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난 크룩스가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두시오

냉정한 어투였다.

당신은 흑인 방에 들어와선 안 됩니다. 당신에겐 여길 침해할 권리가 없어요. , 나가주시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주인께 애기해서 다음부턴 당신이 헛간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할 거요."

여자는 경멸하는 태도로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잘 들어요, 검둥이"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면 내가 어떤 복수를 할지는 알고 있겠지?"

크룩스는 절망적인 얼굴로 여자를 쏘아보다가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어떻게 할지 알겠어?"

몸을 더욱 작게 움츠리며 크룩스는 벽에 바짝 달라붙었다.

"압니다.“

"그래야지.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해. 당신 같은 검둥이 하나쯤 나무에 매다는 건 너무 쉬워서 재미도 없을 거야. 농담이 아니야.”

크룩스에게는 자기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인격도, 자아도 좋고 싫음을 표현할 능력조차도 없는.

",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양조차 없었다.

여자는 다시 한번 채찍질을 하려고 그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크룩스는 꼼짝않고 앉아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반항의 기미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다 결국 무력해지는 크룩스의 모습에서 그의 절망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야 했다. 학교에서 배운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말은 전부 번드르르한 헛소리라는 걸. 나에게 그걸 가르친 어른들은 본인들도 그걸 믿지 않는다는 걸. 아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선생들이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는 거 질리도록 봤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상상을 초월하던 걸? 가진거 다 내놔하고 헤어지면서 잠깐 신발도 벗어, 하는 격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면 왜 옷이 젖었어 하고 따지는 식이었다. 차별과 억압, 계급은 인류역사 내내를 지배해왔고, 지금껏 자유로운 인간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아우슈비츠 여주인이 하녀에게 너 같은 건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릴수 있어, 라고 말하는 대목과 여자의 말은 겹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회사 사장들은 이런 생각패턴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나? 상사 앞에서 마음 속 울분을 숨기고 웃는 얼굴을 가장해 본 적은? 놀아 줘, 놀아 줘하는 회사 임원들을 상대해본 적은 없나? 이 정도면 나는 좋은 상사지, 그래도 내 기분은 맞춰하는 상사는? 그럼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착각한다. 노예주제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돼지 같은 걸음걸이로 출근하고, 퇴근 후면 반은 멍한 상태로 하사하신 짜투리 시간을 황송해하며 그래도 노숙자보다는 낫잖아 하고 안심하는 나는. 아마도 나에게 야근거리를 던져주며 어쩔 수 없지?” 하고 빙글거리던 상사도 아래의 여자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소.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질 않소? 당신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 우리가 부랑배가 아니라는 걸 당신같이 멍청한 여자가 알 리 없지. 당신이 우릴 내쫓으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요. 당신은 우리가 여길 떠나더라도 또 이런 지저분한 일자리를 구할 거라 생각하겠지. 당신은 우리가 농장과 집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라. 우린 여기 머물지 않을거요. 여기보다 백 배는 아름다운 땅과 집과 닭과 과일나무를 가지게 될 거니까. 그리고 친구들도 있지. 여기서 내쫓기는 걸 겁낸 적도 있었지만, 이젠 두렵지 않소. 우리 땅을 사서 그곳에 가서 살면 되니까."

"거짓말!"

여자는 비웃듯 대꾸했다.

"난 당신 같은 작자들을 숱하게 봤어요. 당신들은 25센트만 손에 쥐어도 싸구려 위스키 두 잔에 코를 박고 술잔 밑바닥까지 할아대는 족속들이죠. 난 당신 같은 인간들을 잘 알아요.“


조지와 레니, 캔디가 꿈꾸는 것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이다.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했을 삶이다.


"밭에다가는 온갖 채소를 다 심는 거야. 위스키를 마시고 싶으면 달걀이나 우유 따위를 내다 팔면 되지. 우린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거야. 아주 그곳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지.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일본인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어. 그래, 우린 우리가 사는 땅의 주인이 되는 거야. 더 이상 노무자 합숙소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게 된다구."

 

"그래. 우리는 우리들 자신만을 위한 작은 집과 방을 가지게 될거야. 겨울이면 작고 통통한 놋쇠 난로에다 불을 지피지. 그다지 넓은 땅은 아니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야 해. 하루에 6시간이나 7시간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쨌든 하루 11시간씩 보리 일을 할필요는 없어. 농사를 지어놓으면 당연히 추수를 하게 되겠지. 우리는 수확량이 얼마나 될지 미리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그 모든 게 우리 것이니 아무도 우리를 내쫓을 수 없어. 우리들 비위에 거슬리는 녀석이 있으면 빌어먹을 자식, 나가버려', 그 한마디로 족하지. 그럼 그 녀석은 나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친구가 찾아오면 우리에겐 남는 방이 있으니까 하룻밤 자고가길 권할 수도 있지. 그럼 그는 자고 가는 거야. 그밖에 세터사냥개 한 마리와 줄무늬 고양이 두 마리를 기르게 될 거니까, 고양이가 토끼들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망을 잘 봐야 해."

 

조지는 감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든지, 서커스가 오든지, 야구 시합이 있든지, 그밖에 무슨 일이 있으면…………."

 

캔디 노인이 찬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조지가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도 물어볼 필요가 없어. '구경이나 가지' 라는 한마디로 우린 거리에 나갈 수 있다구. 우유를 짜고 닭 모이를 던져주고 나서 우린 구경을 하러 나가는 거야.“


하지만, 사방이 막혀 있고 길은 없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어떤 날이 될지가 너무도 명백하게 보이고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야망계급론>(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오월의봄) 에서 저자는 계급간의 소비행태에 주목한다. 상류층이 계급을 고착시키는 교육이라는 가치재에 자신들의 자원을 투자한다면, 다른 계층은 돈이 생기면 신형 아이폰같은 소확행에 집중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교육이라는 가치재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싸서 글자 그대로 다른 우주에서나 꿈꿀 수 있는 소비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속한 계층을 벗어나지 못한다. 조지와 레니, 캔디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품삯으로 받은 50달러로 할 수 있는 일은 색시집에서 뒹글거나 노름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분노는 있는 걸까? 소설의 마지막 대사는 화가 나 있는 건가?“ 라는 물음으로 끝난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는 걸까?

 















ps <생쥐와 인간>을 읽게 된 것은 필립 k 딕의 추천 덕이다. <생쥐와 인간> 같은 소설이야 말로 진짜 소설이라고,,, (아마도 <필립 k.딕의 말>(필립 K.딕,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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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이르러 거티는 그저 자기 자신이 되고 정직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따랐더라면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을 - P202

이해한다. 그렇게 했다면 틀림없이 농장 소유주가 되고 가족들에둘러싸여 살면서 자신이 상상했던 조각상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그녀는 농장에 그대로 머물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자기 파괴적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남편조차도 그녀가 그를 믿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면 그녀를 지원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자신의 여행을 신뢰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단순히 여성의 역할에는 희생이 필요하고 가난한 사람은 재능을 키우기 힘들다는 구시대적인 관념을 지적한 것이라고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라도 거티와 같은 모습이 내면에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대개 우리는 극적인 불행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덕을 가장한 자기 배반적인 행동을 계속하면서 진짜가 아닌 삶이 쌓여 가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 P203

거티의 삶이 보여 주듯이 종종 우리의 진정한 삶을 가장 좌절시키는 사람은 부모, 연인, 배우자, 아이들이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그들을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여기에서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 알게 해 주는 거울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웅의 소명을 따르다보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방종과 자기애를 진정한소명과 혼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말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 P203

도덕성은 종종 비겁함을 감추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 계율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그 계율을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진정 무엇을 생각하는지 탐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성공이나 깨달음을 약속하는책들처럼 손쉽게 정답을 제공하는 것들에 추종자들이 몰리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전통적인 성역할과 노동 분담에집착한다. 사회에서 부여해 준 그 가짜 정체성을 따르기만 하면 굳이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여행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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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자네도 알겠지. 자네에게는 조지가 있어. 그리고 그자가돌아올 것이라는 걸 자넨 알고 있지. 자네에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보게. 자네가 검둥이이기 때문에 숙소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카드 놀이에 끼지 못한다고 한번 가정해보라구. 어두워질 때까지는 말굽쇠 놀이를 할 수 있지만, 그 뒤로는 그저 책이나 읽을도리밖에 없지. 그럴 땐 책도 다 쓸모 없어. 사람에겐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필요해. 가까이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구."
그의 말은 슬픈 어조로 바뀌었다.
"곁에 가까운 이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바보가 되지. 같이 있는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그저 같이 있어만주면 되는 거야‘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지나치게 고독한 사람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어."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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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컬트영화의 아이콘 <이레이저헤드>를 봤다... 그런데.. 노동영화에다 계급영화, 사회파영화였다.. 데이비드 린치가 이렇게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였을 줄이야..  물론 구역질나고 기괴한 장면이 있긴 하지만,, 이 쯤이야... 80년대 에이리언 보는 것 정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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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후 20대 여성관객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나간다. 뭐 충분히 이해한다. 수십년전 종로의 <코아아트홀>에서 <애정만세>를 처음 봤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어떤 영화는 스토리,배우의 연기를 볼게 아니라  한 편의 그림을 감상하듯 장면장면을 봐라봐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알 것같다. 헤밍웨이가 단 몇 개의 단어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듯이 <안녕, 용문객잔>에서 채명량은 단 몇 개의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물론 <애정만세>처럼 퀴어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건 이 영화의 어쩌면 진정한 주인공인 '복화영화관'이다.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전, 머리가 허연 아저씨들이 영화관 로비 구석에서 "글쎄 이 영화 감독이 아직 20대라는구먼"하고 잡담을 주고받던 영화관이다.(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낡은 복도와 촌스런 붉은 스폰지로 마감한 출입문, 겨우 깨끗하다는 구색을 맞춘 화장실, 벽 한쪽에 위태하게 달려있는 인터폰.. 거기에 스며든 수많은 순간들과 사연들.. 이 영화는 글자 그대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보길 권한다. 장면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큰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하이퍼텍나다와  동숭씨네마텍, 코아아트홀 그리고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극장들, 그 시절 이후로다시 작은 영화관 지도를 그렸다. 신촌에 모여있는 에무시네와, 아트하우스 모모, 필름포럼 좀 멀리로는 여전히 꿋꿋한 씨네큐브, 아트나인,씨네필영화관 등이다. 의외로 예전보다 상영되는 프로그램들은 더 풍성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포스터까지 준다!. 얼마전에 에무시네마에서 <중경삼림>을 봤는데 요새 왕가위가 힙한지 젊은이들로 꽉 찬 객석을 보며 애네들한테 이 영화가 어떤 정서로 다가올지 궁금했다. 물론 다시 본 왕가위는 여전히 쿨하고 스타일이 넘쳤다. 이번에 <안녕, 용문객잔>을 보며 영화는 현대의 신화가 아닐까 하는 감정이 들었다. <중경삼림>의 다리미로 주름살을 편 듯한 임청하, 금성무,양조위, 왕정문, 영원할 것 같은 젊음과 넘치는 에너지들.. 영화가 상영될 때 마다 그들은 영겁의 삶을 산다. 깔깔대고 소리지르고 사랑을 한다. 복화영화관에서 흘러간 '용문객잔'을 보는 관객들. 그리고, 그만큼 흐른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관.. 그리고, 나는 20년전 영화를 보며 영화속 풍경을 다시 재현하고 있었다. 양귀매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이강생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같았다. 복화영화관의 불켜진 텅빈 객석은 마치 신화가 상영되는 제단처럼 보였다.  영화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난 마치 이강생이 된 기분이었다. 아마도 작고 누추한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담배를 피겠지. 구석의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실지도 모른다. 한켠의 작은 TV에서는 싸구려 삼류 쇼의 웃음소리가 조그맣게 울릴 것이다. 영화는 신화다. 그리고 영화관은 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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