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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평점 :
17세 소녀 ‘빅토리아’는 자신의 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공간인 과수원을 거닐며 그리움과 갈망, 아픔을 생각한다. 그녀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오빠를 사고로 떠나 보내고 남아있는 가족인 아버지, 이모부와 남동생 세스와 살아가는 삶은 그녀를 단숨에 어른여자로 만들어 놓는다.
‘이것 보세요. 제가 얼마나 살림을 잘하는지 보이시죠?’ 라고 말하듯 코를 납작하게 만들면서 안심시키는양 어머니가 하던 일들을 ‘척척’ 해내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단골 관중들인 아빠, 이모부, 세스는 놀라운 기색도 없이 그저 그 어린소녀가 껑충껑충 넘는 재주를 바라볼 뿐이다. 그녀가 내어 준 음식을 ’쩝쩝‘ ’우걱우걱‘ 먹어 치우며 그렇게 빈 접시만 내 놓고 사라지는 사람들.
너무 일찍이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벗어버리고 가정부의 역할을 주워담은 아이.
그런 그녀의 메마른 가슴에 달콤한 시럽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소년을 우연히 만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방인, 인디언 소년 ’윌‘의 등장으로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알아간다. 모험적이지만 애틋한 사랑의 달보드레.
주어지는 행복에 값을 치루게 하듯 사람들은, 이 세상은 더께를 치워 버리듯 인디언 소년을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다. 그것도 처참하게...
빅토리아가 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동안 책을 읽는내내 그녀에게서 윌을 빼앗아 가지마...제발 모른척 해줘... 라고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모른다. 그땐 그녀의 뱃속에서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줄지 모를 손도끼와 밧줄, 엄마의 뜨개바늘과 실, 어둠으로부터 빛을 내어 줄 성냥과 양초... 기대하는 마음을 죽이고 살아왔기에 무엇이 필요할지도 모른 채, 물건들을 주섬주섬 쓸어 담으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 할 집에서 나오기로 마음 먹는다. 사랑하는 엄마와 오빠 캘 그리고 이모를 집에서 떠나보낸 적은 있어도 자신은 떠나본 적 없는 이 집을 그녀는 뱃속의 아이 아빠인 ‘윌’도 빼앗긴 채, 그렇게 자신도 떠나야만 했다.
낯선 산 속에서도 윌의 영혼을 불러내 함께 걸었을 법한 길을 따라가는 동안 그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과 그리고 더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을 디딤발 삼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윌의 영혼이 불어준 용기를 들이마시며......
(P.224) 끔찍하든 아름답든 절망적이든 어떤 결과를 닥치든간에 그저 최선을 다해 마주하면 된다고, 윌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짧은시간동안 윌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갔다.
세상을 바꿔버리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었을만큼 그녀의 삶에 너무나도 큰 변화를 준 존재였다. 애쓰는 빅토리아의 삶이 두 볼을 뻐근하게 하고 눈물이 차오르게 하지만 말이다.
(P.265)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마다 아빠가 선물한 새 십자가의 포장을 뜯으면서도 매번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전통에 담긴 애정을 느끼며 십자가 하나하나를 닦아 포장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돌아간 집에서 옛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자신에게는 없었던 것 같았던 그들이 내게 보여준 사랑, 그리고 그들에게 없었던 것 같았던 서로를 향한 사랑을 자신들만의 소박하면서도 투박한 방식으로 전하며 키웠을 애정.
그들이 떠난 빈 집에서 하나씩 꺼내보는 추억.
추억이 될지 몰랐을 그 추억......
어릴적에는 소설을 읽으면 새로운 것에 놀라서 혼자 상상해보고 감정이입하며 즐거워도 했고, 등장인물들의 상처나 슬픔에는 ‘허구의 이야기’라는 좋은 장치가 내게 구세주가 되어 어린 마음에 안심을 시켜주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경험이라는 것이 조금씩 쌓이고 한 발자국 더 옮겨보고 시선도 조금 더 넓혀보니 어릴 적 허무맹랑하게 느꼈을 법한 이야기들도 이제는 상상속에서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의 삶은 애석하게도 너무나도 극단적인 일들이 그녀를 빗겨나가지 않았다. 연약한 소녀가 이미 12세부터 짊어진 무게가 그녀의 모자른 무게를 바윗덩어리처럼 채워주고 있었다.
이제 사랑하는 것과의 원치않는 이별은 그만하고 싶었을 것이다. 땅이 믿음직하게 보여주는 영원함, 나무가 알려주는 솔직함, 그리고 나의 애정과 보살핌으로 매달려주는 열매들. 새로운 터전을 일구며 사는 삶과 함께 앞으로의 낯선 앞날의 여정도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을거라 느끼지 않았을까? (제발 이 믿음이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P.281) 그동안 나는 지난날의 선택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걸 믿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와 원치않는 이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원망으로 삶의 대한 분노가 만들어 낸 불신. 그녀에게는 분명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말 많은 시간이......
그녀는 어린나이에 어머니가 하던 모습 그대로 부엌으로 내려가 제 할 일을 당연한 운명을 받아먹듯이 그렇게 단숨에 먹어치우더니 앞으로의 삶을 향한 마음가짐도 어느 새 긍정의 빛을 받아먹듯 ’신뢰‘하는 마음으로 성장해 있었다.
마음을 다잡기에는 자신이 살아 온 세월의 깊이가 결코 얕지가 않다. 극복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파도가 어린 그녀를 집어 삼켜버려서, 나였다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을텐데, 내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모성의 힘‘이 그녀를 흐트러짐없이 삶의 터전을 가꿔나갈 수 있게 해주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궈 낸 복숭아 농장을, 그 안에서 달콤하게 익어가는 복숭아를 자신의 새로운 터전에서도 만들어 내려는 그녀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차분하게 순리대로 나무 줄기를 시작으로 통통하게 피어나는 꽃봉우리가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자라는 열매를 맺기까지의 기다림과 고된 노동의 짜디 짠 땀의 맛을 아는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행복을 앗아가게 만든 모든 것의 대한 원망스러움에 보란듯이 맞서 굴복하지 않고 ‘용기’로 배신하였다. 살천스러운 바람에도 두 발 단단하게 일어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며 당당하게 말이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내 마음을 울리는 책이었다.
감성을 자극하는 좋은 책을 만나면, 그 소중함이 어디 새어나갈까 책을 가슴팍으로 ’꽈악‘ 한번 끌어 안는다. 언젠가부터...
자극적인 상황들이 많이 나온다. 아프다.
하지만 내 마음의 흠집이 남아있지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 ‘셸리 리드’가 얼마나 보듬어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써내려 갔을지 짐작이 된다. 거창한 이야기로 압도시키려는 불편함 하나없이 배려 받는 기분이 계속 들었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지금은 사는게 고단하여 위로의 마음조차도 사치라며 손사레를 치는 사람들에게 뿌리친 그 손을 다시 잡아주며 ’해 보라고‘ 한다. 너를 있게 한 모든 것들, 더운 날 맺힌 땀 식혀주는 바람에도, 지나치듯 무심하게 바라봤던 아무런 요구없이 피어나는 꽃 한 송이에도 너의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 아님 담고만 있던 그 무언가들을 있게 만든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라는걸.
살아온 길이 방해와 좌절의 힘을 빗겨나가 늘 언제나 행복하고 빛나기만 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내겐 이 책이 두 손에 따뜻한 손길로 내어 준 달콤한 복숭아 하나, 혹은 정성스럽게 구운 따뜻한 빵 한덩이 건내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강인함‘이 감동적으로 다가오고, 힘을 준다.
포기하지 말라고, 물 흐르듯이 살라고 용기를 준다.
어느하나 희미하지 않은 현실의 ’확실한 고통‘도 분명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날이 온다라는 그 ‘믿음’을 심어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 셸리 리드의 다음 작품을 빨리 만나고 싶다.
(P.309) 나는 하루하루 내가 선택한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었고 그건 좋은 삶이었다. 내게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내 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했다.
(P.416)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P.430) 얇은 구름이 흩어지고 윤슬이 반짝이는걸 보며 생각했다. 내가 삶이라고 불러온 이 여정도 잠겨버린 이 강물과 비슷하지 않은가. 저수지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온갖 걸림돌과 댐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고 흐르는 이 강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가지고 계속 흘러가는 이 강물이 내 삶과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