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1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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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잭 런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평소에 계급 간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계속 다른 책들에 밀려만 있었는데, 예쁜 표지 못지않게 책 맨 앞에 실린 녹색광선 편집부의 ‘책 머리에’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글과 더불어 ‘추앙으로 시작된 붕괴’라는 부제가 흐름이나 결말을 예상하게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할지 모를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기대하게 했다.

(P. 11)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붕괴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독자분들께서 마틴의 붕괴에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모순과 붕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학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므로.


저자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밑바닥 세계를 떠돌며 지내다가 15세 되던 해, 양식장의 굴을 약탈해서 팔면 돈이 된다는 말에 배를 한 척 사서 어린 해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를 위한 바다 위 피비린내 풍기는 욕망과 모래밭 위에서 육체적 쾌락에 뒹구는 것만이 존재한 거친 해적과 그들 주변을 맴도는 헤픈 웃음을 날리는 여자들, 그리고 상처로 굳어진 얼굴과 손으로 온종일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그의 세계를 채우고 있지 않았을까.

시도와 포기의 반복을 거쳐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잭 런던의 서사 때문인지 이 소설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남녀 간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가 인생을 살아가며 깨달은 삶의 본질을 엿볼 수도 있을 거란 기대도 하게 한다.

책장을 더 넘겨본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가난한 노동자 ‘마틴’은 우연히 상류 계급의 여성 ‘루스’를 만나게 된다.

여태껏 알던 탐욕스러운 여자들과의 강렬함과 달리 희고 창백한 얼굴로 우아한 아름다움만을 풍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틴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태어날 때부터 장밋빛 인생인 루스의 고귀한 자태 양옆으로 암담하던 시절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P. 21) 화이트채플 가에서 발을 질질 끄는 퀴퀴한 여자들, 술에 절어 퉁퉁 부은 노파들. 또 괴물 같은 여자 형상으로 선원들의 피를 빠는, 입도 몸도 더러운 지옥의 온갖 것들, 항구의 쓰레기들, 인간 세상의 밑바닥 찌꺼기들.

이 문장을 읽는 내내 적잖이 불편했다.
진절머리 나는 시궁창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 빚어진 자신을 향한 혐오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만, 절망 속에서 더는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란 것도 있지 않을까? 시련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한 선택에 가려진 것은 없었을까? 인간의 숭고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몸짓말이다. 생계를 위해 거친 삶 사느라 차마 드러내지 못한 이 모든 것까지도 한데 묶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인간의 가치가 계급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을 보고 느꼈을 저자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 소설 속 주인공 마틴이 지독한 자신의 삶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가를 알게 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돈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가 달라붙는 사람들을 보고 지내왔는데, 지금 눈앞에 생계를 위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책에서만 봤던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화려하고 멋진 저택에서 모든 게 어색하면서도 인간의 본능에 따라 아름다움을 좇는 마틴의 복잡한 마음은 그 만의 몫이 아니었나 보다. 고상한 삶에서 모든 게 익숙해 보이는 루스 또한 다른 결의 복잡함을 느끼며 자신도 놀랄 만큼 마틴을 원하고 있었다.

(P. 28)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타락의 본성이 자신에게 내재해 있다가 드러나는 듯싶었다.

사랑은 그랬다. 매혹적이었다.
본능에 충실한 ‘그 순간만큼’은 계급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감춰지고, 서로를 향한 호감은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고, 자신을 단속하려고 해도 더는 그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하는 마술이었다.

소금기 섞인 바람에 찌든 좁디좁은 방 한구석으로 돌아와서야 꿈에서 깬 듯 현실이 보이고 마틴은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애쓰지 않아도 자신과 그녀와의 머나먼 거리를 실감 나게 하는 것들이 하나둘 떠올려지고 자신의 주변을 채우는 소리와 코에서 맡아지는 냄새까지 어느 하나 고통과 가난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는 자기 삶이, 그녀와의 첫 만남은 분명 현실감 없는 꿈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안 될 이유만 가득한데도 지금은 황홀경에 빠져 하루가 삼 년 같고 그녀 생각으로 가슴에 먼지만 쌓여가기에 마틴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려 결심한다. 루스의 삶에 어울릴만한 나 자신을 만들고 싶은 열망은 솔직했고 순수했고 간절했다. 교양을 쌓고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마틴은 더 나아가 글로써 인정받고 싶고 작가로 성공해서 루스의 사랑을 얻고 싶었다. 흥미로운 건, 마틴이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점이었다.

(P. 91) 당신이 이 집에서 누리고 있는 삶에 나도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내고 싶어요.


‘계급’이라는 것은 가난을 벗어나려고 한 만큼, 글을 쓰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쓴 만큼 아무리 가려보고 눌러보고 막아보려 해도 부력에 의해 떠오르는 풍선처럼 가라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랑의 힘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숨겨두고 외면했던 감정을 끌어올리면서 애초에 가라앉을 수가 없었던 계급과 지위라는 장벽마저 들어 올리게 만드는 게 진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애처로운 노력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마틴의 사고는 건강해 보였다.
상류층 삶을 향한 속물적 욕망을 내비치고, 자신의 처지만을 탓하고, 기대만 하고, 고통만 받으며 제자리에서 이룰 수 없는 그녀와의 사랑만을 미친 듯이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루스는 마틴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 노력하고 그에게 느낀 활력을 그날의 자양분 삼아 하루를 보내면서 거칠고 열정적인 불꽃 같은 마틴이, 온화하고 차분한 애정과 사랑을 주고받는 삶으로 진입하길 원했다. 나는 서서히 현실의 냄새가 맡아진다.
마틴의 축적된 습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그가 가진 매력이 계급의 차이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지고한 가치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듯한 이 문장을 난 그저 냉정하게 응시할 뿐이다.

(P. 103) 그녀는 자기가 그를 빚어내고 있으며, 자신의 의도는 선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면서도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는 단단함을 가진 마틴이라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너머의 삶에 가닿기 위해 매 순간 충실하기만 한 그의 쉬지 않는 열정이 조금은 우려스러웠다.
그럼에도 마틴의 노력이 ‘가치 있는 삶’에 방향을 두고 있다는 점이 좋았고, 글을 쓰는 것을 통해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은 근사했다.

새로운 세계에 금방 눈을 뜬 사람처럼 적당한 긴장감과 발견하는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보이는 그의 모습은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소설을 써 내려가며 집필이 끊긴 동안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고 위로할 줄 아는 모습에 내심 놀랐다.
그가 겪어온 삶을 추측해 보며 자존감을 지키기 어려웠을 거란 편협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싫은 건 싫다고 할 줄 아는 마틴인데 말이다.

(P. 273) “나는 나고, 사람들이 다 만장일치로 내린 평가라 할지라도 내 입맛을 거기에 맞추지는 않겠어. 내가 어떤 게 싫으면, 나는 그걸 싫어하는 거야. 그뿐이야. 나와 같은 인간들 대부분이 그걸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척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시늉을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나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에 있어서 유행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야.”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점 또 하나는, 마틴이 자신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에게 혐오가 아닌 동류의식을 갖고 좌절 대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그의 모습은 분명 내면의 또 다른 불씨를 켜는 순간으로 보였다. 더 이상, 삶을 좌절시키는 것이 자기 자신이면 안 된다는 의지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P. 279) 자기 앞에 있는 고생에 찌든 여인의 주름진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수프와 갓 구운 빵 한 덩어리들을 떠올리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사와 인류애가 샘솟았다.

망망대해에 가로막힌 삶에서 벗어날 거란 생각을 못 했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배움을 통해 마틴은 지식을 얻고, 교양을 쌓으며 루스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속한 상류사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고 언제라도 허물어질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환멸과 분노를 안겼다.

나는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얻게 되는 인생의 진리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는 사람이기에 그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참된 아름다움의 의미를 얻을 수 있길 응원했고, 루스와의 사랑을 이루든 못 이루든 적어도 정신적인 가난에서만큼이라도 벗어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마틴의 분투와 배움의 의지는 자극되기도 하고 그가 도서관을 다니고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도 이전 삶에서는 찾지 못했던 숭고한 아름다움과 경외심을 찾는 모습에 그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가슴 한편이 조금 애처로웠다. 꿈을 갖는다는 것, 목표를 갖는다는 것조차 이렇게나 사람을 가슴 뛰게 하고 열정을 갖고 움직이게 만드는데, 현실은 이상과 다르지 않은가.

현실을 사는 내가 현실을 잊고 현실과 다른 나로서 마틴의 세계에서 그의 선택이 우주의 아름다움이든 푹푹 찌는 열기 속 노동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그 가치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즐기며 읽을 수 있었기에 독서 자체의 즐거움이 컸다.
무엇보다 중요할지 모를 ‘그 무언가’를 찾고 싶었던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마틴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일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P. 171) “그리고 삶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그런데도, 내가 이상하게 생겨 먹은 탓인지, 나는 그 삶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죠. 아름다움은 그런 삶 속에 있기 때문에 열 배로 증폭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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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08-22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듣는 작가인데...작가이름에도 책제목에도...이름에 지명을 붙이기 좋아하는 작가인가봐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곰돌이 2025-08-22 04:39   좋아요 1 | URL
(작가 이름은 계부의 성을 딴 거라고 해요) 주인공의 이름은 확실한 이유가 있어 보여요. 자기 삶에 비하면 여주인공의 삶은 천국 같아 보이거든요. 그곳을 향해 열심히 가고 있는 남자입니다. 재밌어서 2편 기대 중!!ㅎㅎ

바람돌이 2025-08-22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부에서는 그 천국에서 추락하는 마틴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앗 스포??? 그건 뭐 뻔한 이야기고요. ㅎㅎ 2권은 더 좋았습니다. 곰돌이님 글을 읽으니 제가 이 책 읽을 때의 흥분이 다시 살아나네요.^^

곰돌이 2025-08-22 13:06   좋아요 1 | URL
마틴의 삶만 풀어놔도 재밌어서 꿀떡꿀떡 읽었어요. ㅎㅎ 각자 살아온 삶에 너무 길들여진 상태라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마틴이 이제는 벗어나기 위한 삶 말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2권 다 읽고 나면 영화도 보려고요. 말하고 움직이는 마틴을 또 한 번 만나봐야겠어요!!

새파랑 2025-08-22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녹색광선에서 나온 책들이 다 좋은데, 그중 마틴에덴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바람돌이님 말처럼 2권이 더 좋았음~!!

곰돌이 2025-08-22 13:07   좋아요 1 | URL
녹색광선에서 나온 책은 감정의 혼란만 읽어봤어요. ㅎㅎ 1권도 꽤 재밌게 읽었는데 2권이 더 재밌다니…. 그나저나 마틴이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하면서 구애받지 않는 상황에서 소설 쓰는 장면이 나와주면 좋겠는데요…. 과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