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일은 된다 - 내맡기기 실험이 불러온 엄청난 성공과 깨달음
마이클 A. 싱어 지음, 김정은 옮김 / 정신세계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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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건 우주의 사인인가, 아니면 잘못된 교통정책, 미진한 운전자 교육, 후진적인 교통문화의 결과인가?  예전에 도올이 삶에는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있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당한 교통사고에는 어느 정도의 필연성과 우연성이 함께 섞여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나는 어떤 의미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까. 책의 원제인 “항복 실험”처럼 마이클 싱어는 자신의 앞에 던져진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자신의 의지를 발휘했다. 그의 원칙은 “자신의 호오 대신 자신의 앞에 던져진 사건을 수용한다”이다. 그에게 교통사고는 우주가 던져준 것이며 후진적인 교통문화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붓다로부터 시작한다. 예전에 템플스테이에서 주지스님이 농담삼아 말했듯이 부처님 덕에 도대체 몇 명이 먹고사는 건가. 마이클 싱어의 출발은 “자신의 머릿속 소리”의 자각으로부터다. 이미 가깝게는 에크로하르트 톨레나 멀리는 라즈니쉬가 언급했던 “에고”의 자각이다. 아마 “지금 내가 느끼는 자기 자신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라는 무아의 이론을 처음 언급한 이가 붓다일 것이다. 이 이론의 내가 접한 최근 버전은 “나는 의식이고 빛이고 존재이다.”이다. 일본의 전직 옴진리교 신자가 말했듯 “옴진리교는 자기를 버리라고 했지만, 불교가 말하는 것은 진짜 자기를 찾으라는”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 중) 즉 자신의 머릿속 재잘거림에 지친 저자는 “선의 세 기둥”이라는 책을 통해 명상과 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어찌나 에고의 목소리에 지쳤던지 저자에게 명상과 요가는 이내 삶의 의미로까지 발전한다. 그 때 저자가 깨달은 점 하나, 에고의 특징은 욕망과 두려움이라는 것, 즉 머릿 속 목소리가 말하는 것 대부분은 개인적인 호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항복 실험”을 시작한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의 상황을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받아들이는 것, 예를 들면 자기가 싫어하는 업무를 떠맡고, 배운 적도 없는 건축이나 컴퓨터프로그래밍에 도전하고, 회사를 합병하고 상장시키는 식이다. 저자는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삶의 순간을 수용하자 삶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해탈을 찾아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플로리다의 숲에서 자연인처럼 살던 요기가 명상공동체 운영자, 건축업자, 프로그래머, 상장회사 최고경영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애기인데 저자의 얘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매끈해서 꽤 재미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저자가 에고를 자각하고 명상 체험을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만약 명상이나 요가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이 꽤 재미있게 다가올 것이다. 저자의 체험은 요가난다, 바바 묵타난다 등 인도 출신의 구루들과 맞닿아 있다. 즉 미국에 인도의 구루들이 소개되던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내가 알기론 불교에서는 차크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일전에 고엔카 명상센터에 가 본적이 있는데 고엔카 코스에서는 그런 신비적인 색채가 없다. 존 콜먼 같은 구루도 오로지 감각관찰과 자비 명상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인도출신의 구루들은 차크라니 에너지니 하는 얘기를 하는데 저자의 명상 체험은 이 쪽과 맞닿아 있다. (이 쪽은 힌두교 계통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힌두교는 아트만 같은거 말하지 않나? 그건 무아와는 상관없는데?) 어쨌든 저자의 평생의 목표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었고 그 방편이 “항복 실험”이었다. 이 후 책의 전개는 이 항복실험 덕에 저자가 상장기업의 최고경영자로 한 몫 챙기는(?) 내용이다. 여기서 약간 헷갈리기 시작하는 데 이 책이 묘하게 자기계발서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원래 한국에서 이 쪽 장르의 선구자라면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티일 것이다 최근에는 이 장르가 묘하게 자기계발장르처럼 되는 것 같다. 붓다의 지혜를 접한 서구인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백가쟁명이랄까, 이 쯤 되면 서서히 옥석논쟁이 나올 법도 싶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아마 자신의 삶의 나침반을 찾거나 삶에 불만족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독자에게 관건은 항복 실험이 과연 자기에게도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과연 싱어가 철저하게 항복실험을 한 것일까?  싱어는 결국 그래도 자신의 호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내에서만 항복한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싱어는 처음 학교에서의 강의제의는 수용하지만 두 번째 전임 제의는 거부한다. 그 때는 건축업자 일이 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항복실험을 자신의 삶에 직접 적용하려는 불쌍한 중생들은 과연 이 방법이 약효가 있는지, 진짜 “수용”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른 쪽이라면 과연 삶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마이클 싱어가 학교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생을 가르치게 된게 우주의 의지였는지?(싱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면 단지 멍청한 교직원의 실수 때문이었는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를 수용할지 말지가 결판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의문은 지엽적인 건지도 모른다. 싱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선과 관련한 일화의 현대 버전인지도 모른다.    


“옛날 한 마을에 존경받는 선사가 있었다. 그런데 마을의 한 처녀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낳았고, 처녀의 아버지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추궁했다. 처녀는 존경받고 있는 선사가 아버지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이를 선사에게 데리고 가 당신 아이라고 하며 선사를 비웃었다. 그 말을 들은 선사는 딱 한 마디 했다 

 

”호, 그런가?“


그리고는 아이를 거둬 키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선사를 멸시하기 시작했고, 존경받던 선사는 거지처럼 마을을 떠돌며 아이를 키웠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처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이웃의 총각이라고 실토했고, 놀란 처녀의 아버지는 선사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그리고, 선사에게 아이를 돌려 달라고 했다. 선사는 아이를 내 주며 딱 한 마디 했다. 


“호,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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