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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먼저 떠나보낸 사랑하는 이를 향한 상실감을 가진 채, 함께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수 없는 허망함을 가슴에 묻고, 슬퍼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소란스럽지 않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견뎌내는 것이 애도의 과정이라면, 그 애도의 기간은 평생이지 않을까.
무한한 슬픔을 달래도록 시간의 흐름이 내게 준 요령이란 애써 떠올려본들 눈물만 차오를 것 같은 기억들은 마른침 한번 꿀꺽 넘기고, 애처로움은 찾아낼수 없을만큼 행복했던 사소한 일상만을 얼른 떠올려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거.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거니까...
뭐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하면서 그냥 그렇게 또 참아보는 거.
이 책의 저자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아이디어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내 인생이 더 빛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아니면 이별로 인한 애달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도록 , 운명을 바꿔보려 할까?
동쪽으로는 20년 후 미래의 시간, 서쪽으로는 20년 전 과거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 보낸 상실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자문기관에 신청 후, 심사를 통해 승인을 받은 이들로 한해서 ‘애도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다. 멀리서 관망하며 말이다.
총 2부인 이 책은 1부에서는 16세 소녀 오딜의 모습을, 2부에서는 20년 후 36세가 된 오딜의 모습을 담는다.
다붓다붓 모여 그들만의 놀이터가 되어주는 운동장에서 왁자지껄 깔깔대는 아이들을 멀리서 혼자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서로 너나들이하는 아이들이 몰려오기 전, 얼른 잽싸게 뛰어들어가 빈 교실에 앉아 쓸쓸한 안정감을 느껴본다.
얼른 이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는 16세 소녀. 오딜.
같은 반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피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혼자만의 외로움이나 소외감에도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오딜을 본 같은 반 남학생인 ‘에드메’와 ‘알랭’이 그녀를 도와준다. 처음으로 받아 본 낯선 도움에 고마움을 느낀 오딜은 ‘에드메’에게 조금씩 끌리는 감정을 느낀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16세가 된 학생들은 각자 실습을 통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딜은 그녀의 어머니가 바라는대로 ‘자문관’이 되기 위해 심사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에드메는 바이올린 연주로 음악원에 가고 싶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몰래 연습을 하며 오디션을 준비한다.
이렇게 진로를 고민하며 지내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그네를 타던 오딜은 20년 후인 미래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 동부 철책에서 넘어 온 에드메의 부모님을 우연히 목격한다.
(P. 40) 에드메의 부모님이 이곳에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다른 밸리의 방문을 승인 받을 수 있는 사유는 사별뿐이었다. 산 너머, 20년 이후인 동부 밸리의 세상에는 에드메가 죽고 없는게 틀림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에드메의 운명을 알게 된 오딜은 이 사실을 발설하는 것이 위반사항 이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속앓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문관이 되기 위해서 더욱 철저하게 자문기관 실습 심사 프로그램에 임해야 했다.
(P.79) 방문이 청원자에게 ‘옳은’일인가? 방문이 청원자를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인가?
어떤 선택이 날 가장 두렵게 만들까? 날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해줄지의 대한 여부는 애시당초 고려대상이 아니다.
떠나보낸 사람을 관망하는 것은 내겐 그저 너무 서글픈 일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 오딜은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 에드메가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산 속에 연습하기 좋을만한 장소를 소개한다.
그들만의 연주회장처럼 깊은 밤, 고요한 숲속을 아름다운 현악기의 선율로 채우는 동안 두 소년 소녀의 애틋함과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묘사들이 굉장히 서정적으로 다가왔고 내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P. 161) 달빛이 비치는 공터에는 돌로 된 옹벽이 있었다. 벽은 잡초로 무성했지만, 굴곡진 오솔길을 따라 계단처럼 층층이 쌓인 구조 때문에 객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진줏빛 반광에 비친 에드메의 얼굴에 검연쩍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바이올린의 위아래와 양옆을 살폈다. 이제 바이올린의 상태가 만족스러운지 그는 활을 들어올렸다.
활과 현이 충돌하는 순간, 삽에서 퍼 올려지는 흙처럼 음표가 사방으로 튀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깨끗함과 경이로움.
내겐 책의 내용을 떠나 힐링이 되는 순간들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P.340) 겨울이 남기고 간 황폐함 속에서 피어난 초록 새싹을 보면 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투병을 마치고 마침내 고른 숨결을 내뱉듯 대지에 색채가 돌아왔다. 바람이 한 점씩 불어올 때마다 황금빛 꽃잎, 푸른 잎사귀가 열광하며 언덕을 깨웠다.
(P. 382) 새벽녘에 사택을 나섰다. 날이 상쾌했다. 풀과 나뭇잎에 신선한 공기를 뿜어냈고, 예배당 앞뜰에서는 스피어민트 꽃의 향기가 진동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일 조차 일상에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며 다른 밸리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해도, 받이들이지 않겠다던 오딜.
자신이 좋아하는 에드메를 위해 운명을 바꿀 선택지에 놓여 고민은 깊어지고 그를 향한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간은 흐르고 복잡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뒤늦게 친해진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에드메’의 마음도 자신을 향한게 아닌 것 같다.
다시 외로움 가득 한 그림자가 그녀를 찾고 있다.
(P.202) 너무 캄캄해서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아침이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의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쓸쓸함이 반가웠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하릴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하루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의 계곡>은 방관하는 자, 감수하는 자, 이용하는 자, 이용당하는 자, 짓밟는 자, 떠밀린 자 등의 여러 인간군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나 역시도 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해 ‘따끔’하게 관통 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가까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디디는 길,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그 길 앞에 서 있는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거친 파도 앞일지, 벼랑으로 이어질 비탈길일지, 아니면 결과가 예견되는 일에 나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앞에 놓여 있는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인생은, 삶은, 매 순간 우리를 선택 앞에 놓이게 한다.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선택의 순간들은 ‘시기’를 따지지도 않고 맞닥들이게 된다.
그녀의 어딘가 용기 잃은 부족한 열정은 16세 소녀가 뒤늦게 친해진 친구들 무리 앞에서, 그리고 20년 뒤 장교들 무리 앞에서 미처 불꽃을 태우지도 못한 채, 흩어지는 연기와 절망감을 얻게 한다.
그들의 얼굴에 쏟아지는 햇살만큼, 익숙하고도 반가운 외로움 그리고 패배감이 그녀의 온 몸에 쏟아진다.
(P. 247) “지난날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더 나은 앞날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비가 내린 후 음푹 들어간 웅덩이를 ‘철퍼덕’ 소리를 거칠게 내며 밟고 지나가는 트럭이 남기고 간 바퀴자국을 바라보던 16세의 오딜,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거친 바람에 잔뜩 낀 모래가 박힌 이마 주름을 바라보는 36세의 오딜.
달라질 수 있을까? 그녀의 운명이?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얼른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걷는다.
걸으면서 흐트러진 마음 정돈을 하듯,
이 책도 그렇게 걸어가듯이 읽어내려갔다.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상실감은 삶의 무상함을 인정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경외심’을 발견하며 무너진 마음을 추스리고 극복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받아들이는 자세와 단단한 마음이 부족했던 나는 허위단심하며 지금도 배워나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워하는 마음을 추억이라는 자양분으로 삼아 오늘 이 하루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며 따뜻하게 가슴에 담아본다.
철학적인 많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며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저자의 글을 통해서 확인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P.364) “됐어야 해, 했어야 해. 그런 건 없어. 지금 내가 나인 거야. 그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P.452) ˝되기로 정해져 있는 건 없다. 하나의 결과가 다른 결과로 대체된 거야. 남은 결과를 결정하는 건 네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