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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은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1899년 몸바사와 1950~60년대의 잔지바르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이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버림’으로 인한 ‘배반’을 담았고, 개인사들이 서로 엮여있다.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보는 이들의 시선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 같다. 이 리뷰도 아마 내게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한 인물, 감정, 사건 등을 위주로 담아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1부는 1899년대 잔지바르인 여자 ‘레하나’와 영국인 남자 ‘피어스’의 이야기. 2부는 1950년대 후반으로 이 책의 주인공 ‘라시드’의 형 ’아민’과 손가락질 받는 혼혈인 여자 ‘자밀라’의 이야기다. 모두 한계에 부딪힌 이들의 만남부터 사랑과 그리고 인생의 비등점을 코앞에 두고 배반이라는 결말에 이르는 비극적인 현실에 어쩔 수 없이 굴복을 택한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착잡함과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배반’을 당한 ‘버림 받은 자’로써 그럼에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극복해 나가야 하는 이의 모습, 그리고 유일한 삶의 목적이자 희망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도록 바라만 봐야하는 쓰라린 삶에서 예전의 ‘행복’을 상상하는 이의 아픔까지 모두 느낄 수 있다.
(P. 160) 우리는 기적은 거짓이라 생각하고 항상 숨은 혹은 숨겨진 설명을 찾는다. 우리에게는 더이상 영혼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우리의 은밀한 내적 공간은 그저 욱신거리는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는, 해결되지 않은 혼란의 장소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등의 보통의 삶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정신적 굴복까지 그들에게 비밀스러운 사랑과 열정은 포기 당할 수 밖에 없는 슬픔이었고, 살아나가야 하기에 ‘용기’로 둔갑 시켜버린 원치 않았던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늘 무언가를 잃어야만 했다.
2부와 3부에서 다뤄지는 소설의 화자이며 주인공인 ‘라시드’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64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1963년 12월이 되어서야 영국의 보호령이 끝이 나지만, 1964년 ‘잔지바르 혁명’ 이 일어나면서 아랍과 인도계 주민들은 탄압대상이었다) 동아프리카의 내전으로 혼란을 겪던 시기를 빗겨나가고, 그의 부모님과 큰누나 ‘파리나‘와 형 ’아민‘ 은 탐욕과 위협이 난무한 잔지바르에서 그들만의 삶을 이어간다.
(P.302) 우리가 받은 상처의 복잡한 의미를 단순화하고 우리가 느낀 감정을 평가절하했다.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불쾌했던 걸까? 우리의 머릿속에 우리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주입하면서 세계를 정복하고 다닌 것은 자기들이었는데 말이다.
(P.303) 항상 회의적인 시선이 따라와서 내가 입을 열거나 사소한 불평을 나열하기도 전부터 그 시선, 삐딱한 고개, 딱딱한 미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어서 말해봐. 우리가 너희에게 그렇게 많은 걸 해줬는데 어디 인종 편견에 관한 네 진부한 넋두리를 들어보자꾸나.
영국에서 ‘라시드‘의 삶이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그리고 그 분류속에서 제한된 가능성을 인정해버린 진정한 이방인이었다. ‘우리세계’의 일어나는 소란의 대해 마음으로 함께 하는 동시에 멀어져가는 이방인. 그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내가 가진 ‘혐오감’을 넘어서야만 했으리라. 세월이 좋아져서 ‘너희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 마시며 호흡하며 공부하는 날도 있다니 감개무량 하구나. 너희들이 보내는 차가운 시선과 삐딱한 고개에서 내쉬는 차가운 공기에 우린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어!! 소리치고 싶었겠지. 그럼에도 후한 마음으로 목소리 내는 것을 삼켜야 했겠지.
자신의 일부라고 여겼을 멸시하는 언어와 미움받는 기분, 억압, 박해들을 슬픔속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갔다. 활기 넘치던 시간들은 바람과 함께 날려버린 채.
‘라시드’는 혼란과 억압 속에 살아가는 슬픔과 한을 담고사는 형 ‘아민’에게 오는 편지가 오면 ‘불안’의 감정을 느끼며 뜯어 본다.그럼 걱정과는 달리 형은 그저 상상 속에서 머뭇머뭇 서성거리는 궁금한 세계인 이 곳(영국)을 ‘어른아이’처럼 물어보고 있다.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는 아찔함과 온 세상이 하얗고 근심없이 내리는 눈 내리는 거리를 보는 기분은 어떤 것인지. 자신의 갈망과 슬픔이 담긴 ‘한’을 숨긴 채, 아프지만 너무 맑은 그 무엇이 담긴 말들로 대신하는 형. 반짝거리며 눈 앞에 보이는 희망을 들여다 볼 기회도 없이 꺼져가는 자신의 슬픈 삶 속에서 고작 고뇌의 끝에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평판이 나쁜 ‘자밀라’와의 만남을 단념하는 것 뿐이었던 아민. 난 그의 포기와 슬픔이 가장 맘이 쓰였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은 슬픔과 고통만을 담은 책은 아니다. 그의 또 다른 책 <바닷가에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친절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식민지배를 당하는 허약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운명이 물려받아야 할 업보인양, 비참함을 짊어지는 이들의 이미지들로 마음이 많이 괴로웠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향인건지, 아니면 디아스포라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 무게가 누르고 있어서인지 모진 말이나 가시 돋힐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참 차분하고 심지어 부드럽다. 가시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그래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나약함에 사로잡힌 연약함으로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나의 시선은 보통 ‘난민‘을 향한 측은함만이 담겨진 값싼 동정심이 아닐까? 읽을수록 나의 마음도 무겁다.
아프리카 출신 아랍계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모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혼란을 직접 경험 했으며 1968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 때 잔지바르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향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이 책의 주인공 ‘라시드’와 같은 심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모를 수가 없다. 글로써 자신과 같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위로하는 마음과 가족들을 향한 사랑을 전달하는 저자에게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위로를 해 주고 싶었고, 그리움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등불’을 밝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따라가며 빛을 비춰주고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안개처럼 늘 깔려있을 그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거둬주고 싶었다.
’라시드‘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만족스러울 수 없는 삶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었던 자신의 삶 속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억압된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공포‘를 삼키는 법을 배워야만 했을 것이다.
아민과 라시드에게는 ‘파리다’라는 누나가 있다. 그녀는 ‘아민’과 ‘자밀라’와의 관계를 이어주려고 도와줬던 인물이자, ‘라시드’에게는 가족과의 끈을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했다. 두 남동생들에게 치우칠 수 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단비와도 같았을 그 사랑을 이어나가고 유일하게 이 책 속에서 그 사랑을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공부에 소질이 부족하여 기대치가 없던 딸이자 누나였던 그녀는 시인이 된다. 어느 날 라시드는 그녀의 책을 받고 뒤표지에 있는 누나의 사진을 본다. 세월이 많이 흐른 모습에서 이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나의 책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었다.
(P.324)나에게 배려를 가르쳐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선량한 아민과 우리를 떠난 적 없는 라시드에게. 그리고 내 모든 사랑을 담아 아바스에게. (아바스는 그녀의 남편이다)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가족들보다 ‘라시드’ 자신이 훨씬 나은 환경이었기에, 이 복에 겨운 ‘운’으로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아가는데 그런 자신을 향한 대견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긴 형의 편지와 ‘우리를 떠난 적 없는 라시드에게’라고 감싸주는 누나의 헌사를 읽고 얼마나 고마웠을까.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해준 가족들의 말을 듣고 싶었을 이 책의 저자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심정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형 ‘아민’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리뷰를 마친다.
(P.357) 나는 어둠과 정적이 일종의 지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음악을 금지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없앤다 해도 슬플 것 같진 않다.
슬픔에도 좋은 점이 있다. 마가(어머니)나흘 전에 떠나면서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