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폴란은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조엘 샐러틴의 농장이 자급자족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tv도 없고 홈스쿨링 교육을 하고 먹을 것도 직접 기르기 때문이었죠.

조엘 샐러틴은 딱히 반문명주의자거나 반자본주의자는 아닙니다. 단지 순환방목을 통해 자신의 목장을 유지해 나가는 농부입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주로 거대식품산업이나 무늬만 유기농인 <유기농제국>, 미국 연방정부 정도 입니다.(세금내는 걸 엄청 싫어해요. 어떤 면에선 희한하게 무정부주의자인 셈이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자본주의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의 기묘한 동거라고나 할까요.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의 생활방식이 자급자족의 양상을 띄는 것은 아마 그의 농장운영 방식과 관련이 깊을 겁니다. 다품종소량재배를 하다보니 지역밀착형으로 판매를 할 수 밖에 없고 지역경제에 근거한 공동체를 추구하다보니 자연 생활방식도 그에 따라 가는 거겠죠.

 

그런데 자급자족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밟히더군요.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도 이 단어를 유난히 좋아하는 분이 계시거든요. 바로 "고맙다 잡초야"를 쓴 황대권 씨입니다. 이 분이 가끔 쓰는 칼럼을 보면 필자 소개에 <야생초 편지 저자>라고 나옵니다. 얼마나 좋은 책이길래 저자 소개를 이렇게 하나 생각했는데(전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고맙다 잡초야"는 이 책의 속편 쯤 됩니다. 환경과 문명에 대한 철학과 명상, 농촌 생활에서 생기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짧은 호흡으로 쓴 책입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심란 할 때 읽을 만 합니다. 저자가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들려주는 농촌 에피소드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은 활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처음에 왜 귀농을 결심했는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야생초 편지에 있을 것 같네요) 그 이유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지금껏 자연에 개입해서 잘 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군요. (하긴 자도 처음 외국여행에 가서 느낀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은 대부분 별볼일 없다"였습니다만) 저자는 현대의 인간들이 "사육당한다" 고 표현합니다. 비닐하우스 속 식물들처럼 편안하지만 제 본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자본가에게 맡겨버린다고 말입니다.그리고 자본가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스펙경쟁에 몰입한다고 말합니다.  이 분은 조엘 샐러틴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반대합니다. 자본가가 구축한 판매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니까요. 자급자족을 좋아하시는 것도 이런 맥락이겠죠.

그리고 자급자족을 위해선 여러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빠빠라기"에서 무슨무슨 부족 추장이 현대의 직업이라는 개념을 비판한게 기억나는 군요. 대충 비판의 요지는 직업이 인간을 파편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집을 지을 줄도 알아야 하고 고기를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정말 두 가지를 잘할 수 있을 까요? 슈마허식의 '적정기술"이나 "중간기술"이 등장하는 게 이런 맥락이겠죠. 지나친 전문화를 줄이고 대량생산을 피하는 것 . 이런 상황이라면 어찌 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대신 국영수는 사라지겠지만요)

 

근데 애덤 스미스가 바늘공장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전부 이런 적정기술(?) 아니었을까요. 그게 싫으니까, 부적정(?)하니까 분업을 통한 생산량증가와 효울성 달성을 말한 것일텐데요.  그 때는 분업과 전문화가 진보와 혁명을 의미했을 텐데 지금은 다시 자급자족의 삶을 애기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은 바다가 좋은지도 모르고 바다없는 자신의 삶을 별 불만없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겔쓰리없이도 우리가 별 탈 없이 살았던 것 처럼요. 그런 때 황대권 아저씨 같은 분이 나타나서 바다가, 겔쓰리가 이렇게 좋은 거라고 알려주는 게 이런 분들의 사명이겠죠. (불경하게 말하면 이브의 뱀처럼?) 부디 아저씨가 자신의 이상을 이루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아저씨는 이 때다 하고 다시 조근조근한 어조로 농촌에피소들 늘어놓을 겁니다. 그리고,그걸 읽은 누군가는 용기를 얻어 아저씨의 뒤를 따를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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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동안의 거짓말 - 식품과 약이 어떻게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가?
랜덜 피츠제럴드 지음, 신현승 옮김, 김양중 감수 / 시공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겨울에 읽지 마세요. 한여름에 읽어 보세요 소름이 오싹 끼쳐요 피서에 제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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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농부의 순전한 기쁨
조엘 샐러틴 지음, 유영훈 옮김, 방원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할 말이 많다. 불만도 많다. 확신은 넘친다. 마이클 무어가 농촌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이런 모양새가 아닐까. 조엘 샐러틴의 주장은  크게 두자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생산자의 측면과 소비자의 측면에서이다.

 

생산자의 측면에서 그는 거대 식품산업을 비판한다. (마이클 폴란의 말을 빌면 "산업적 음식 사슬" 쯤 된다.) 식품 산업이 환경을 파괴하고 식품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환경"이나 "자연", "식품"에 대한 정의가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산업화에 근거해 기계화,표준화,단일화 등을 이룬 식품산업은 자연을 개별 단위로 구획하고,대량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달성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구두약보다 싼 음식(더 이상 먹을 게 없다 중)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조엘 샐러틴이나 마이클 폴란은 여기에 숨은 비용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파괴를 보전하기 위한 납세자의 비용이나 생물다양성 상실 등이 그것이다. 반면 조엘 샐러틴은 자연의 유기적인 상호관계와 다양성을 따라 농장을 운영한다. 자연의 싸이클을 따르기 때문에 환경파괴 없이 지속적으로 질 좋은 음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더불어 자본의 착취도 피할 수 있다.

 

유기농농부로 시작했다가 제너럴밀스의 부사장이 된 진 칸의 말처럼 "그래봐야 이건 음식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음식을 소비하는 방식에 따라 전체적인 사회구조가 바뀐다. 식품산업에서 이윤을 얻으려면 대량생산으로 비용을 절감하면서 대량소비가 필요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무역을 통한 "세계화"가 필수다. 또한 대량생산에는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국적기업이 등장하게 된다. 거대한 자금력을 가진 다국적기업이 대량생산을 주도하고 지역 소농을 병합한다.(책에는 닭 파는 타이슨푸드와 농부와의 관계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 깔린 것은 언젠가 없어질 값싼 석유에너지의 사용과 대량생산에 걸맞게 동식물을 개조하는 것이다.전국적인 규격화를 위해 정부의 전체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고, 아르헨티나의 물품을 미국인이 소비하기 때문에 상품을 매개로만 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가 필요해진다. 반대로, 조엘 샐러틴은 4시간 이상 거리가 걸리는 곳에는 고기를 팔지 않는다.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고 산업식품사슬에 동조하는 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다품종 소량재배는 철저히 지역밀착형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밀착형 관계를 중시하며 공동체를 중시한다.(호모 코뮤니타스를 쓴 고미숙씨가 생각난다) 정부의 규제는 짐이 되기 때문에 그는 공무원을 엄청 싫어한다.

 

나라면 폴리페이스 농장에 한표 던지겠다. 하지만, 몇 가지가 걸린다.

사료를 먹인 닭과 방목해서 소똥 속의 지렁이를 잡아먹으며 큰 닭 중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좋을

까? 나는 지렁이를 먹은 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걸 지저분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조엘 샐러틴은 시종일관 공장식 사육을 공격한다. 동물들을 불행하게 하고, 불결하다는 것이다. 공장식사육의 불결함을 막기 위해 닭에게 항생제를 먹이고 돼지 꼬리를 자른다. 여기에 항생제생산회사나 사료생산회사 등이 얽히면서 판이 커지게 된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샐러틴의 닭들이 야생의 새들과 어울리면서 조류독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공장식사육이 동물을 안전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과 동물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주장도 비슷한 대립이다.

 

박이문 교수님의 철학에세이에서 이런 뜻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한 문장은 잊어버렸지만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결국엔 인위적인 것이다"라는 것이다. 한참 안드로메다로 가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떠올려보자. 온몸이 사이보그이고 뇌의 일부만이 인간인 상황에서 구사나기 소령은 마지막에 인형사와 결합해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진화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데카르트적 의미도 있지만, 글자 그대로 물리적인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 만약 인간인 구사나기가 자동차를 타면서 그 자동차와 기계적으로 완전히 결합한다면 자동차도 구사나기일까? 과연 어디까지를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 샐러틴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자신의 농장이 자연의 순환을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애기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샐러틴만큼의 확신을 가지진 못하겠다. NPK 농법도 처음 등장했을 때 방향은 다르지만, 샐러틴 류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럼 면에서 마이클 폴란은 훨씬 신중했디.( 우리가 이 음식 사슬을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잡식동물의 딜레마" 중)

 

생명은 샐러틴의 말대로 대량화, 산업화 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예전의 통큰치킨 논란이 생각난다. 닭 한마리에 몇 천원,몇천원하던 그 때 나에게 떠오른 건 닭은 닭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품으로서만 길러진 생명은 아마 먹기에 부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처럼 고기를 실험실에서 배양해서 먹는 시대가 온다면 나는 어떻게 이걸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이 책에서는 이미 단지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소,닭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품종교배를 통해 태어났다. 단지 성장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 갉아먹도록 태어날 때 부터 프로그램되어 있다. 이미 "자연"은 어느정도 변화한 것 아닐까?

 

이제 소비자의 측면에서 보자. 샐러틴은 엉터리 음식을 먹는 소비자 때문에 우리 농업이 이런건지, 우리 농업이 엉터리라서 소비자들이 엉터리음식을 찾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자신의 달걀을 돈 때문에 못 먹는게 아니라 음식 자체를 비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순위라는 표현을 쓴다) 가공식품의 영향은 장기적이어서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글쎄, 그러면 인과관계가 없는 거 아닌가?  나라면 첨가물이 범벅된 음식을 먹진 않겠지만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까? 가공식품은 마치 담배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막연히 의심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이미 일상에 스며들어 사람들은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인지하지 못한다.가격애기를 할 때 샐러틴은 약간 어그러진다. 소비자한테는 제 값주고 사 먹으라고 하면서, 돈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하면서 농부의 소득을 말할 때는 소득이 너무 낮다고 탄식한다. 물론 나 역시 소득문제 때문에 귀농이 망설여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읽다보면 오히려 절망감이 드는게 사실이다. 미국의 농촌문제과 한국의 농촌문제가 놀랄 정도로 흡사하기 때문이다. 인구감소, 인재유출,저소득 등... 미국조차 어쩔 수 없구나하는) 자신이 자본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는 없으면 없을 수록 좋은 존재리고 하지만 식품산업을 등장시킨 것이 자본주의였다.

 

10여년 전에 읽은책에 <더 이상 먹을 게 없다>라는 책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마이클 폴란이나 조엘 샐러틴이 제기한 문제가 이미 그 책에 제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오염은 전방위적이며 공장식 생산은 부적절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산업화로 나간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과자에서 황색1호니 ,2호니 하는 문구를 본 기억이 있지만, 요즘은 정말 음식의 "UN 로테이션"이다.(이 말은 박찬호가 뛰던 다저스 선발진을 가리키던 말이다) 한번 라면봉지의 구성성분을 보라. 미국산부터 시작해서 칠레산, 페루산..... 우리집의 들깨는 인도산이다. 예전에 맥도날드는 음식을 조리하는게 아니라 조립한다고 비판받았는데 요새는 일반 음식점이라고 해서 얼마나 다를까 싶다. 무려 10년 동안 나빠진게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p.s. : 책을 출판해준 출판사에게 고맙다. 하지만, 책 만듦새가 오버해서 고급스러운 것 같다. 굳이 두꺼운 종이를 쓸 필요가 있을까. 줄 간격이 커서 보기에 편하긴 하지만 살짝 오바에다 책은 더 무거워 졌다. 참고로 책 겉표지에 나온 사람은 조엘 샐러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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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사랑..... 노부부의 대화를 보면 마치 아직도 연애 중인 것 같았다. 열정적이었다는 애기가 아니다. 노부부는 서로 대화중에 꼬박꼬박 고맙다는 말을 한다. 몇십년을 같이 살았을 텐데 아직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모른다!.. 보통 그 나이에는 서로를 보면 짜증부터 솟구치거나 뚱하니 서로를 바라만 볼 것 같은데,,,(아,이제 당신은 지겨워...)

 

 

(스포조심)

 

 

영화 초반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절대로 병원에 입원시키지 말라고 한다. 이 장면엔 큰 임팩트가 없다. 극적인 순간처럼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후 영화의 전개는 이 장면이 키인 것 같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결국 이후의 할아버지의 행동은 전부 이 장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딸이 엄마를 저렇게 두면 안된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버럭 화를 낸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니? 실은 할머니가 이런 부탁을 해서 내가 들어 줘야해,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아버지. 그럼 어떡해요, 그런게 뭐가 중요해요 하고 받아치는 딸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악전고투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이런 의도가 숨어있을 거라고 상상하면 무언가가 뭉클한 느낌이 든다. 감독은 마지막에 주인공을 가장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할머니를 죽이는 순간에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할아버지는 병수발에 지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할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하는 역설에 빠진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은(커팅 뭐시기 하는 컷) 뭐랄까 하케네감독의 마지막은 저런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피아니스트?) 하루키 소설의 문장을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나자, 토니 다키타니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하루키의 토니 다키타니 중, 정확한 문장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완전한 여백과 허무...)

 

 

p.s. 그러고 보니 소재는 티비인생극장 같은데나 신문의 가십면에 나올만한 소재이다. 역시 다루는 사람이 문제다. 오히려 영화내내 떠오르는 생각.

"와, 저 할머니 젊었을 떄 엄청 미녀였겠는데..."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어쩌구 하는 영화에 나온 분이시란다. 젊음은 변하기 쉬운 거라지만 내가 늙어서 저 정도만 돼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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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남산강학원에서 정화스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도반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였는데 정작 내용은 도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떠오르는 단어는 "공감"과 "협동"이라는 단어이다. 우리 존재의 기반은 "공감"과 "협동"이고  우리 몸 세포도 "공감"과 "협동"을 잃게 될 때 암세포가 된다는 것이다.아마 "무아"라는 개념도 비슷한 것 아닐까. 공감과 협동,  그런데, 이 공감과 협동이라는 단어를 다른 책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팀 파크스가 쓴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라는 책이다.

 

저자는 중년 남성들이 흔히 겪는 전립선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아랫배가 불에 덴 듯 아프고 취침 중에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문제는 병원 검진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병원만 가면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린다. 원인없는 통증 ,자기를 일단 수술하려는 의욕 만땅의 의사 앞에서 저자는 엉뚱하게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위빠사나 명상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현대의학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와  "행위"와 "자아"를 떠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위빠사나명상에서 그를 가르친 구루는 존 얼 콜먼이라는 사람이다. 흔히 구루가 그렇듯 이 사람도 별로 구루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도 (직업이 목사다)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고집하는 냉소적이고도 지적인 저자를 그는 돌려놓는다. 위빠사나 수행 중에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만물에게 공감과 협동이 함께 하기를!"   명상을 하다 저자는 생각에 잠긴다. "옛날같으면 죽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나는 그 때 아버지에게 뭐라고 해야 했을까?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콜먼도 물론 불교도였다. 따라서 정화스님과 같은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니체 생각. 니체의 마지막 발작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토리노의 말" 이라는 영화가 있다. 물론 주인공이 니체인 건 아니다. 니체의 발작은 하나의 단서이다. 토리노의 광장에서 니체는 학대받는 말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발작을 일으켰다. 여기까지는 이런 저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집으로 옮겨진 니체는 의식을 회복하며 단 한 마디를 남긴 채 영원히 발작하게 된다. 그 한 마디는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이다.(이 영화 언젠가 한번 봐야겠다.)  이 에피소드가 과연 사실일까?  어쨌든 니체가 마지막에 전하지 못했던 말은 무었이었을까? 자기가 했던 말을 전부 부정하는 말이었을까? 니체는 왜 하필 학대받는 말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발작하게 된 걸까?  항상 비아냥대기 좋아하고 강자에 대해 프렌들리(?) 했던 니체. 어쩌면 니체가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공감" 과 "협동" 아니었을까?  순전한 지레짐작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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