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순간에는 얼마나 많은 필연과 우연이 겹쳐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나는 과정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만약 상사가 아프지 않아서 토마스가 왕진을 가지 않았다면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그 호텔에 묵지 않았더라면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그 호텔에 딸린 그 술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 따져보니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나기까지 대충 대여섯개의 우연이 겹쳐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정도의 우연이 겹쳐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났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필연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은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무겁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우주의 탄생 이래 수많은 인과들이 있었을 것이고, 하찮게 여겨지는 무심한 일상의 순간도 그 수많은 인과들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중 한두 가지의 인과만을 가지고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렇게 우주적 차원으로 조감도를 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더 숭고하게 느껴지고, 그런 순간 앞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진다. 더 나아가, ‘나의 탄생’을 두고 비슷한 성찰을 하지만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는 두 가지 책이 있다.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스티븐 배철러,궁리) 은 한 영국인의 불교수행편력기이다. 저자의 수행 여정은 달라이라마 친견부터 시작해 티벳 라마승 생활을 거쳐 다시 환속하기까지에 이르는데 그중에는 전두환 정권 아래의 송광사도 있다. 저자는 불교의 주요주제인 ‘연기’를 고찰하는 대목에서 말한다.
“동시에 대단히 불안하게 만들었던 내 어린 시절 기억 중 하나는 어머니가 무심코 ‘나'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확실성을 시험대에 올렸던 일과 관련이 있다. 때는 크리스마스였고, 나는 아마도 열여섯 살쯤 되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베티 이모가 식탁에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군복을 입은 어떤 남자-사막의 태양에 눈은 찡그리고 파이프를 이로 꽉 물고 있는-의 스냅 사진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 일이 다르게 풀렸다면 이 사람이 네 아버지가 되었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면 내가 나일 수 있었을까? 이것이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나의 실제 아버지의 수많은 정자 중 다른 것이 어머니의 난자와 수정되었다면 그 염색체 혼합에서 태어난 아이가 나였을까? 만일 바로 그 동일한 정자가 어머니의 다음번 난소 주기에 파고 들어갔다 해도 과연 그 아기가 나였을까?”
이 대목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과 근본적 자아에 대한 믿음의 허구성,그런 자아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성찰한다. 여기서 자아는 우리를 속이는-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환상이다. 우리는 이런 환상에 속아 자아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린다.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무라카미 하루키,김영사)에서 개인의 의미는 비슷한 성찰을 하지만 사뭇 다른 결론으로 나아간다. 책은 거의 소책자나 ‘문건’에 가까운, 하루키의 사적인 인생사를 담은 글이지만 전부 하루키의 실제 경험이고-아마 작가 하루키의 가장 골수를 이루는 경험일 것이다-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 묘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하루키와 아버지의 관계가 눈에 띄는데 세계적인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20여년 넘게 의절 비슷한 것을 하고,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야 어색한 화해를 했다는 사실이- 연도를 계산해보면 하루키도 중년의 나이였을 때다. 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기이하게 느껴진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그렇게 생각해 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나라는 개체가 지닌 의미가, 점차 모호해진다. 손바닥이 비쳐 보인다 한들 이상할게 없다. ”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 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해도.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우연 혹은 환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부여되어져야 한다는, 우연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는 어째 애잔한 느낌의 지극히 소설가적이고 소설가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통찰이다. 자아를 바다에 뿌려지는 빗방울에 비유하는 것은 불교나 힌두교 같은 전통에서 곧잘 등장하는데 하루키가 승려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비유에 익숙한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하루키가 소설을 쓰게 하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곧 사라질 물방울에게-사라지기 때문에 그 물방울을 최대한 애도하고 추념해주는 것. 마치 어떤 책 제목처럼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쿤데라의 소설을 읽고 난 뒤 결국 결과론적인 관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즉 어떤 일이 발생한 후 사후에 과거를 반추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완벽한 무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이상, 그 존재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떤 사건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발생한 후 시간을 전제로 해서 과거의 인과를 찾다보니 이런 관점이 나오는 거 아닐까, 현재의 순간은 우연, 필연을 따질 거 없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투박하고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같은 통찰을 가지고 다른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흥미롭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