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 몸과 마음, 언어와 신체, 건강과 치유에 대한 한 회의주의자의 추적기
팀 파크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백년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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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게 세번째다. 한번은 알라딘에 중고로 팔았다가 다시 샀고, 한 번은 어머니에게 선물했다. 그래도 아직 초판 1쇄인게, 정말 재밌는 책인데 아쉽다.  팀 파크스라는 이름은 내게 낯설다.아마 전방위 문필가 같은데, 부커상 후보에도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주무르는 솜씨며, 박학다식,간간이 끼어드는 블랙 유머가 실소를 짓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위빠사나 명상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저자는 "교육받은 합리적 서구 백인 남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아버지가 목사인 탓에 철저하게 본인은 무신론자에 회의주의자,합리주의자가 되었다. 아내와 이탈리아로 이주 후 대학강의와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50대의 나이에 전립선 비대 증상으로 괴로와 하고 있다. 문제는 병원 진단에서는 자신의 방광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나온다는 거다. 때문에 병원에서 일어나는 대략난감의 에피소드가 이 책의 전반부를 이룬다. 의욕만땅의 의사는 무작정 저자를 수술하려 하고 저자는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수술을 거부한 채 통증을 줄일 방법을 찾는다. (난 아마 여기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이 책을 선물했다. 저자와는 달리 어머니는 수술을 선택했지만 수술 후에도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통증이 자신의 삶을 전부 압도해 버리자 저자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으로 접한 "스탠더드 프로토콜"이라는 치료법은 시전하게 되는데 사실 이 방법이 위빠사나 명상 기법과 같은 맥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이런 계기로 저자는 위빠사나 명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위빠사나 명상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과정이 이 책의 주요이야기다. 결국 통증이 저자를 위빠사나 명상으로 이끈 셈이다. 책의 결론는 통증을 극복하고(적어도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이 겪은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두고 난감 내지는 당혹스러워 하는 저자의 모습이다.

 

통증 이전이었다면 저자는 명상이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고 왠 달나라 이야기냐고 했을 텐데, 아마 이 서평을 읽는 사람 중에도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더 설득력을  가진다. 철저한 회의주의자인 저자는 위빠사나명상 이후에도 완전히 "회심"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누구를 편들 마음이 없으니(구루인 콜먼을 '늙은 새끼'라고 부른다.) "신앙간증집"같은 여타의 명상 서적과는 구분된다. 물론 저자의 위빠사나 참가 과정에서는 불교적인 백그라운드가 어쩔 수 없이 깔린다. 하지만, 철저한 회의주의자, 대학교수이자 부커상 후보 소설가인 저자는 백기투항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일종의 체험기인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통찰을 내놓는다. 우리는 우리 몸을 모른다는 것, 심지어 의사도 자신의 몸을 모른다는 것,육체는 "나의 것"이나 의사들만 알고 있는 복잡한 기계가 아니라 나 자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글쓰기를 그만두어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언어라는 것은 결국 비유이고 우리를 '나우앤히어'로 부터 이탈시키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노련한 소설가 답게 저자는 군데군데 자신의 성찰을 심어 놓았다. 나는 저자가 위빠사나 명상의 경험을 서술한 부분에 자극을 받아 결국 얼마전 열흘짜리 명상센터에 참석했다. 책에는 고엔카의 이름도 언급되는데 내가 참석한 곳이 고엔카의 명상코스다. 이런 거 보면 참 모든게 돌고 도는 것 같다. 나의 경험과 저자의 경험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어쩌면 내가 저자보다 더 강렬한 경험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나의 경험을 신비화 하고 싶지는 않다. 설혹  위빠사나 명상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책의 부제처럼 몸과 마음,언어와 신체, 건강과 치유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음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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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명 > 장정일,야마무라 오사무,다치바나 다카시 그리고 피에르 바야르

8년 전이 더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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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명 > 인공의 생태계는 언제 끝장이 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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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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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동진씨가 조선일보 기자였을 때 딴지일보에서 “은근히 대중을 소외시키는 비평을 한다”고 시불(딴지식 표현이다)거린 적이 있다. 아마 정성일씨와 이동진씨를 비교하는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날개에 조선일보 기자였다는 것을 적지 않는 것을 보면 본인도 그 시절이 별로 그립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을 어느정도 읽는 사람이라면 으레 독서론에도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내가 아는 대표적인 책쟁이는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다. 독서계는 크게 지독파와 속독파로 양분되는 것 같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기적의 속독술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속독파이다. 그에게 책은 죽기 전까지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 할 대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 책이 너무 많고, 한 번 자극된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는 바다와도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치바나 다카시는 발췌독을 한 책도 “읽은 책”의 권수에 포함시킨다. 로자 이현우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책을 만져보는” 경험도 독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반면 지독파의 대표 선수는 “천천히 읽기를 권함” 의 야마무라 오사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책은 삶보다 선행하지 못한다. 그가 만약 로자의 애기를 듣는다면 “세상에 그런 것도 독서라고 하다니!”하고 경악할 것이다. 그럼 이동진 씨는 어떨까. 같은 책을 여러번 읽기 보다 여러권의 책을 한번에 읽는다고 하는 걸 보면 로자나 다치바나 다카시 부류인 것 같지만, 속독을 권하지는 않는다. 책에 메모를 하고 책을 “하대”한다고 하는 건 꼭 다치바나 다카시다. 반면 이상한나라의 헌책방 주인인 윤성근씨는 본능적으로 책을 깨끗이 본다고 한다.(이런 것도 포지션의 차이인가?)
책을 고를 때 서문과 차례를 분석하라는 지적은 이제 귀에 익숙하지만 이다혜기자가 지적했듯이 책의 3분의 2 지점을 공략하라는 노하우는 일견 새롭다. (그 부분이 저자의 힘이 가장 떨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책과 책읽기에 관해 이런 저런 수다를 떨고 싶은 사람에겐 동호회 참석하는 기분으로 부담없이 읽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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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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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노동자의 삶은 의미없는 것일까? <인간증발>에서 사진을 찍은 스테판 르벨은 서문에서 도시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때 증발을 꿈꾸었다고 한다. 물론 <인간증발>에서의 증발자의 모습은 르벨이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산야나 가마의 축축한 악취 대신 그는 브라질에서 오두막을 짓고 사는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에게 세계는 어쩔 수 없는 투쟁의 장이고, 시스템을 빠져나오려면 안락함을 포기하고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 것,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고 자연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는 거다.  과연 그에게 도시,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내가 이런 의문을 품는 이유는 르벨이 생각하는 세계가 내가 가진 이미지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겪은 세계는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였다. 회사의 본질은 착취이고, 회사 밖이라고 해도 폭력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은 치사하고 뻔뻔하기까지 하다. 그 안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하며 “살아남은” 것 같다. 여름 휴가 계획을 짜며, 새 아이폰을 사며 별일없는 척 하지만, 삶은 비참하고 겉모습은 당연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지만 실상은 힘없는 부자유민인 것이다. 물론 내가 겪은 경험이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일 몇십년 전의 나에게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의 존엄성과 자유라고. 너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라고. 지금은 너의 주체성과 자유를 수호할 기술을 배울 때이며 ,용기를 가지라고. <인간증발>에서는 증발자를 자유와 외로움을 맞바꾼 이런 시스템의 탈주자로 보는 시각이 나온다. 하지만, 빚이나 실직 때문에 원하지 않은 증발을 한 사람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탈주를 택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엉뚱하게도 나는 일본의 수만명의 가출자들을 다룬 르포와 미국의 어떤 노동자 철학자의 자서전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는 평생 일용노동자 비슷하게 살면서 철학을 한 에릭 호퍼의 자서전이다. 호퍼는 태어날 때부터 끈 떨어진 사람이었다. 이제 막 공황기가 시작되기 전의 산업화가 진행되던 미국사회,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호퍼가 10대 때 사망했다. 재미있는 것은 가구제조공이었던 아버지의 집에 100권 정도의 책이 있었고, 어린 호퍼를 데리고, 베토벤 콘서트 홀에 갔었다는 것이다. 어째 지금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현대의 문명인이 원시인처럼 느껴진다. (호퍼의 기술로는 이런 상황이 유독 특별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10대의 호퍼는 모아놓은 돈으로 독서와 산책, 사색과 메모로 소일하다 돈이 떨어지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러자 호퍼는 “도시노동자의 죽지 못해 사는 일상”을 견디기 보다 자살을 결심한다. 독약병을 가슴에 품고 도시 외곽으로 가서 독극물을 삼키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격정에 휘말려 독약병을 멀리 던져버리고 도시로 돌아온다. (이 대목은 꽤 감동적이다. 호퍼의 귀에는 귀환하는 자신의 발소리가 박수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호퍼에게 떠 오른 이미지는 인생이 곧 길이라는 비젼이었다. “도시노동자의 죽지 못하는 일상” 의 대안으로 그는 영원한 여행을 선택했다. “그날,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탄생했다”
그 후 호퍼는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살았다.(마지막에는 부두 노동자로 정착한다) 이 책은 그 후의 호퍼의 방랑기를 서술한다. 호퍼는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당연히 평생이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호퍼의 마음가짐은 대략 이런 게 아닌가 한다. 우연에 인생을 맡기고, 자기연민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기. 남에게 관대한 이유는 자신에게 관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신야의 증발한 일용노동자가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한다면 일본의 에릭 호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에릭 호퍼가 영원한 방랑을 한 이유도 도시노동자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안락하게 살지만,대신 우리는 무언가를 지불한다. 그것이 자유일 수도 있고, 활기일 수도 있고, 인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대략 짐작해 보면 그것은 노동과 삶과의 관계 때문 아닐까 한다. 책의 말미에 호퍼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몰염치한 짓이며 진짜 인생은 일이 끝났을 때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노동시간이 하루 6시간, 일주일에 5일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퍼가 방랑을 떠난 것도 결국 “도시노동자의 죽지 못하는 일상” 때문 아니었던가.  대공황을 맞아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진 부자를 보고 호퍼는 충고한다. 절대적인 안전을 원한다면 돈을 모을게 아니라 나처럼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아무리 화폐제도와 사회제도에 혼란이 와도 씨뿌리고 수확하는 노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어쨌든 세상의 모든 “죽지 못해 사는 도시노동자들”이여. 오늘도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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