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라 - 돈, 노동, 소비, 관계…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법
로버트 링엄 지음, 이주만 옮김 / 카시오페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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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군가는 바라마지 않는 정규직, 나인 투 식스 주 5일 근무 에 알레르기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머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매일 하루의 대부분을 의자 앞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본다고 생각해보라. 집에 들어오면 형광등 불빛이 지겨울 정도이다. 이 책의 저자가 후디니의 예를 들며 탈출을 꿈꾸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아마 국내에 이 분야의 선구자라면 백수론을 줄기차게 펴고 있는 고미숙씨를 들 수 있겠다. 이 책은 그런 종류 담론의 영어 버젼이랄까, 더 비꼬는 풍자의 맛이 있다. 고미숙씨의 담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저자의 농담을 즐겨가며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이 말하는 것 중 하나가 "그런다고 안 죽어" 일 것이다. 이 책은 고맙게도 탈출에 실패했을 경우까지 시야에 넣고 있다. 지금처럼 풍요의 시대에는 자신의 욕망만 줄이면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는 애기인데 과연 코로나시대에도 이런 주장이 유효할까 하는 의문은 든다. 코로나 시대에 아마도 우리 모두의 삶이 바뀌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에서 이런 백수론의 이제 어떤 의미를 띄게 될까. 마 어쨌든 지금 컴터 앞에서 상사 몰래 딴 짓하는(나같이 블질하는) 도시 노동자들이 지금 이순간이 니체 말마따나 영원회귀한다고 상상해보자. 무엇이 느껴지시는지. (난 물론 좌절감이지...)

기억나는 정규직에 기겁하는 또 하나의 사람이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먀 겐지인데 이 사람한테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에세이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요약하면 회사 다니지마라, 부모 말 듣지 마라 인 것 같다.  근데 요즘엔 이런 책 읽다 보면 새삼 내가 무산계급의 자식이구나 하는 자각이 든다...


p.s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창업기를 다룬 영화 <소셜네트워크>의 핵심대사는 명함에 새겨진 "내가 바로 씨이오다 이년아"라는 대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차별과 배제,위계에 관한 영화인 것 같다. 영화의 첫장면은 하버드 대학 다니는 주인공이 보스턴대학 다니는 여친 비하하다가 절교당하는 장면이다. 그럼 주인공은 하버드대 다니니까 메인스트림이냐? 하면 그게 아니다. 대학 내에서 그는 너드 스타일에 키작고 왜소한, 인기없는 남자다. 감독은 카약 부 출신의 미남 마초와 대학내 소모임에서 따 당하는 주인공을 대비시킨다. 대학 내 소모임도 자격이 필요하고 그들의 요건을 통과하면 인사이더가 돼서 다른 사람을 배제시킨다. 파티를 벌이고 미녀 여대생과 놀 수도 있다.  주인공이 왈도 세브린을 페이스북 창업 후 짤라버린 것도 대학 시절 왈도가 스컬스 같은 모임의 일원이 됐지만 주인공이 되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이 장면을 연출하는 데이빗 핀처, 오옷 작살인데...  페이스북도 결국 명문대 위주로 퍼져나갔으니 서로 서로 선을 긋는 모습에 관한 묘사가 이 영화의 주제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백미는 주인공이 만든 그 명함. 회사처럼 차별과 배제, 위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던가?  그런 회사를 창업한 주인공은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닌 자기가 만든 세계의 인사이더인 것이다. 근데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그냥 꼬우면 출세하라는 괜히 비딱한 말이 생각나서,,, 머 이 세계에서는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만 살아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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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아, 학교! 나는 거기서 자칫 존경받을 처지가 된 것입니다. 존경받는 관념 또한 나를 몹시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울만큼 사람들을 속이고 , 어느 전지전능한 자가 그 사기 짓을 간파하는 통에 그만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나서 죽는 것보다 더한 창피를 당한다, 그것이 '존경받는다'는 것에 대해 내가 내린 정의였씁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존경을 받아봤자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알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윽고 그의 말을 듣고 속은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내개 들이닥칠 분노와 복수는 아아, 과연 어떤 것일 까.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양윤옥 옮김,시공사)

        


"그 사람 아버지가 나빴어"라는 마지막 문장이 뜬금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조의 몰락은 분명 그 시대의 분위기와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당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나약했던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착한' 아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쿨하고 섬세하다.


"1994년 말 암릿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우리가 단상 위로 모시고 추앙했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암릿 역시 과거의 부적절한 행실이 세간에 알려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극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암릿처럼 진화한 사람이 그토록 극심한 변화의 시기를 어떻게 겪어내는지를 바로 지척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진정 큰 축복이었다. 이 곳에 있는 동안 그는 일체의 모든 상황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신이 겪어야 할 모든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런 상황들은 마치 불과도 같았고, 암릿은 그 불을 오로지 영적 정화를 위해 사용하고자 했다. 그는 슬퍼하지도, 상처받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내려놓고 끝까지 경험할 뿐이었다. 나는 내가 내면에서 언제나 보아오던 것을 암릿에게서 끊임없이 목격했다. 바로,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그저 "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태도였다. 이 상황에서 의미있는 유일한 기도는, 이 하얗게 타오르는 불이 개인적 자아를 불살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뿐이었다. 영혼 대 영혼으로서 암릿과 나의 공통점은 그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에게서 해방되겠노라는 결의 말이다. 

 나는 암릿이 겪고 있는 경험을 타자화하지 않았다. 외부세계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내면에서는 과연 아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나도 함께 탐색해보고 싶었다. "매사에는 철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나니"라는 솔로몬 왕의 지혜가 생각났다.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승인 암릿을 알게 되어 큰 영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큰 어둠의 시기를 지나갈 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큰 어둠의 시기가 그를 통과해 지나갈 때 그의 곁에 있어서 더욱 영광이었다. 그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으며 낙담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더욱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을 내맡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어나는 그대로의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용해 개인적인 자아를 내려놓는 편이 낫다."

  

                                           <될일은 된다> (마이클 싱어, 김정은 옮김,정신세계사) 


서구에서 크리팔루 요가를 전파하며 요가의 선구자로 존경받던 인도의 요기 암릿 데자이는 1698년 금욕과 불음을 선포하며 자신의 공동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1994년 적어도 자신의  여성 신도 세 명과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밝혀져 자신이 세운 공동체를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이전부터 명상 수행으로 인연을 맺은 마이클 싱어의 도움으로 싱어의 땅 위에서 거주하게 된다. 위의 장면은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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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지음, 박산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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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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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음식, 죽은 음식 -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을 먹도록 설계된 동물인가
더글라스 그라함 지음, 김진영 외 옮김 / 사이몬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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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테리언 권장서. 06년 책인데 지금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아마 출판사가 이쪽 책만 전문으로 내는 것 같은데 검증은 한 번 해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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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일은 된다 - 내맡기기 실험이 불러온 엄청난 성공과 깨달음
마이클 A. 싱어 지음, 김정은 옮김 / 정신세계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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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건 우주의 사인인가, 아니면 잘못된 교통정책, 미진한 운전자 교육, 후진적인 교통문화의 결과인가?  예전에 도올이 삶에는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있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당한 교통사고에는 어느 정도의 필연성과 우연성이 함께 섞여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나는 어떤 의미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까. 책의 원제인 “항복 실험”처럼 마이클 싱어는 자신의 앞에 던져진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자신의 의지를 발휘했다. 그의 원칙은 “자신의 호오 대신 자신의 앞에 던져진 사건을 수용한다”이다. 그에게 교통사고는 우주가 던져준 것이며 후진적인 교통문화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붓다로부터 시작한다. 예전에 템플스테이에서 주지스님이 농담삼아 말했듯이 부처님 덕에 도대체 몇 명이 먹고사는 건가. 마이클 싱어의 출발은 “자신의 머릿속 소리”의 자각으로부터다. 이미 가깝게는 에크로하르트 톨레나 멀리는 라즈니쉬가 언급했던 “에고”의 자각이다. 아마 “지금 내가 느끼는 자기 자신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라는 무아의 이론을 처음 언급한 이가 붓다일 것이다. 이 이론의 내가 접한 최근 버전은 “나는 의식이고 빛이고 존재이다.”이다. 일본의 전직 옴진리교 신자가 말했듯 “옴진리교는 자기를 버리라고 했지만, 불교가 말하는 것은 진짜 자기를 찾으라는”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 중) 즉 자신의 머릿속 재잘거림에 지친 저자는 “선의 세 기둥”이라는 책을 통해 명상과 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어찌나 에고의 목소리에 지쳤던지 저자에게 명상과 요가는 이내 삶의 의미로까지 발전한다. 그 때 저자가 깨달은 점 하나, 에고의 특징은 욕망과 두려움이라는 것, 즉 머릿 속 목소리가 말하는 것 대부분은 개인적인 호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항복 실험”을 시작한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의 상황을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받아들이는 것, 예를 들면 자기가 싫어하는 업무를 떠맡고, 배운 적도 없는 건축이나 컴퓨터프로그래밍에 도전하고, 회사를 합병하고 상장시키는 식이다. 저자는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삶의 순간을 수용하자 삶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해탈을 찾아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플로리다의 숲에서 자연인처럼 살던 요기가 명상공동체 운영자, 건축업자, 프로그래머, 상장회사 최고경영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애기인데 저자의 얘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매끈해서 꽤 재미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저자가 에고를 자각하고 명상 체험을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만약 명상이나 요가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이 꽤 재미있게 다가올 것이다. 저자의 체험은 요가난다, 바바 묵타난다 등 인도 출신의 구루들과 맞닿아 있다. 즉 미국에 인도의 구루들이 소개되던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내가 알기론 불교에서는 차크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일전에 고엔카 명상센터에 가 본적이 있는데 고엔카 코스에서는 그런 신비적인 색채가 없다. 존 콜먼 같은 구루도 오로지 감각관찰과 자비 명상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인도출신의 구루들은 차크라니 에너지니 하는 얘기를 하는데 저자의 명상 체험은 이 쪽과 맞닿아 있다. (이 쪽은 힌두교 계통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힌두교는 아트만 같은거 말하지 않나? 그건 무아와는 상관없는데?) 어쨌든 저자의 평생의 목표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었고 그 방편이 “항복 실험”이었다. 이 후 책의 전개는 이 항복실험 덕에 저자가 상장기업의 최고경영자로 한 몫 챙기는(?) 내용이다. 여기서 약간 헷갈리기 시작하는 데 이 책이 묘하게 자기계발서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원래 한국에서 이 쪽 장르의 선구자라면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티일 것이다 최근에는 이 장르가 묘하게 자기계발장르처럼 되는 것 같다. 붓다의 지혜를 접한 서구인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백가쟁명이랄까, 이 쯤 되면 서서히 옥석논쟁이 나올 법도 싶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아마 자신의 삶의 나침반을 찾거나 삶에 불만족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독자에게 관건은 항복 실험이 과연 자기에게도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과연 싱어가 철저하게 항복실험을 한 것일까?  싱어는 결국 그래도 자신의 호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내에서만 항복한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싱어는 처음 학교에서의 강의제의는 수용하지만 두 번째 전임 제의는 거부한다. 그 때는 건축업자 일이 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항복실험을 자신의 삶에 직접 적용하려는 불쌍한 중생들은 과연 이 방법이 약효가 있는지, 진짜 “수용”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른 쪽이라면 과연 삶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마이클 싱어가 학교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생을 가르치게 된게 우주의 의지였는지?(싱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면 단지 멍청한 교직원의 실수 때문이었는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를 수용할지 말지가 결판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의문은 지엽적인 건지도 모른다. 싱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선과 관련한 일화의 현대 버전인지도 모른다.    


“옛날 한 마을에 존경받는 선사가 있었다. 그런데 마을의 한 처녀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낳았고, 처녀의 아버지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추궁했다. 처녀는 존경받고 있는 선사가 아버지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이를 선사에게 데리고 가 당신 아이라고 하며 선사를 비웃었다. 그 말을 들은 선사는 딱 한 마디 했다 

 

”호, 그런가?“


그리고는 아이를 거둬 키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선사를 멸시하기 시작했고, 존경받던 선사는 거지처럼 마을을 떠돌며 아이를 키웠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처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이웃의 총각이라고 실토했고, 놀란 처녀의 아버지는 선사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그리고, 선사에게 아이를 돌려 달라고 했다. 선사는 아이를 내 주며 딱 한 마디 했다. 


“호,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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