 10개의 장은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흐름에 따라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장은 서로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키는 것부터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이 책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 읽은 뒤에 다시 한번 차례를 보시라.

 각각이 주장을 담아내기보다는 기존의 사실, 장면을 보여주는데 더 집중하고 있으며, 각 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장면들은 가장 그 주제를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예제들로 이루어져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다만 조금 잔인하게 느껴질수 있다), 어떤 주장을 하기보다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로부터 사실을 전달하는 이 서술 방식은 그 자체로서 어떤 설득을 하기보다는 그 장면으로 부터 폭력의 속성을, 그리고 그 발현을 새삼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서술은 폭력에 대한 생각을 할 기초를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 말할수 없는것에 대한 침묵 -

 1장에서 서술한 폭력의 진행 순서에 따라 10개의 장을 배열하고, 각각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지만, 그 서술은 폭력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폭력의 희생자를 서술한 4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폭력의 행위자인 가해자를 중심으로 이야기 되고 있으며, 따라서 폭력에 따라붙는 두 가지 속성 중 가해자의 도취에 비하여 피해자의 고통에는 상대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있다. 사디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면서도 그에 상대되는 개념인 마조히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고, 피해자의 굴종과 무력함 보다는 가해자의 안도와 쾌락에 더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런 침묵은 정당하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폭력은 앞에서 말한것처럼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에서 '복종과 질서'를 지나 다시 무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만을 이야기 하고 있기 떄문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폭력에 대한 고찰은 문화와 체계를 넘어 너무나도 거대해져 하나의 흐름으로 담아둘 수 없을것이며, 각각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담아두던 이 책의 서술은 개별에 묻혀 소실될 것이다.

 
- 순환의 완성, 비대칭적 결론 -

 11장에서 사물에 대한 파괴까지 서술이 끝나는 순간, 혁명은 완성되었고, 새로운 질서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움직임은 1장에서 말했던 움직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앞서는 인용을 통하여 거시적인 흐름에 따랐지만, 이번에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앞의 본론들에서 서술했던 흐름과 맞물려 개별적인 가해자에게 돌아갈 비난의 화살들을 문화로 돌리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비대칭적 이야기를 위해 홉스로 시작하여 프로이트로 결말을 내고 있다. 자신의 의견을 명시적으로 개진하지 않고, 그 둘의 인용으로 양 끝을 장식한다는 것은 어쩌면 독자 스스로에게 판단을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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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개인적으로는 원제를 직역한 "폭력에 관한 논고" 가 더 어울린다 싶지만 좀 딱딱한 감이 있다. 약간 도발적이기도 한 역서의 제목도 나쁘진 않다.

덧2. 4장에 설명되는 그림 '십자가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보고 싶거든 아래 url의 <Francis Bacon, "Three Sudies for a Crucifixion" (1962)>을 참조하시라.
[from: http://www.askyfilledwithshootingstars.com/wordpress/?p=971 ]

덧3. 역자는 좌와 우를 넘어서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는 사상가 라고 이야기 한다. 이것이 책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찾아보는것도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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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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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몇년만에 읽은 국내 소설이자 몇달만에 읽은 서문 없는 책이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 서술자가 '나'가 아니라 '너'임에 약간 당황한다. 하지만 서술자가 '너'라고 해서 딱히 달라질건 없는것이, 시점이 넘어가고, 장남이 서술대상이 되고, 다시 시점이 넘어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비로소 마지막 장에서야 등장하게 되고, 비로소 '나'는 잃어버린 어머니임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실종은 돌발적이고 의도치 않게 일어났다. 그리고 가족들이 자신의 질못을 조금씩 뉘우치지만, 되려 그것이 어머니를 돌아올 수 없게 만든다. 목격자들의 공통된 발언인 파란 슬리퍼는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신발은 어머니를 잃어벌리 당시에 신던 신발이 아닌, 30년 전에 당신의 아들을 위해 서둘러 상경한 길에서 신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파란 슬리퍼를 신은 어머니를 찾아 다니는 것은 사라진 어머니를 쫓아 다니는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거, 추억속의 어머니를 찾아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다니는 과정도 자신들이 서울에서 살면서 옮겨 다니던 그 순서를 답습하고 있다. 2장이 마무리 될때 쯤이면 어머니는 돌아올 수 없으며, 돌아와서도 안되게 되었다. 애초에 그들이 쫓던것이 추억속의 환상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찾을수도 없지만, 설령 찾는다고 해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어머니를 속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의 두 장에서는 장남과 장녀의 후회와 죄책감, 추억속에서 자신들에세 헌신적이었던 '어머니' 뿐이었다. 비로소 3장에 들어가서야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드러난다. 무관심 했던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외면했던 아버지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나타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고통을 항상 감내하고, 순응적이며, 남을위해 베푸는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더 고통스러워 하는지도 모른다.

 네 번째 장에서, 조금씩 자유를 얻는 것을 볼 수 있다. 막내와 '그사람'과의 작별에서 어머니의 인생은 비로소 긍정된다. 앞의 이야기에서 끎임없이 고통받고 외면당했던 어머니는 막내의 '엄마는 그럴 자격있어'라는 말에 사라지고, 고생스러웠지만 그래도 평안하게 쉴곳이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려진다. 격한 두통속에 조금씩 비어가는 자신을 느끼고 물품들을 정리하는 모습은 차분히 세상과의 연을 정리해 왔음을 보여주고, 찾아간 사람들, 그리고 집에 인사를 하는 모습은 지금껏 떠돌아다닌것이 한이 남아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있었던 남은 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음을 보여준다.

 에필로그, 그 마지막에서 엄마를 부탁한다는 말은, 엄마를 찾고싶다는것도, 엄마가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체념도 아닌, 자신이 속박하고 있던 엄마를 놓아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막내딸의 태도는 가장 좋은 답안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받으나 거기에 속박되지 않게 하고, 아끼지만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들 중 마지막으로 보고 가지 않았을까. 

 

- 2009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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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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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했던, 사소한 오해들..

 이 책의 고도가 흔히 오해하기 쉬운 孤島가 아니라 Godot인건 작품의 원제(En attendant Godot)를 보고 알았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두 가지 오해를 한 게 있었다.

 첫째로는 저자가 영국인이라서 당연히 영어로 썼을거라고 생각하고, 영국책 분류에 꽃아두었다는 것인데, 원래 작가가 프랑스어로 쓴 후, 그것을 다시 자신이 영어본으로 냈다고 한다. 조금 검색해봤더니 미묘하게 다른것 같기도 하다.(영 문판 - 불어판 - 한역: 참조)
 다른 하나로는 등장인물 에스트라공(ESTRAGON) 이름의 공이 公일 것이로 생각하고 귀족일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다. 물론, 작품 설정상 부랑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말이 안된다..-_-;

고고와 디디 - 그저 무기력할뿐...

 서두는 이쯤에서 접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1막에 하루씩 2일동안의 짧은 일상이 나온다. 주인공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두 명이 어느 길 위에서 '고도(Godot)'를 기다린다. 작품에서 제시된 공간적 애매성과 불분명성, 하루를 간격으로 두지만 하루로 두기에는 차이가 나는 그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대화의 비논리성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성은 기존의 연출에서도 충분히 많이 얘기가 된 것이고, 읽고나서 하루가 넘게 지난 지금에와서 이 글을 쓰기 직전에야 찾아본 내용들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참조논문[각주:1]] 내가 이 책을 읽는동안  배경보다 더윽 관심이 갔던 부분은 고고와 디디의 성향 차이이다. 디디는 이성적이고, 목적이 있고, 정적이다. 반면에 고고는 단순하고, 순간순간의 감정에따라 떠다닐뿐이다. 이러한 디디와 고고의 성향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또는 나무-밝음-고난 과 돌-음지-안식 으로서 해석한 위의 참조 논문은 지극히 니체적인 해석이지만, 두 인물의 차이를 가장 적절하고 대조적으로 나타내준다.

 하지만 두 인물의 대조적 성향을 떠나서 공통적인 것은 그저 무기력하게 기다린다는 것이다.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라면서, 심지어 죽음마저 내일의 일로 미루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 내일을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인다. 괴테는 "언제나 노력하며 스스로 애쓰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고 천사들을 통하여 말하며, 악마와 계약까지 해 가며 세상에 뛰어들어 진리를 찾으려는 파우스트 박사를 보여주는 것을 생각하면 정 반대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고도가 누군지 알았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했던것 처럼, 고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 일수도 있고, 어쩌면 그들의 무력한 기다림을 끝나게 해 줄 심판자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무기력한 기다림이고, 어제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처음 봤다고 말하는 어린 시종의, 기다림의 무한 반복을 암시하는 메시지이다. 어쩌면, 설령 고도가 온다고 해도 그들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을것인가에 대한 생각마저 든다.

또다른 작은 이야기 - 포조와 럭키

 다만, 어딘지 부족함이 남는것은 포조와 럭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고고와 디디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을법도 한데 그들의 이야기는 뭔가 애매한 느낌이다. 그저 떠오른 생각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비아냥, 또는 무기력함에 반대해 보아야 얻는 허무함일지도 모르겠다.  이것 은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알수 있기를... 근데 모자를 쓰고 생각하는 럭키의 모습은 미 궁(황병기)를 연상하게 하는것이 조금 재밌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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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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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평:
개종을 위한 사명(Mission to Convert)


만들어진 신: 대체로 무해함(The God Delusion: Mostly Harmless)
 내가 이 책을 본 총 편을 하자면, 그가 좋아하는 더글라스 애덤스의 말을 빌려 "대체로 무해함"이라고 붙여주고 싶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참조). 어떤 분은 노벨 문학상이라도 노리는거냐고 말했는데 상당한 공감이 간다. 이 책은 스스로의 흐름이 산만하고(하나의 책으로 보기보다는 짧은 글들의 모음집 정도로 보인다. 웹 연재에 어룰릴정도의 호흡인듯..), 깊이 있는 지식이나 고찰을 전달하기 보다는 잡다한 열거를 통해서 논거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호소하는 대상은 읽는 사람의 지성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지적 허영심이라는 감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도킨스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신따위 믿을게 못되.."라는 내용이 아니라 "글쎄, 진화론 말 된다니까? 니들이 멍청해서 이해를 못하고 창조론 따위나 믿는거야!"는 말로서, 창조론에 대한 반발이 종교에 대한 공격으로 과도하게 표현 된 것이다.

 '과학 만능주의에 기반한 쾌락주의'로 '개종'을 요구하는 전도서로 정의할 수 있는 이 책은 크게 둘러 나누었을 때, 전반부는 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논의이고, 후반부는 종교의 해악이라고 볼 수 있을듯 하다.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보니, 전반부는 상당히 억지스런 논증이 많고, 후반부는 과도하게 공격적인 이야기가 많다. 도킨스 스스로가 지나치게 확신에 차서 쓴 탓인지, 자기 모순적이거나 불충분한 근거에 의한 전개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물론, 종교라는 떡밥을 가지고 싸우면 항상 그런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간다.)

  전반부의 신에 관해 논증하는 부분에서는 "전지전능하고, 우주를 초월한 인격신"이라는게 모순적임을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논증이 인간을 초월한 영적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등의 일신교가 본질적으로 샤머니즘(우리나라로 치면, 무당불러 굿하고 점보는 것) 에 비하여 개연성이 더 있는게 아니라는 정도로만 생각해야 한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방향에서 신이 과학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이고, 신을 믿는것이 무의미함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상당부분 자기 모순적이거나, 논증이 아닌 유머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일반 반(反:anti)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을 비아냥 대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나도 한때 그렇게 많이 찌질대 봤다. 빠순이와 광신도는 싸우고 싶은때 시비걸기 딱 좋은 존재들이라..-_-).  이정도의 논증은 모 사이트 같은 찌질이 집합소에 가도 볼 수 있는 수준으로서, 그냥 가볍게 보면 되겠다.

 후반부의 종교의 해악의 관해서 말하는 부분은 공격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잡음이 있는 소위 '개독'과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인데, 실제 대부분의 (기독교) 신도는 '이단' 이라거나 '소수 집단'이라는 말로 논쟁을 회피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의 공격적 태도는 상당히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데, 집단 내에서는 신념과 사상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회에 해악을 가져오는 경우는 상당히 많은데, 이러한 문제점을 내부에서 바로잡는 자정작용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정작용을 잃은 집단은 외부에서 정화를 시켜 주어야 집단의 건전성을 유지 할 수 있을텐데, 후반부의 공격은 이러한 정화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런 내용 역시 DC나 다음 아고라 같은데 가면 흔한 내용이다. 다만 글쓴이 이름값이 있으니 만큼 좀 더 효과는 크지 않을까 바랄 뿐이다..... ( '')

도킨스는 이제 Doctor나 Professor보다 Pope로 불려야 더 맞을거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책 내지 말고, 눈먼시계공정도의 적당한 교양서적이나 써 주시는게 좋을듯 싶은데.. 이제 한술 더꺼서 '지상 최대의 쇼'같은 책이나 내고 계시다.. 이제는 종교계로 가신건가.. 

- 2009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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