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좋다. 좋은 영화라고 생각된다. 원작처럼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그리하여 영화 속에 보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은유가 있어서 상상하고 또 상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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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어쩌면 레이디 두아처럼 진짜가짜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빛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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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빛은 밝고, 어떤 빛은 흐리고, 어떤 빛은 꺼져있고, 어떤 빛은 눈 아프고, 어떤 빛은 위태롭고, 어떤 빛은 찬란하고, 어떤 빛은 편안하다. 어항 속을 비추는 푸르스름한 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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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광도 나오고 인공광원도 잔뜩 나온다. 인간은 자연광을 늘 원한다고 하지만, 자연광이 비치면 눈살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며 피부노화를 걱정한다. 세상에 어둠이 도래하면 달빛보다는 인공광원 속에서 인간은 더 웃고 표정이 더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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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불빛은 무엇일까. 어떤 불빛은 잃어버리는 순간 삶이 아니라 그저 생활하는 것이 될 뿐이야,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 빛이 미정일 수 있고, 경록일 수 있고, 요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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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참 좋다. 친절과 감동이 판치는 백화점이지만, 실상은 조롱과 멸시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영화를 보며 소설을 읽는 것 같이 광장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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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따라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눈과 마음 세포 하나하나가 영화의 이야기, 미정과 경록, 요한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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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잘 알겠지만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영상으로 옮겼다. 소설의 그루미 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소설 속 대사가 나오기도 하고, 책 표지가 영화 속에서 팜플랫으로 나오기도 한다. 왜 파반느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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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가 처음 나왔을 때 열광이었다. 게다가 같은 도시 출신에, 열심히 소설을 쓰고 싶었던 나에게 박민규의 소설은 어쩌면 빛과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장편에 이어 단편까지, 표절도 너무 심한 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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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는 인정했고 고개 숙였다. 얼마나 등단에 목말랐으면 자아를 속이면서까지 소설을 썼냐며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반갑지만 반갑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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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미정이 말하지만,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 감독도 알고 있었다. 영화 속 캐릭터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요한의 냉장고 속 불빛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요한에게 냉장고는 엄마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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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열어야만 보이는 불빛, 행복한 빛이지만 냉장고를 열어야만 볼 수 있다. 차가운 빛. 암울한 해피엔딩. 세상은 그러니까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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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말한다. 꼭 불빛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공룡이라 불리지만 너는 너 자체로 빛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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