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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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 어느 백인 작가는 자신의 ‘피부색’만 바꾸고 ‘흑인’으로 변장하여 인종차별의 세계를 체험하고 그 기록을 책으로 써냈으며, 또 그로부터 60여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의 나는 그 세월동안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야만 했던 이 책에 담겨있는 모든 이들의 상황과 이야기들에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보고자 이 책을 펼쳤다.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 발생한 폭발로 시력을 잃고 마는데 시력 말고는 잃은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모든 면으로 열등할거라 여기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타자’의 삶을 주목하게 된다. 십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 기적처럼 시력을 되찾은 그리핀은 오랫동안 자신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는 ‘흑인’의 모습으로 변신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한다.


흑인들에게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어찌보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새 날’을 위한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쾌락이었다. 가진게 없기에 잃을 것도 없는 이 사회구조가 절망감에 사는 그들을 거칠게 만든 것이다.

그리핀이 ‘흑인’이 되어 이 절망감을 마주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문 밖으로 발을 디딛는 순간부터였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고통 덕분에, 흑인의 삶을 잠시 ‘경험’하는 몇 주의 시간 만으로도 그 삶에 사로잡혀 비참함에서 단 하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P. 96) 존재하는 일 자체가 힘겨운 노력의 연속이다.


흑인들이 그토록 두려워 한다는 미시시피주에 직접 들어가고자 판단했을 때, 흑인이 갈 곳이 못 된다며 모두가 그를 말렸다.

그 곳에서의 체험을 담은 기록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틈도 없이 꽉 막힌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들 사이에 껴 있는 듯, 숨 조차 제대로 고를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엄청난 답답함이 도무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길거리를 걷는 것, 아니 집 밖으로 내딛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위험에 노출되는 흑인의 삶을 바라보니 좀 더 활동이 자유로울 뿐, 감옥 속에서 지내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P. 122)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도 공기 속에는 긴장감이 떠돌고 어딜가나 위협이 도사렸다.


그리핀이 이동을 위해 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수모들 때문에, 나는 ‘버스’라는 단어만 나와도 이내 불안감이 엄습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또 어떤 수모가 그를 기다릴지, 또 어떤 조롱이 그를 난처하게 만들며 비참함을 안길지 너무 초조하기만 했다.


아는 것은 많아도 ‘진실’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식수준을 너무 높게 판단한걸까? 악의가 없었기에 별 뜻없이 한 행동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비참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조차 인지 못해서 차별로 절여진 흑인을 향해 당혹스러움을 내비치는 그 모습마저도 그들에게 무력감을 준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P. 137) 웃음소리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 웃음소리는 흐느낌으로 바뀌고, 흐느껴 울면 깨닫는게 있고, 깨달으면 절망으로 떨어진다.


나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
내 안에 존중의식이 얼마만큼 존재하며 타인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끄집어내지 않은, 가슴깊이 숨은 생각들 속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 들어 ‘인지’조차 못하는 ‘차별’을 행하는 무리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말이다.

(P. 152) 가장 더러운 세력은 무식하게 떠드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앞장서서 법안 제안서의 ‘초안’과 선전 내용을 작성해 주는 법률가들 이었다. 이들은 사실을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언제나 애국주의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고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


흑인 거주 지역 대부분이 흑인의 투표가 지방선거에서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도록 그들을 도시외곽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 모습은 나치 정권이 ‘유대인 말살정책’을 위해 행한 손쉬운 관리 방법이었던, 그들 표현대로라면 유대인 ‘청소’를 목적으로 강제이주 시켰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언론은 어땠을까?
편향된 보도만 다루는 남부 신문에서 흑인의 재능을 다루는 경우는 없기에 그들의 편협한 시선이 달라질 수 있는 계기는 발생할 수가 없었다. ‘가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남부의 상황을 바라보는 흑인들에게도 희망의 씨앗은 있었다.
절망적이었던 남부흑인의 상황과 달리 애틀랜타에서 진보의 큰 발걸음을 내디디며 문제점 해결에 진척을 보였던 것이다.
그 곳의 특징은 첫번째, 흑인이 공통의 목표와 지향점 아래 단결해 있다는 점이었다. 두번째, 의식이 깨어있는 행정부. 세번째, 진실을 알리는 수단이 되어주는 언론이 존재 했다는 점이다.

이렇듯 옳고 정의로운 일을 지향하는 진정한 리더쉽 아래 깨어있는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억압하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느끼게 한다.

물론, 이들이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는 NASA에서 일하던 흑인여성들이 화장실에 다녀오려면 멀리 떨어진 유색인종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기에 뾰족한 구두를 신고 늘 쉼 없이 바쁘게 달렸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또 다른 영화 <그린북>에서는 백인들만이 설 수 있는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흑인 연주가가 무대만 내려오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어 묵고 있는 숙소를 가야만 했다.
그나마 이들은 가진 자들에게 대우 해주는 미국사회에서 능력있는 위치 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인 악습만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하게.

(P. 50) ˝가장 좋은 것은 집 근처에서만 지내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볼일 볼 곳을 찾느라 도시를 반이나 헤집고 다녀야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오.”


다른 지역과 달리 몽고메리에서는 인종차별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보여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으로 단결된 결의를 보여주는 ‘저항’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두려워 했던 것은 존재했다. 자신들을 위험으로 빠뜨리는 세력을 저항으로 맞서다가 흑인은 위험스러운 존재라는 기존의 주어틴 틀을 통해 교도소를 가게되는 불행을 얻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브라이언 스티븐슨의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는 책에서는 변호사인 저자가 백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은 흑인의 사건을 변론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불공정한 사법 시스템으로 ‘정당한 자비’를 얻지 못했던 흑인들과 소외된 계층을 향한 끊임없는 ‘관심’이 얼마나 필요하고,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준다.

피부색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게 참혹하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리핀은 백인 인종차별 주의자들이 흑인에게서 이런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영혼을 죽이고 살아갈 의지를 꺾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핀이 다시 백인 사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에 바른 화장을 긁어냈다. 허용되지 않던 모든 공간이 다시 그에게 활짝 문을 열었고, 그가 처음 느낀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그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백인의 삶으로만 살아왔던 그가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의 단순한 특권이 기적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과 함께 백인의 씁쓸한 한쪽 면을 그는 분명히 안다.


이 책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이젠 세월의 흐름을 머금은 빛 바래진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흘러간 시간만큼, 많은 것이 변했을까?’

뭘 바랄수 없기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삶을 택해야만 했던 이들의 삶을, 한때 과거의 시대적 배경을 담은 상황으로써만 바라 볼 수 있을까?

(P. 214) 어쩌다 생긴 우연적인 요소, 모든 특성 중에서 가장 하찮은 피부색소라는 특성 때문에 이들은 열등한 지위로 낙인 찍힌다. 내 피부가 영원히 검은색이라면 사람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아이들도 이처럼 콩으로 연명하는 미래속에 가둬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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