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노동자의 삶은 의미없는 것일까? <인간증발>에서 사진을 찍은 스테판 르벨은 서문에서 도시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때 증발을 꿈꾸었다고 한다. 물론 <인간증발>에서의 증발자의 모습은 르벨이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산야나 가마의 축축한 악취 대신 그는 브라질에서 오두막을 짓고 사는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에게 세계는 어쩔 수 없는 투쟁의 장이고, 시스템을 빠져나오려면 안락함을 포기하고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 것,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고 자연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는 거다.  과연 그에게 도시,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내가 이런 의문을 품는 이유는 르벨이 생각하는 세계가 내가 가진 이미지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겪은 세계는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였다. 회사의 본질은 착취이고, 회사 밖이라고 해도 폭력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은 치사하고 뻔뻔하기까지 하다. 그 안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하며 “살아남은” 것 같다. 여름 휴가 계획을 짜며, 새 아이폰을 사며 별일없는 척 하지만, 삶은 비참하고 겉모습은 당연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지만 실상은 힘없는 부자유민인 것이다. 물론 내가 겪은 경험이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일 몇십년 전의 나에게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의 존엄성과 자유라고. 너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라고. 지금은 너의 주체성과 자유를 수호할 기술을 배울 때이며 ,용기를 가지라고. <인간증발>에서는 증발자를 자유와 외로움을 맞바꾼 이런 시스템의 탈주자로 보는 시각이 나온다. 하지만, 빚이나 실직 때문에 원하지 않은 증발을 한 사람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탈주를 택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엉뚱하게도 나는 일본의 수만명의 가출자들을 다룬 르포와 미국의 어떤 노동자 철학자의 자서전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는 평생 일용노동자 비슷하게 살면서 철학을 한 에릭 호퍼의 자서전이다. 호퍼는 태어날 때부터 끈 떨어진 사람이었다. 이제 막 공황기가 시작되기 전의 산업화가 진행되던 미국사회,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호퍼가 10대 때 사망했다. 재미있는 것은 가구제조공이었던 아버지의 집에 100권 정도의 책이 있었고, 어린 호퍼를 데리고, 베토벤 콘서트 홀에 갔었다는 것이다. 어째 지금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현대의 문명인이 원시인처럼 느껴진다. (호퍼의 기술로는 이런 상황이 유독 특별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10대의 호퍼는 모아놓은 돈으로 독서와 산책, 사색과 메모로 소일하다 돈이 떨어지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러자 호퍼는 “도시노동자의 죽지 못해 사는 일상”을 견디기 보다 자살을 결심한다. 독약병을 가슴에 품고 도시 외곽으로 가서 독극물을 삼키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격정에 휘말려 독약병을 멀리 던져버리고 도시로 돌아온다. (이 대목은 꽤 감동적이다. 호퍼의 귀에는 귀환하는 자신의 발소리가 박수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호퍼에게 떠 오른 이미지는 인생이 곧 길이라는 비젼이었다. “도시노동자의 죽지 못하는 일상” 의 대안으로 그는 영원한 여행을 선택했다. “그날,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탄생했다”
그 후 호퍼는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살았다.(마지막에는 부두 노동자로 정착한다) 이 책은 그 후의 호퍼의 방랑기를 서술한다. 호퍼는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당연히 평생이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호퍼의 마음가짐은 대략 이런 게 아닌가 한다. 우연에 인생을 맡기고, 자기연민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기. 남에게 관대한 이유는 자신에게 관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신야의 증발한 일용노동자가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한다면 일본의 에릭 호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에릭 호퍼가 영원한 방랑을 한 이유도 도시노동자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안락하게 살지만,대신 우리는 무언가를 지불한다. 그것이 자유일 수도 있고, 활기일 수도 있고, 인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대략 짐작해 보면 그것은 노동과 삶과의 관계 때문 아닐까 한다. 책의 말미에 호퍼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몰염치한 짓이며 진짜 인생은 일이 끝났을 때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노동시간이 하루 6시간, 일주일에 5일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퍼가 방랑을 떠난 것도 결국 “도시노동자의 죽지 못하는 일상” 때문 아니었던가.  대공황을 맞아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진 부자를 보고 호퍼는 충고한다. 절대적인 안전을 원한다면 돈을 모을게 아니라 나처럼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아무리 화폐제도와 사회제도에 혼란이 와도 씨뿌리고 수확하는 노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어쨌든 세상의 모든 “죽지 못해 사는 도시노동자들”이여. 오늘도 굿 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