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사연.

원하던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난 대학 신입생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멋진 야외 음악당과 고풍스러운 성당, 오작교를 닮은 구름다리, 예쁜 교복.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만큼이나 다양한 동아리들. 각 동아리의 대표 언니들이 들어와서 홍보를 할 때마다 나는 너무나도 신나 하며 열심히 원서들을 챙겨 모았다.

근데 문제는 들고 싶은 동아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교실 안으로 짧은 커트머리의 한 언니가 들어왔다. 큰 키와 하얀 얼굴, 이상은을 연상케 하는 남자 같은 목소리.

난 그때 이상은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 언니에 반해 단숨해 합창부에 들어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근데 어느새 나는 합창부가 아닌 우체부가 되어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특이하게도 우체국이 있었던 것이다.

교내 복도 한가운데 놓여 있던 빨간 우체통. 그 속에 담긴 편지와 선물을 배달하는 일. 그게 바로 우체부의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유명했던 MBC의 행사처럼 교내 예쁜 엽서전을 개최하기도 한다고.

나는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빨간 우체통과 예쁜 엽서전에 현혹되어서 결국 우체부에 가입했고 2년 내내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신세가 되어서 점심때마다 온 교실을 누비고 다녀애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나는 변함없는 애정으로 그 언니를 멀리서나마 지켜보았고 나 아닌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그 언니의 소식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솔솔 들려왔다. 어느 날 친구랑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을 때였다.

바로 앞자리에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이는 거였다. 이상은을 닮은 바로 그 언니였다. 어쩜 좋아, 저 언니 톰 크루저 좋아하나 봐. 친구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남자 같은 언니가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처럼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다름 아닌 톰 크루저였기에 우리는 그 언니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언니를 본 충격도 잠시, 우리는 영화 속 여자들처럼 톰 크루저의 매혹적인 미소에 넋을 잃고 말았다. 물론 톰 크루저의 미모는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여자에게도 활짝 피는 꽃다운 시절이 있듯이 남자에게도 그런 게 있다면 톰 크루저에게는 아마 그때가 아닐까. 그때의 그는 정말 아찔하게 멋졌다. 그때는 어려서 그저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는 거다.

아름다운 해변, 쏟아지는 햇살, 눈부시게 젊던 톰 크루저의 방황과 사랑. 그 모든 것이 마음껏 펼쳐졌던 영화, 바로 칵테일이다. 인생도 한 잔의 칵테일 같은 거라 생각한다.

미소와 냉소, 눈물과 웃음, 냉정과 열정, 미움과 사랑, 이 모든 것이 잘 조화되고 고루 섞여야만 제 맛을 내는 것. 최적의 맛과 향 색깔까지 고운 색을 만들어 내는 유능한 바텐더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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