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혼자 던져졌다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강명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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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우울증에 걸려서 고통스럽다.”라고 주변에 말하면 이해를 받을 것 같다. 그런데 외로워서 고통스럽다.”라고 말하면 수치스러움과 민망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젊을 때는 그래도 연애시장에서 원나잇이든, 연애든 짝을 구할 수 있었다. 주변 친구들과의 우정으로 어떻게든 삶의 빈틈을 메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자의 이런 기대를 깨트린 건 일단 코로나. 자신이 알던 친구들은 전부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고 저자는 혼자 남았다. 게다가 저자의 나이도 이젠 더 이상 자유롭게 연애시장에서 짝을 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며 삶을 완성하기에는 남아있는 시간 자체가 많질 않다. 두 가지 주요한 환상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노력을 기울이면 어느 정도의 부유함은 누릴 수 있을 거라는 환상. 또 하나는 가정을 이루고 사랑을 받을 거라는 환상이다. 이 두 가지 판타지가 보편적으로 실현가능한 게 아니라는 게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도 저자는 (아마도 나도) 이 판타지를 내면화하고 고통받는다. 더욱 고약한 것은 언젠가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낙관이 희망고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더 이상 가정을 이룬다는 선택지가 사라지는 순간의 인생의 전환기에 선 사람에게 공감을 얻을 것 같다. ‘홀로사는 삶을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선택하게 된 사람의 여러 감정선과 단상이다. 어쩌면 결국 이루지 못한 삶의 길을 애도하며 작별하고, 눈 앞의 현실을 수용하고 거기서 또 다른 배움을 얻는게 저자의 대안인 것 같다. 그래도 저자는 마지막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존버. <어바웃 보이>에서 혼자 사는 주인공이 남는 시간을 유닛으로 구분해서 이발소 가기에 2유닛, 당구치기에 1유닛하면서 공백을 버티는 장면이 있는데 이 책에도 주인공이 혼자 사는 삶의 균형을 위해서 여러 가지 기예를 발휘한다. (그 중에는 뜨개질도 있다.) 혼자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한 번 참고할 만한 경험담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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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부패한 LA 경찰 영화 장르’가 따로 있지 않을까. 유명세만 듣고 수십년 간 보지않고 묵혀둔 영화 중 하나인 <L.A. 컨피덴셜>을 보고 든 생각이다. 어떤 영화는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세련된 느낌을 주는 영화가 있는데 - 예를 들어 왕가위의 영화들 - 아카데미상을 받고 당시 꽤 이름값이 있었던 이 영화는 이제 낡은 느낌이다. 물론 나쁘진 않다. 명배우들이 전성기 모습으로 떼거지로 나온다. 성추문으로 맛가기 전의 케빈 스페이시, 전형적인 백인 히어로 필의 가이 피어스, <글래디에이터>의 투박한 느낌과는 달리 러셀 크로우도 쌩쌩하다. 이들의 연기도 전부 훌륭하지만 뭐랄까, 이들은 롤플레잉 게임의 캐릭터들로 보인다. 마치 감정과 행동라인이 정해진 규칙대로 자동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그 게임의 규칙은 부풀린 코트 자락, 힘이 들어간 어깨, 담배를 꼬나물고 한판 붙어볼까 하는 스테로이드 뿜뿜하는 남자들의 세계다. 여기서 여자들은 헐리우드 배우를 닮기 위해 성형 수술하고 ‘아방궁’에서 남자들을 기다린다. 당시 영화평처럼 ‘LA는 더 이상 천사들의 도시가 아니다.’ ‘밝고 건전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범죄 세계’ 같은  컨셉으로 충격을 주고 싶었겠지만, 요즘 기준으로 보면 흑막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오히려 이들의 행동들과 번쩍이는 조명,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파티, 술집과 자동차들,,, 이런 것들이 ‘좋았던 옛날 시절’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남자들은 어깨를 부풀리고, 서로 총질에다 치고받고 주먹질하고, 잔뜩 거들먹거리며 매춘부에게 순정을 바친다. 선과 악도 분명하고 적도 분명하다. 왠지 흥분되고 두근거리는 사건 사고가 있을 것 같은 LA라는 닫힌 세계에서 마음껏 스테로이드를 발산하며 ‘어디, 무슨일이 있나, 한번 붙어볼까(살아볼까)’하는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어째 우울할 때 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영화에서 FM 경찰은 한 명도 없다. 어차피 닳은 요즘 관객들은 그런 거 기대하지 않을 거 같은데 전부 조금씩 편법을 쓰던 경찰들이 마지막에 정의감에 불타 힘을 합쳐 거악을 처단한다는 – 이것도 어째 ‘좋았던 옛날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스토리다. 기억에 남는게 러셀 크로우가 현장에서 무방비 사태 범인을 체포하지 않고 죽인 다음 범인이 먼저 총을 쏜 것처럼 조작하는 장면이다. 이거 보니까  알폰소 쿠아론의 <트레이닝 데이>에서 비슷한 장면의 덴젤 워싱턴이 떠올랐다. 이것도 LA 경찰영환데 헐리우드가 있어서 LAPD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 건가?  <스피드>의 잭 트레븐도 LAPD다. 이 영화나 <트레이닝 데이>가 뭐 LAPD의 부패를 고발하는 영화는 아닐 테고, 그래도 <LA 컨피덴셜>의 업데이트판이 <트레이닝 데이>처럼 느껴져서 재밌다. 아니 요즘 한참 시끄러운 박모 검사 사례를 보면 이들 영화에 지혜가 담겨있는 지도 모른다. 진실을 보여주는데 영화 속 얘기로 치부하는 관객이 어리석은 지도. 
 혹시 부패 경찰들을 보며 마음이 상했다면 <엔드 오브 왓치>의 두 순찰 경관으로 마음을 달래보자. 뭐 엄청 재밌진 않다. 그래도 머리를 삭발하고 경찰 제복을 입고 총질하는 제이크 질렌할은 폼이 난다. 형사하고 순찰 경관하고 위계가 있나? 그러고 보니 <트레이닝 데이>의 에단 호크도 고속도로 순찰하다 마약반에 들어가고 싶어서 하루동안 트레이닝 데이를 받는다. 13X13 순찰차의 ‘짭새’느낌의 2인조 경찰과 LA 밤거리를 순찰해 보자. 그들의 뒤를 받치는 수천명의 ‘형제’들의 동료애와 함께. 거리의 ‘쓰레기’들과 한바탕 총격전을 벌인 후에 사격 자세를 취하며 서로에게 묻는다. “YOU GOOD?”,  “GOOD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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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명 > 인공의 생태계는 언제 끝장이 날까?

기후위기의 시대 가짜엘리트의 시대다 초등학생 자기 딸 검사 시킨다고-마치 지금 검사가 된 것 마냥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아조씨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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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퍼스트 카우>는 느린 미니멀리즘 연출로 미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인 켈리 라이카트가 우정을 주제로 연출한 서부극이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으로 시작한 영화는 강변에서 산책하던 한 여성이 파묻혀 있는 두 구의 유골을 우연히 발견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후 영화는 갑자기 서부 개척 시대로 소급하여 그 유골에 얽힌 사연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떠돌이 노동자 쿠키킹 루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유골이 놓인 자세로 눕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의 초입 부분과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루며 끝난다. 블레이크의 격언과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관객은 이 영화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우정을 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인공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잔잔하지만 오랜 여운을 남긴다. 감독은 우정이라는 주제를 위해 왜 때깔이 좋지 않은서부 개척 시대 떠돌이 노동자들을 선택했을까? 그들의 죽음을 생략한 갑작스러운 마무리는 어떻게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것일까?

무의미에 의미는 있는가?

감동과 의미는 일관된 거대 서사나(외계인과 의기투합해서 우주를 구한다) 합리적 결론(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 사랑을 확인한다)에서만 도출되는 것일까? 무엇인가가 한 때 단지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주는 의미라는 게 있을까? 예를 들어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 1998)에서 결혼식장 촬영기사인 춘희(심은하 분)가 손홍민의 찰칵자세를 하면서 이렇게 해서 바라보면 전부 의미가 있어 보여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지겨운 일상의 공간도 프레임 안에 넣고 시선을 보내면 영화적 공간처럼 의미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를 시간순으로 배치하지 않고 두 구의 유골이 산책하는 여성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는 설정으로 감독은 보이지 않던 것에 찰칵자세를 취한다. 침묵하던 이들은 목소리를 얻고 들어주는 이가 없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감독이 선택한 인물은 지옥의 격언에 어울리게 녹록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일거리를 찾아 대륙을 방황하고(킹 루는 피라미드를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부모는 출생 이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게다가 쿠키는 우유를 훔치면서 소를 다독이는 장면에서 보여주듯 생존이 먼저인 서부 개척 시대에 걸맞지 않게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이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남쪽에서 여행자들을 위한 호텔을 운영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요새를 관리하는 장군이 소유한 소의 우유를 훔쳐 쿠키를 만들어 팔다 뜻밖의 대박을 터트리며 소의 주인인 장군에게까지 쿠키를 팔게 된다. 요새에는 소가 단 한 마리(퍼스트 카우)였기 때문에 우유를 훔쳤다는 사실이 들통날 수 있었으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이들은 계속 절도 행각을 하다 장군에게 발각되고 추격을 피해 도망치게 된다. 감독은 4:3의 화면비로 두 주인공에게 시선을 모은다. 그들이 남루한 삶을 사는 만큼 화면을 채우는 것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카메라는 끈기 있고 진지하게 이들의 행동을 바라본다. 그 진지함이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결말과 함께 이들이 실존했다라는 느낌과 그리고 영원히 상실되었다라는 느낌을 준다. 카메라가 이들에게만 진지한 게 아니다. 이들이 쿠키를 팔고 요새 안을 지날 때 카메라는 서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과 행동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때 단 몇 개의 동작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행동은 이야기와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는 단순히 영화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는 목적 외에도 이들을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대하며 그들만의 시간과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만약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들의 우정 때문만은 아니다. 겉보기에는 이들 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선 우정 앞에 먼저 시련이 닥쳐야 하고 그 시련을 우정이 극적으로 극복하는 서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두 명이 재회하며 반가워하는, 과장 없이 연출된 장면이다. 만약 그들이 도주에 성공했다면, 호텔 운영에 성공했다면 둘의 우정이 언제까지 유지됐을까? 영화 초반 쿠키는 식량 부족 때문에 동료들에게서 구박받는 상황에서도 킹 루를 몰래 도와준다. 하지만 그 장면을 동료에게 들켰더라면 무리에서 서열이 낮아 보이는 쿠키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쿠키가 추격을 피해 도주하다 킹 루를 찾은 것이 우정 때문이었을까? 숨겨놓은 돈 때문이었을까? 관객들이 답을 찾기 전에 이들의 삶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끝나버린다.

 

단편적인 것에 시선을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 (기시 마사히코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중)

 

우리가 추억을 담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며 회한에 젖는 것은 그 순간의 유일무이성과 상실감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일회성과 유일무이성이 남루하고 단편적인 삶의 순간조차 감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이 서사는 하나의 완결된 우주가 되고 한 때 존재했지만 영원히 더는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도리어 이들의 삶이 초라했기 때문에 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들의 우정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도망치다 재회한 이들이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은 더없이 안온하고 부드럽다. “자네가 떠난 줄 알았어라고 말하며 서로를 얼싸안는 장면은 평생 떠돌이로 살았던 그들의 삶과 겹치며,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서로에게서 안식처를 찾았음을 보여준다. 한때 그 순간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이 삶이 가치 있어 보이고, 다른 가치판단은 필요 없어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처럼 어이없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킹 루는 곧 떠날 거야라고 말하며 쿠키의 옆에 눕지만, 관객은 그 말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는 등장인물을 보며 관객은 그들을 더 깊이 연민하며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곧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보여주는 감동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곧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영원한 사라짐으로 향할 때 오는 감동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런 종류의 감동은 그것이 무의미하고 사소할수록 더 드러난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나 외계인과 합심하여 우주를 구하는 이야기에는 자체 발광하는 의미와 영원의 아우라가 있다. (하지만 착시다. 진실은 피라미드나 우주도 결국엔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다) 반면 두 명의 떠돌이 노동자의 삶은 사소하고 무의미했기 때문에 그 사라짐은 관객을 직격한다. 감독은 구체적인 사라짐의 장면을 생략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그 충격을 전달한다. 관객이 등장인물의 죽음을 상상하며 그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완성하는 순간 그들의 실존에 더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퍼스트 카우>보여주기의 예술인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기라는 역설로 무의미의 역설을 전달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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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드디어 피같은 내 돈 3천원까지 쓰게 만들며 기어이 이 영화를 보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영화속 빌런 현실판 이란 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 것이다.뭐 극영화니 신빙성이 있는지는 추가로 확인을 해야 하지만, 트럼프가 갑툭튀 괴물이 아니라 어떤 흐름 안에서 탄생한 인물이라는 설명은 상황을 납득하게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트럼프를 만든게 로이 콘이라는 변호사라는 게 영화의 설명인데, 의외로 실존인물이고 이 사람 다큐도 볼 수 있다. 

 

첫째 공격,공격,공격해라.

 

둘째 진실을 부인해라

 

셋째 져도 이긴척 해라 

 

트럼프가 로이콘에게서 배운 원칙이다. 

 

트럼프타워나 코모도 호텔이 빈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부자들이 트럼프를 더 부자로 만든 것이다. 어찌보면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이용해서 고객의 범위를 평민으로 늘려서 장사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판 대가가 돈이었다면 지금은 표로 바뀐 것이다. 영화가 만듦새가 떨어지지는 않지만, 엄청 재밌지는 않다. 그냥 트럼프 인생 서사를 차례로 늘어논 거라..

 

마지막 인터뷰 장면은 지금 상황이 너무 절묘하게 오버랩이 되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트럼프 빨리 엿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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