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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롤, 액션!
연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1월
평점 :
시람은 언젠가 죽는 다는 걸 누구나 알면서도, 그 죽음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지금을 힘껏 살듯이, 보리는 <미미분식>으로 돌아가 오늘의 식사를 하고, 시간 여행자들과 오늘에 대해 떠들자고 생각했다.p157
“그러니까 너도 지금을 카운트다운이라기보다는, 신나는 러닝타임으로 살면 어때?”p164
"그렇잖아. 삼십 분을 서서 골랐는데 하필 맛없는 과일만 걸릴 때도 있고 그냥 아무거나 집어 왔는데 맛있을 때도 있잖아. 아니야? 면접 수두룩하게 떨어지다가도 기대도 안 한 데 붙기도 하고. 길 가다 생판 모르는 남이 목숨 구해주기도 하고. 당장 죽고 싶다가도 왜 그랬나 싶을 때도 있고. 천하의 쫄보였다가 갑자기 겁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개연성 따위 없는 게 인생 아니냐고!"p170
내가 나로 존재하는 당연한 일을 왜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하지? 보통이 대체 뭔데? 대체 뭔데요, 그 보통이라는 게?p171
살다보면 뜻밖의 손님은 언제든 찾아온다고 했다. 그 손님은 사람이기도 하고 사고이기도 하고 행운이기도 하고 뭐든 될 수 있다고. 하여튼 언제나 닥쳐온다고. 그럴땐 손님이 왜 오느냐 따지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맞이하면 될까를 생각하는 게 낫다면서. 왜 보다는 이제부터 어떻게.p177
삶은 주기적으로 기울고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달과는 다르다.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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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보리는 영화를 위해 퇴직금과 펀딩으로 제작비를 겨우 마련하지만, 친구가 그 돈을 가지고 잠적해 버리고 만다. 그 후 보리는 세트장으로 사용할, 곧 재개발에 들어갈 미미분식에 머물며 친구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미미분식 주인의 손녀라며 할머니의 기일을 기리기 위해 방문했다는 삼수생 율과 얼떨결에 같이 지내게 되고, 율과 함께 지내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촌스러운 양복 차림의 남성 상은이 나타난다. 그는 1998년에서 왔고, IMF 전까지 호텔 레스토랑의 요리사였다 말하지만, 보리는 헛소리라 치부한다. 상은은 자신이 식사 한끼를 대접하겠다며 토마토 스프를 만들고, 보리와 율은 그의 요리솜씨에 반해 같이 지내자 권한다.
매일 상은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소소하게 일상을 나누던 어느 날, 성별을 알 수 없는 외모에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의상을 한 쿠리가 미미분식에 나타난다.
냉장고 옆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들은 모두 몸 어딘가에 공통적으로 숫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하루가 지날때마다 차감되는 숫자를 보며 그것이 미미분식에서의 남은 시간임을 직감한다.
연여름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는데, 술술 읽히는 문체와 독특하고 재미있는 소재덕에 앉은 자리에서 휘리릭 금방 다 읽어 버렸다.
저마다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모두 과거와 미래,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미미분식으로 오고, 그 곳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함께 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때로는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상은이 만드는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위안을 받고, 서로를 보듬으며 치유해 나간다.
약속된 시간이 모두 지나고 하나 둘 깊이 있는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아쉽게 떠나 버리고, 보리는 그들의 빈 자리를 보며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언제나 매력적인 소재인 타임리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3명과의 동거, 맛있는 음식들의 향연, 꿈과 현실의 간극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재미와 따뜻한 위로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