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그때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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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작품 중, 겉으로는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결국 딸이 오랫동안 삼켜온 감정을 꺼내는 일이기도 했던 <미스터 포터>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삶까지 토해내듯 써 내려간 딸의 심정이 오래 남았고, 그 인연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식민주의와 사랑의 결핍이 남긴 흔적을 끝까지 따라가는 지독한 결기를 느끼면서도, 그런 삶마저 끝내 살아내는 사람의 힘 앞에서 서글픈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리고 그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 작품들처럼 분노가 격렬하게 터져 나오기보다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증오와 슬픔이 삶에 깊이 배어 있었다. 이전 작품들이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를 바라보게 했다면, 이번에는 과거가 현재를 찾아오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 출신의 한 중년 여성이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삶은 어떤 잔인한 뜻밖의 일을 준비했을까, 어떤 부당한 과업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고된 임무를 이겨내야 할까. (p. 82)

어릴 적 엄마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나나보트를 타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미시즈 스위트. 사랑받았던 기억과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온 그녀에게 미국에서의 삶 역시 결코 아늑하지 않았다. 유럽 작곡가의 클래식을 듣고 자란 남편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이민자 아내. 두 사람의 출발점은 너무나 달랐다. 한때는 그 다름에 끌렸을지 몰라도, 둘 사이에 놓인 문화와 기억의 차이는 끝내 메워지지 않았고, 그 틈은 차가운 권태로 남았다. 길쭉한 다리가 매력이었던 젊은 시절의 아내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바나나보트를 타고 온 끔찍한 년”(p. 17)이자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남편. 그런 무시와 냉소 속에서도 미시즈 스위트는 자식을 사랑하고, 집안을 돌보고, 부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한 조각만큼은 끝내 놓지 않는 사람.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림책 너머의 의미를 먼저 읽어내던 아이였고,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게 내 권리”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먼저 따르던 아이였다.

누군가의 노동과 노력 위에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스터 스위트는, 아이를 돌보고 집을 지키며 자신의 몫까지 감당하고 있는 아내의 큰 목소리를 싫어한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싫어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녀에게 해보지만, 매번 묵묵히, 그것도 ‘척척’ 해내는 미시즈 스위트의 유능함은 다시 그의 열등감과 좌절을 건드린다. 아내가 일상을 버텨낼수록, 그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믿는 삶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미스터 스위트는 차고 위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는 항상 그곳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곳이 장례식장은 아니었고, 단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자신의 삶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p.65)

끝없이 자기 연민에 잠긴 미스터 스위트의 작업실이 마치 장례식장처럼 보이는 그 한 줄이 꽤 신랄했다. 내가 느낀 미시즈 스위트라면 남편의 이런 꼴사나운 슬픔마저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작업실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말없이 놓고 문을 닫아줄 것만 같다. 그녀는 아들 헤라클레스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그저 애들 장난으로 넘기지 않고, 아이의 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맥도날드 해피밀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플라스틱 인형은 병사가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하며, 온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 눈에 아내는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소설은 계속해서 ‘지금’과 ‘그때’를 오간다.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그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현재로 되살아나, 다시 지금이 된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저마다 지나온 수많은 ‘그때’를 데리고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을 계속 불러오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행복도 상처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라는 듯이. 지워질 수도,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시간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판단하기보다, 한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을 먼저 바라보게 하는 것. 미시즈 스위트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을까.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좋았던 일이든 아팠던 일이든,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닿고 싶고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는 시간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내겐 쉽지 않았다. 미시즈 스위트의 시선과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졌고, 계속 애를 써야 하는 독서가 되어버리더라. 그런데도 킨케이드의 글을 읽을 때면,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온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참고 삼켰는지 그 마음의 결을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분명 말해지지 못한 것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한 사람이 잊지 못한 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느린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못한 시간을 읽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의 그때와 지금은 어떨까. 그 속에 나는 어떤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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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

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

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

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



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
“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
“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
“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



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

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

《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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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7-2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모두 아름답네요.

곰돌이 2026-07-26 09:58   좋아요 0 | URL
늘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는 고민이 많고 쑥스럽기만 해서요. 이 글도 올려놓고 혼자 오버한 것 같아서 ㅋㅋㅋ 지울까 고민하다가 아몰라~ 하면서 뒀는데...... 다락방 님 댓글 잘못 단 건 아니시겠죠? 아, 달디달다...

다락방 2026-07-26 13:23   좋아요 1 | URL
진심입니다.글과 사진이 너무나 고급져요!!

잠자냥 2026-07-26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최근에 들어온 몇몇 땡투의 출처가 곰돌이 님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세요.

곰돌이 2026-07-26 15:31   좋아요 0 | URL
곰이라 그런지 맛있는 거랑 재미있는 책 낚아채는 데 빠르답니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글이 매력 있더라고요. 잠자냥님 덕분에 매번 좋은 작품과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신나고, 감사한 마음은 큰데 땡투는 영 변변찮네요.ㅋㅋ

책읽는나무 2026-07-27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볼라뇨 책 어디선가 접하고 보관함에 막 쑤셔둔 적 있었는데 저런 문장들이 있었군요. 문학이란…크.^^
그리고 곰돌이 님이 거두신 문학책들과 문학의 정의…크!!
절로 취하네요.ㅋㅋ
이 더운 여름 문학책과 함께 하신다면 그리 많이 덥진 않으시겠어요.
고요한 여름 풍경입니다.

곰돌이 2026-07-27 14:54   좋아요 0 | URL
‘크‘가 두 번!! 갑자기 얼마나 시원한지 감도 안 오는 막걸리가 확 땡기게 만드시는군요!! 요즘 책나무님은 만화책 열심히 읽고 계시던데, 저는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공포 소설이나 한 권 읽어볼까 해요. 으스스 ㅋㅋ
 
야만스러운 탐정들 2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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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문단의 틀에 맞서 자신들만의 시를 꿈꾸던 겁 없던 청춘들은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시의 뿌리를 더듬듯 오래전 자취를 감춘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후 이야기는 20년에 걸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시인 한 사람을 찾는 이야기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나온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늘 벨라노와 리마가 있다.

이름도 낯선 시인들이 쏟아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무모한 열기에 끌려갔던 1권을 지나 2권에 접어드니, 이번에는 그 뜨거움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는 쓸쓸함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볼라뇨는 분파주의에 갇힌 기성 문단을 꼬집으면서도, 그에 맞서 반항하는 젊은 시인들 역시 마냥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삶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등장해 몇십 페이지 동안 자기 인생을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의 삶 하나하나가 또 다른 소설처럼 읽혔다. 시적인 비약이 섞인 이야기들은 마음 한편을 묘하게 찜찜하게 만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삶도 끝내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대단히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돌리게 하지는 않는 참 이상하고도 묘한 작품이다.

“지나간 시절을, 밤이 밤 속으로 침잠하던 그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위가 쓰려 왔다.” (p. 482)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 한때는 문학이 인생 그 자체였던 시절,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하듯 돌아보게 되는 감정이 왜 이리 헛헛하던지. 같은 시대를 살아도 기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명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벨라노와 리마에 대해 누군가는 자유로운 예술가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무책임한 떠돌이였다고 말한다. 시대를 앞선 혁명가였다는 사람도, 시를 핑계 삼아 방황하던 청년들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리마는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은 채 사람을 만나고, 떠나고, 또 사라진다. 그런데 리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리마잖아.”


소설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건축가 호아킨 폰트가 남긴 잔상도 꽤 깊었다. 자신의 딸 친구들이자 내장사실주의자로 활동했던 젊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 자신은 이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다시 산책을 시작하고,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상사에게 초대받아 파티에 가게 된다. 서로 닮아 있는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는 이내 안도하고,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배가 몹시 고팠다. 나한테는 별로 없는 일이다. 너무 배가 고르고 너무 울고 싶고 너무 기뻤다. (p. 618)”라고 말한다. 아직 삶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아주 잠시 되찾은 것만 같은 호아킨의 모습이 어찌나 반가우면서도 먹먹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벅찬 순간 뒤에 찾아오는 상실이 너무나 쓸쓸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p. 620)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조금씩 밀려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마저 희미해진다는 것. 그런데 간신히 다시 삶의 감각을 되찾았다고 느낀 순간 마주한 것이 또 다른 상실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과연 호아킨만의 것일까.

1권 리뷰에서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인물도 그닥 없는데 이상하게 감겨서 읽게 된다’라고 썼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이 소설은 ‘1970~90년대 멕시코는 이랬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먼발치에서 슬쩍 훔쳐보는 기분으로, 뭐랄까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기보다 잠깐 함께 살아본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한다. 그야말로 동행. 나와는 너무 달랐고 향한 곳도 달랐지만, 어딘가에 온 힘을 쏟던 시기의 갈망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어정쩡했지만 피만큼은 끓었던 시절의 나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들에게 끌렸던 건 닮아서가 아니라 끝내 닮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무모함은 부러움도 동경도 아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을 바라보는 낭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낭만이 피어난 곳이 어디인가. 그야말로 “현실은 결코 꿈속에서 보고 사는 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야만의 시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싶다는 생각. 묵묵히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그들이 내게 들려만 준다면.

“제 유일한 바람은 직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열 번에 아홉 번은 구불구불한 선에 이어 뾰족뾰족한 선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제 몸이 쪼개지는 듯했습니다.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요. 복부에서 시작해서 이내 머리와 목구멍까지 쪼개지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지만요.” (p.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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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2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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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게 아니라 함께 떠돌다 온 기분. 그야말로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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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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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접해 본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가 유일하다. 길고 긴 이름 공격에도 불구하고 뚫고 올라오는 매력과 재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부터 로베르토 볼라뇨까지 여러 권을 책장에 채우기만 했는데, 요즈음 무거운 소설만 읽었던지라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찾다가 예상보다 이 책을 빨리 펼쳐보게 됐다는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멕시코의 세계로 들어가야겠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1권은 다시 두 파트로 나뉜다. 1부는 열일곱 살의 시인 지망생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한다. 시가 쓰고 싶었으나 등 떠밀리듯 법대에 입학한 마데로는 기성 시인 알라모가 수업을 진행하는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에 발을 들인다. 그런데 워낙에 패기가 지붕을 뚫고 대기권을 향해 직진하는 마데로인지라 알라모의 말이 영 와닿지가 않는다.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달랐던 것 같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발간하려는 잡지에 참여할 시인을 찾는다며 ‘내장 사실주의’인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가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들이 누구인가. 기성 문단의 질서에 순응하느니, 그 판을 한 번 뒤집어엎고 자기들 방식대로 시를 써보겠다는 청춘들이다. (참고로, 벨라노와 리마는 로베르토 볼라뇨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마리오 산티아고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고 한다.)

아니, 그런데 왜 이름도 영 껄쩍지근한 ‘내장 사실주의’를 만들었을까? 정확한 이유야 하나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당시 이들에게는 부모 세대처럼 순응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영 답답하게 느껴지고, 사회뿐 아니라 기존 문단 역시 현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세계처럼 보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반항심과 시대의 분위기가 내장 사실주의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전투가 시작되었다.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알라모의 비평을 문제 삼았다. 알라모도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아류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했다. (p. 17)

알라모의 눈에는 이 젊은이들이 그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초라한 아류’로 보일 뿐이지만, 진짜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시를 쓰는 건 바로 자신들뿐이라는 듯 벨라노와 리마는 굴하지 않는 기세로 대응한다. 안 그래도 교실 구석에서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마데로에게 벨라노와 리마 같은 선배들의 등장은 가슴 속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렇게 내장 사실주의자들의 품으로 쏙 빨려 들어간 마데로의 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공부는 안 한다.

밤새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찌든 공간에서 자신들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책들을 돌려 읽던 70년대 멕시코 변방 반항아들의 뜨겁고 퀴퀴한 골방 공기가 날 것 그대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자기들이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꽤나 절박한 싸움에 가까워 보였다. 완고한 권위의 벽을 쌓아 올린 기성 문학의 세계에 이들은 잘 닦인 한복판으로 멧돼지처럼 들이닥친 존재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따금 치기 어린 시절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마초적 허세, 여기에 거침없는 농담까지 첨가된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괜히 에너지를 쏟을 때가 (자주) 있는데, 그 소란스러운 난장판 속에서도 중심을 꽉 잡고 있는 건 시와 시인들이다.

독특하게도 2부는 1976년부터 1996년까지를 오가며 벨라노와 리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만 1권에서는 1979년까지의 이야기만 담긴다. 흥미로운 점은 벨라노와 리마가 누구의 기억을 거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려진다는 것. 그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도 제각각이다. 그중에는 작가가 자신의 분신 벨라노를 “내가 본 사람 중 최고 미남이었다. 축구를 할 때는 웃통을 벗어 상반신을 드러냈다. 그리스 신화 잡지에 나오는 그리스인과 똑같다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가톨릭 성인 같았다. (p. 222)˝라고 기억하는 고등학교 친구의 눈을 빌려 자신을 조각상으로 박제해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뭐, 그렇다고 하니 그런걸로... (풉)

때론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풋풋했던 시절의 기억 가운데 유독 눈길이 머물렀던 것 중 하나는, 나이 차이는 한참 나지만 벨라노와 친구처럼 지냈던 ‘아욱실리오 라쿠트레’의 이야기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1968년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졌던 공포가 선명히 박혀 있다. 탱크가 들이닥치고 전경들이 캠퍼스를 짓밟던 야만의 시간, 사람들을 어디론가 실어 나르는 트럭을 화장실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던 아욱실리오는 화장실 문을 꼭 걸어 잠근다. 배고픔은 수돗물로 채워가며, 기억나는 시를 암송하기 시작한다. 오직 ‘시’라는 마지막 끈 하나를 붙잡은 채 그 지옥 같은 며칠을 버텨냈다.

내가 미치지 않은 것은 늘 웃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내 치마 때문에 웃고, 내 홀태바지 때문에 웃고, 줄이 간 내 스타킹 때문에 웃고, 점점 금발이 사라지고 흰머리가 늘어나는 내 프린스 밸리언트 헤어스타일 때문에 웃고, 멕시코시티의 밤을 세심히 살피는 내 푸른 눈 때문에 웃고, 대학의 이야기들, 즉 부상(浮上)과 추락, 개무시, 승진탈락, 납작 엎드리기, 아부, 허위 업적, 멕시코시티의 밤하늘에서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는 흔들리는 침대들 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내 분홍빛 귀 때문에 웃었다. (p. 310)

그런 시간을 견뎌낸 끝에도 “내가 익히 아는 그 하늘 아래에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멕시코의 모든 시인과 함께”라던 처연하면서도 단단한 그녀의 고백이, 덥고 습한 여름날 방 한구석에서 책을 붙잡고 있는 곰 한 마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아까는 허세 가득한 10대 시절 특유의 찌질하고 하찮은 모습에 피식 웃어가며 읽는 잔재미를 야무지게 뽑아먹고 있었건만, 지금은 마음이 찌릿거리고 뜨거워지고, 아 왜 이래 ㅠㅠ

참 희한하다.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사람도 그닥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왜 감겨서 보고 있는 건지.
누군가는 마리화나 연기 자욱한 별채에서 겉멋 든 시를 읊조리고, 또 누군가는 내일의 삶조차 막막한 거친 길바닥에 선다. 당장 주머니는 텅 비어 있을지언정 차가운 다리 밑에 걸터앉아 밤하늘의 달을 보고, 싸구려 와인 한 잔에 밤새도록 낭만을 속삭이던 청춘들. 그런 모든 것이 뒤엉켜 있던 1970년대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볼라뇨도 이런 시절을 지나왔겠다는 생각에 더 실감이 났다. 어딘가에 미쳐 활활 불태우던 그 대책 없는 뜨거움과 유쾌함, 그리고 그 뒤에 남는 묘한 헛헛함까지. 그런 한 시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분. 꽤 괜찮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정작 이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는 언급도 안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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