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커 씨, 사실인가요? - 베스트셀러 저자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말하지 않은 사실들
이승엽 지음 / 어떤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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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커, 별 거 아니네 한국 대학생한테도 처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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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낙관주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석의 층위에서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갖는 것도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이해와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신낙관주의의 팩트물신주의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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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모든 곳에 있기도 하고, 그 어느곳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랑이란 ㅇㅇㅇ이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을 우리의 복잡한 현실적 정황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개념 규정의 ‘더블 바인드‘(double bind)‘, 즉 ‘필요성‘과 ‘불가능성‘이 여기에서 작동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그 개념을 지속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 규정의 ‘불가능성‘을 언제나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랑이란 어쩌면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구체적 정황에 따라 생각하고다시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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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 케이 모던 2
이인규 지음 / 마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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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자산에서 시작되었다>(리사 앳킨스.멀린다 쿠퍼.마르티즌 코닝스/사이)와 이 책이 주장하는 공통점. 근로소득으로 자산을 취득하기는 이제 불가능하다. 이제 개인은 좋든 싫든 대출을 받고 투자가가 되고 자본가가 된다. 그 양태를 대단지 아파트 재건축이라는 그리드로 묘사한 책. 근데 둔촌주공아파트가 어디야? 하고 묻는 나 같은 부동산알못에게 감을 잡게 해주는 책이다. 읽기 쉽고 단순한 서술이 장점이고 너무 디테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투자가 마인드가 장착된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은 이제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선거와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그게 사회에 이로울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의 최종목적은 바다건너 실리콘밸리의 개객끼들처럼 이윤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자본가가 되는 순간. (아마도 중간계급이겠지. 애초 건설당시부터 이 곳이 진짜 서민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건조하게 서술된 재건축과정에서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악다구니와 싸움,협잡과 갈등이 있었을까. 편한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혐오감이 왜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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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은 지배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아도 된다. 억압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민주주의라는 가면도 필요없다. 중간계급의 존재와 의식은 자신들의 지배를 보장해 주는 구조에 깊숙이 통합되어 있다. 억압하는 자들만큼 자기들이 공정하다고 곧잘 믿는 이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들의 정당성을 믿지 않는 부르주아가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면 곧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부르주아가 자신의 정당성을 믿지 않게 되면 주로 자신 - P260

들이 바로 그 불가해한 수수께끼였던 문제를 푸는 것이 될 것이며, 그 다음 논리적 단계로 자멸을 스스로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삶의 조건으로서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 P261

임금 봉투의 양은 경과한 시간의 양과 같다. 그 비례관계가 정확하기 때문에 덜 일하면 임금도 줄어들고 더 일하면 늘어난다. 그렇게 고정되어 있는 만큼, 노동력의 연속적이고 가변적인 진정한 특질을 간파하고, 완전히 시간을 바치는 것이 사실 측정될 수 없는 엄청난 인간 에너지를 쏟게 한다는 것의 의미를 놓치기가 너무 쉽다.
임금 봉투에 대한 물신숭배 비슷한 것ㅡ 풀로 붙여 단단하게•봉해져 있고 은화들 때문에 아래쪽이 무거운 봉투를 손가락으로 튀기면서 받은 액수가 얼마인지를 뽐내는 퍼레이드가 화요일마다 펼쳐진다ㅡ이 있어서한주일을 진탕 쏟아붓고 자신이 한 수고를 양화함으로써 노동자의 의식속에는 인간 노동력의 비상한 투여와 잠재력이 매주 지급되는 ‘공정한‘ 임금의 가치밖에 지니지 않은 것으로 인식된다. 보이지 않게 은행계좌로 들어가는 월급수표와 달리, 이런 주당 임금에는 장기적으로 생명력 있는 노력의 가변적인 잠재력과 고정된 임금보상 사이에 얼마든지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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