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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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읽은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의 <사소한 일>이 떠올랐다. 1948년, 이스라엘 점령군의 무자비함 속에 짓밟힌 베두인 소녀의 운명과 수십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과거를 마주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여성의 시선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들에게 그해는 나라를 빼앗기고 총칼 앞에 강제로 추방당해야 했던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같은 역사의 다른 자리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펼쳤다. 유럽 곳곳의 오랜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떠나온 이민자와 난민들로 가득했던 예루살렘. 그해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며 환호한다. 하지만 또다시 갈 곳 없는 난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은 나라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고, 다른 한쪽은 오랜 박해의 기억 속에서 또다시 갈 곳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대립 속에서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이야기를 써냈는지보다, 결국 어느 쪽이든 비극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 무고한 시민들의 처연한 삶이 먼저 눈에 밟혀서인지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한 자전적 소설 속에서, 어린 ‘오즈’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자신이 자란 예루살렘의 케렘 아브라함 마을을 ‘체호프의 소유지’라고 말한다. 마을로 이주해 온 유대인 중 상당수가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도망쳐 온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몸은 중동 땅에 있지만, 여전히 유럽의 문화와 러시아 문학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향수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 갇혀 있던 사람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의 공기,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시들어가던 어머니까지. 그래서일까. 오즈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웃 도시 ‘텔아비브’의 생기와 밝음을 갈망한다.

내 삶도 새로운 노래, 태양이 작열하는 날의 시원한 물 한 잔처럼 맑고 정직하고 순전한 삶이 될 것이다. (p. 16)

유월절에 처음 가본 텔아비브는 경악할 만큼 놀라운 곳이었다. 늘 집 창문 너머로 먼지 쌓인 나무나 꽉 막힌 벽만 보며 자란 꼬마에게, 거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한창 온몸으로 부딪치고 뛰어놀고 싶을 나이인데, 오즈는 그 자유를 오직 상상으로만 채운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아니 어쩌면 참 다행히도 이 덧없어 보이는 상상이 생기 없는 우울함 속에서 오즈를 숨 쉬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지독한 결핍으로 눅눅해진 집구석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을 꿈꾸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빛나고 자유로웠을 테니까.

처음엔 역사적 수난을 앞세운 서사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 오즈가 자란 예루살렘은 외부의 전쟁만큼이나 내부의 사상적 충돌과 갈등 역시 치열하게 부딪히던 곳이었고,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의 상처보다 오즈를 더 짓눌렀던 건, 어른들의 거대하고 갑갑한 이념의 세계였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당장 땅과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집안의 시온주의자 어른들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내고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신의 뜻보다 앞서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던 메아 셰아림의 정통파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컸다. 이 모든 상황을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그저 무겁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이 그저 목을 죄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대 학계의 거물이자 강한 민족주의적 신념을 지닌 큰할아버지로부터 유대인들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단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오즈에게 갑갑한 이념의 세계와는 다른 경이의 세계였다. 부르는 이름 없이 겉돌던 일상에 ‘셔츠’나 ‘양말’ 같은 살아있는 이름을 붙여, 진짜 현실을 선물해 주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오즈는 그 속에서 언어의 힘을 얻었다.

큰할아버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자신들을 밀어내고 박해했던 유럽의 역사와 정치를 뼈저리게 증오하면서도 도스토옙스키와 체호프의 세계를 사랑하고, 괴테와 실러의 시를 읊조렸다. 히브리 문학의 부활부터 사회주의와 토지 균등 분배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거창한 사상적 논쟁을 서재에서 고상하게 벌이면서도, 정작 그들이 ‘조상의 땅’이라 주장했던 곳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농사를 짓거나, 가난한 아랍인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현실은 경멸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오즈는 이런 어른들의 위선과 모순을 빼놓지 않고 끄집어내는데, “모든 적들을 다 물리쳐야만 해. 우리가 흠씬 두들겨 패면 그들은 우리에게 평화를 구걸하게 될 거다 (p. 206)”라며 강한 힘과 민족을 앞세웠던 큰할아버지의 세계관과, “이론에 따라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이야! (p. 310)”라며 인간과 정의를 먼저 생각했던 외할아버지의 세계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라진 부모의 성향까지 모두 어린 오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였을 것이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아버지 덕분에 늘 책과 가까이 지냈던 오즈에게, 인생 최고의 날은 아버지가 책장 한 칸을 비워 자신만의 책을 꽂도록 허락해 준 날이었다. 이 작은 도서관이야말로 내 편과 네 편, 허락된 행동과 금지된 행동 등으로 모든 게 명확하게 갈라져 있었던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자, 수많은 다른 길을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온전한 세계였다. 책을 펼치고, 상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동안, 마음속 상처와 흉터를 꼭꼭 숨기거나 억지로 씻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조각조각의 일화만으로 오즈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언제 숨통이 트였고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작가가 아닌, ‘한 권의 책’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말이다.

나는 사람들은 왔다가 가고 태어나고 죽지만, 책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내 야심은 자라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니라 책 말이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죽을 수 있다. 작가들은 어떤 인물이든 쉽게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계획적으로 파괴하려 들어도 늘 하나의 복사본이 살아남고, 레이캬비크나 바야돌리드 혹은 밴쿠버의 어딘가 인적 드문 도서관 한구석 선반에서의 삶을 계속 즐길 기회를 얻는다. (p. 46)

이 책 안에 담긴 복잡한 역사와 줄거리를 다 떠나서, 무언가 한쪽에 너무 치우치면 반드시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줄거리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과거에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계속 읽어 나가게 하는지 다시 한번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 이어졌고, 어떤 글은 그 문장 속에 그대로 파묻히고 싶기까지 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거라 예상한 감정이 전혀 아니다. ‘지나친 이입이었을까’라는 소심한 염려 섞인 마음조차 이내 안도로 바뀌며, 안개 같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거나 어둠 속에 묻어 둔 이야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꺼내놓는 오즈의 기억을 더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좁은 책장 한 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얼마나 멀고 험난한 세월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아프고 따뜻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노년의 오즈 곁에 아무도 모르는 존재인 나는 그저 가만히 나란히 서본다.

그대여, 묻지 말라. 이것들이 사실이오? 이게 저 작가에게 일어난 일이오? 스스로 질문하라. 자신에 관해 물으라. 그러면 그 답을 당신에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니.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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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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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올해 상반기 읽은 책들 가운데 오래 기억에 남을 책이다. 줄거리에 끌려 집어 들었을 뿐인데, 내가 왜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펼쳤는지, 그리고 왜 계속 책을 읽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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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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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퐁스가 신이 나서 걸어오고 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도록 만족스러운 예술품을 손에 쥔 것이다. 대중극장의 지휘자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실뱅 퐁스. 이제는 노파들이 젊은 시절 유행하던 옷으로나 기억할 법한 스펜서를 입고 다니는 노총각인 그는 입고 먹는 데 들어갈 돈까지 아껴 예술품을 사들인다. 그렇다고 굶고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퐁스 선생에겐 다 계획이 있다. 바로 자기를 불러주는 파리 사교계와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숟가락만 얹는 것! 눈칫밥이 대수랴, 한 움큼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작품도 손에 넣고 미식을 즐길 수 있다는데! 아니, 그런데 발자크 너무하다. 곧 퐁스에 대한 얼평이 시작되는데 좋은 게 하나도 없다. 듣기만 해도 울적해지는 눈, 코, 입, 눈썹, 얼굴형 묘사에 이어 여성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는 말 안 해도 알 법한 상태(?)를 굳이 또 언급하며 소개에 정점을 찍는다. 그래도 삶의 즐거움을 찾고, 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내뿜는 열정 때문인지 시작부터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한때 전도유망했던 퐁스가 이제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싼값에 음악을 넘기는, “낡아빠진 8분 음표 (p. 15)” 같은 무명의 삶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위안이 돼줄 만한 게 있다면 그의 집에 빼곡히 차 있는 예술품들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에게 상속받은 재산마저 오직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고스란히 바친 퐁스가 무모해 보이기도 하면서 고독한 예술가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예술품 못지않게 퐁스가 사랑한 건 음식, 한마디로 그는 식도락가였다. 왕실의 화려함이 남아 있던 제정기 시절엔 손님 대접도 후했기에 퐁스는 젊고 잘나가던 예술가로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파리 사교계의 풍성한 식탁에 당당히 초대받았다. 퐁스 역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작곡한 연가를 들려주거나, 소소한 잔심부름을 해주는 것으로 서로 기분 좋게 밥값을 톡톡히 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시들해지자, 사람들의 인심 역시 야박해졌다. 점점 퐁스를 부르는 초대장은 뜸해졌고, 한때 품격을 위해 모셔가던 예술가를 이제는 그저 공짜 밥이나 바라는 처량한 식객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제는 맛있는 냄새를 쫓아 경쾌하게 달리던 두 다리 대신, 야윈 손으로 낡은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고독하고 처량한 노년의 길을 퐁스는 혼자 걷지 않는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영혼의 단짝, 독일인 음악가 슈뮈크가 있기 때문이다.

두 친구 중에 한 명이 다른 한 명보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을 때만큼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은 없다. (p. 28)

발자크는 우정을 완전한 평등의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보다 현실을 본 걸까. 그렇다고 퐁스와 슈뮈크의 우정이 불편하게 그려지는 건 아니다. 서로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상대에게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저 녀석 내가 잘 품어줘야지’와도 같은 나쁜 의도가 없는 보호 본능과 염려에서 나오는 배려가 애틋했고, 참 섬세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충분히 공감했다. 이런 모습은 사실 우리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부모 자식 간에 ‘필수적인 존재’에서도 그렇듯이, 누군가를 온전히 품어줄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사물이든 사람이든)이 곁에 있길 바라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여러 방향으로 들여다보는 시선이 담겨 있어서인지, 다시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다.

어느 날, 퐁스는 체면을 생각해서 밥 한 끼 내어주는 유일한 사촌인 법원장 집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오늘은 명분이 그럴싸하다. ‘비루한 식객’쯤으로 여기는 법원장 부인에게 부채를 선물로 건네기 위해서! 겉은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예술을 누리며 자라온 뼛속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었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채를 한물간 고물 취급하는 부인에게 퐁스가 눈을 반짝이며 부채의 진가를 조목조목 짚어주는 장면은 마치 <진품명품> 파리 특집을 보는 것 같았다. ㅋㅋ 안타깝게도 이날 퐁스는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내몰린다.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습자지 같은 감성’의 소유자 퐁스의 두 줄기 굵은 눈물에 내 마음마저 미어졌다는... 흑흑.

치사스러워서라도 안 먹고 말면 되는데, 그에게는 식도락이라는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게 발목을 잡는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르는 고급 요리의 냄새를 맡는 순간 이성이 마비되고 마는 이 지독하고도 슬픈 미식가의 본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공짜 최고급 요리에 목을 매는 그 구차함에는 속이 터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판이 완전히 뒤바뀌는데, 퐁스가 평생 방구석에 모아온 예술품들이 실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는 것!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던 세상에 이런 빅 이슈가 터졌으니 냄새 맡은 하이에나들의 등장 또한 당연? 게다가 재산이 ‘유산’의 의미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

줄거리 자체는 퐁스의 ‘예술품 컬렉션’ 뒤로 각각 다른 종류의 ‘탐욕 컬렉션’이 펼쳐지는 익숙한 설정인데, 인간 내면의 허영심과 위선, 어설픈 우월감, 속물근성 등을 여러 인물의 삶 속에 채워 넣어서인지 마냥 꿀떡꿀떡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온갖 감정이 쌓이다가, 한낱 먼지인 인간이란 뭐고, 산다는 게 대체 뭐길래와 같은 허탈감에 마음이 바닥으로 툭 내려앉고야 말았다.

입에 자물쇠라도 채우고 싶은 분노 유발자가 꽤 많이 나오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역시 여러 가능성이 내 눈앞에 놓였을 때 결국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아 보이는 쪽, 더 유리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그런 기대가 썩 떳떳하지 않은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환경에 따른 고유한 차이들이 있겠지만, 같은 결과들이 되풀이 된다. (p.150)”는 문장이 내 마음 귀퉁이 한 부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인간의 보편성으로 들여다보려다가 결국 내 안의 속물성을 발견한 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 깊게 맴도는 건, 퐁스와 슈뮈크의 관계에서 본 결핍과 사랑(우정)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퐁스, 그리고 정서적으로 온전히 발붙일 곳 없던 세상에서 오직 퐁스라는 인간의 마음 하나만을 수집하고 간직하며 그것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 슈뮈크. 두 사람은 결핍을 충족시키는 방법뿐 아니라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을 지키는 방식 또한 달랐다. ‘계속 잘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잘 차려진 밥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퐁스였고, 또 그런 친구를 위해 매일 별미를 준비한 슈뮈크였다. 하지만 발자크는 세속적인 세상과 대비되는 이들의 우정만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의 원천이 도리어 슬픔의 원인이 되는 모순적인 과정까지 담아 가슴을 훑어놓는다. “사람은 어떤 종류든 만족을 느끼며 살아야 진정으로 존재한다(p. 23)”는 전제하에. 더욱이 그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하필 가장 연약하고 선한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엔 이 소설이 탐욕을 다룬 이야기 위주일 것 같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줄거리 이면에 얽힌 시선들이 워낙 복합적이라 퐁스와 슈뮈크,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감상 위주로 채워봤다. 그런데도 말이 길어졌다. 겨우 이 소설 한 권 읽어보고 다 알 순 없겠지만, 발자크가 인간도 세상도 그리 믿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평생을 거대한 ‘인간 희극’에 바친 걸 보면,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인간을.

“집구석에서 몇 명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내 야심의 전부였건만! 모두에게 인생은 쓴잔과 같지.” (p.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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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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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한때 라파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의 핵심 권력자였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 병든 채 누워 있는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을 내려다보는 우라니아. 얼어붙은 눈동자가 마주한 것은 단지 병든 노인이 아니다. 그 시선 끝에서, 35년 전 인간의 영혼까지 길들였던 권력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거대한 서커스장. 사람들의 등에 보이지 않는 줄을 꽂아 조종하는 인형술사로서의 트루히요. 그 무대 위에서 가장 비참한 줄인형들은 역설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장관과 관료들, 우라니아의 아버지인 아구스틴 카브랄 같은 인물들이다. 트루히요라는 줄잡이가 줄을 조금만 팽팽하게 당겨도 공포에 질리고, 다시 느슨하게 풀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탐욕스럽게 춤을 춘다. 줄이 끊어지는 공포보다 줄에 매달려 사는 굴욕을 견디는 것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아니, 뻔히 알면서도 끝내 ‘염소’의 변덕스러운 손가락 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세계에서 트루히요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언론과 수치심이다. 그는 사람을 무너뜨린 뒤 다시 손을 내민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욕받았다는 사실보다,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무엇보다 치가 떨리는 건, 트루히요가 쥔 줄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가족’과 ‘성(性)’에까지 꽂혀 있다는 점이다. 부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의 아내나 딸을 요구하고, 부하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이들을 제물로 바친다.

한편, 우라니아는 자신의 애칭인 ‘우라니타’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친척인 고모를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견뎌온 이들의 대화는 같은 언어에 닿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상대의 상처 주변만 맴돈다.

“그 일이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우라니타, 적어도 네게는 전화위복이 되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넌 지금 위치에 있지 못했을 거야. 반면에 우리에게는 재앙이 되었지.” (p. 19)

트루히요가 친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와 남겨진 자의 대화는, 서로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지나온 삶이 너무 달라서 어딘가 계속 서글프게 어긋난다. 14살 때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나 미국에서 번듯한 엘리트로 성공했으나 자신의 가장 깊은 아픔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우라니아와, 반대로 정권의 찌꺼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눈에 보이는 사회적, 경제적 고초만 이야기하는 고모.

그래, 이제는 말해야만 한다 우라니아. 오래 침묵했던 이유를, 그리고 침묵으로밖에 버틸 수 없었던 시간들을.

그러나 혹시라도 그 고백이 치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붕괴로 이어지면 어쩌나 우려스러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숨죽여 들여다봐야 했다. 나에게 우라니아는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현재 속으로 걸어 들어온 과거 그 자체였다. 악몽 같은 시간을 어떻게든 지우고 잊어보려 일과 공부, 그리고 책을 붙잡고 단 한 순간도 ‘생각’에 빠질 틈을 주지 않으려 했던 우라니아의 날들. 그렇게 시간은 멈춘 듯이 흘렀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우라니아는 컵을 들지만, 텅 비어 있다. (p. 364)

이처럼 철저히 외면해 온 우라니아의 과거는, 35년 전 독재자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이들의 역사와 맞물리는 순간 더 이상 개인의 비극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1권에서 암살단이 독재자를 향한 거사를 앞두고 차 안에서 과거를 되짚는 사이 정권의 악행들이 조각처럼 흘러나왔다면, 2권은 트루히요의 내부 집무실과 핵심 관료들의 시선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야말로 ‘트루히요의 긴 팔’이 조종하는 추악한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직 정권이 무너지지 않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타들어 가는 공포 속에서, 암살자들의 이름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한 명씩 호명되는 장면을 읽는 동안, 이들에게 씌워진 대역죄인이자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은 내 안에서 거꾸로 읽히고 있었다. 만만한 제물에 책임을 씌우고 본보기로 처벌하면서, 그 안에서 국민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려는 독재자들의 모습은 어딜 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아무리 날조와 수치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던 트루히요라 할지라도, 국민의 영혼을 쥐고 있는 교회와의 불화와 미국의 냉혹한 외면 앞에서는 무력했다. ‘신과 트루히요’라는 기만적인 축제가 끝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서커스장의 천막도 걷힌다. 다 드러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다. 이제 무대 뒤조차도 권력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무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독재라는 건 거대한 폭력인 동시에, 각자 살아남기 위해 택했던 비겁함이 얽혀서 지탱해 온 시간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사람이 망가지는 순간보다, 망가진 자기 모습을 끝내 견디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비린내 나는 피와 달콤한 향수가 뒤섞인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지켜보는 것은 지옥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보다 역할 속에서 살아가도록 길들여진 세계를,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어떤 시간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가 되지는 못한다. 우라니아는 지옥 같은 세계가 씌운 역할로부터 멀어지고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잊으려고 애썼던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상처는 우라니아가 지나온 시간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우라니아의 이름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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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6-01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라니아‘가 ‘우리나라‘로 읽히는 것도 트라우마의 흔적 같네요.

곰돌이 2026-06-01 21:07   좋아요 1 | URL
‘우라니아’ 자리에 ‘우리나라’를 대입해서 다시 한번 쭉 읽어봤어요. 모든 문장이 뼈아프게 겹쳐 읽히네요. 글자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마음이 괜히 더 울적해지고 먹먹해집니다. 깊이 있는 레이어가 더해진 것 같아요.

혼자 읽을 때보다 훨씬 깊은 마음으로 책을 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소의 축제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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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마지막 ‘하루’와 희생자가 견뎌낸 ‘35년’, 그리고 거사를 앞둔 암살자들의 팽팽한 밤. 이 세 갈래 시간을 정교하게 엮어 독재의 공기를 되살린 서사. 섬뜩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건 아마 오래전 남의 나라 공기가 낯설지 않아서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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