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고등학교 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이 있었어. 비가 너무 와서 물이 불어서 집에 일찍 보내줬거든. 우산 없이 왔다가 폭우 때문에 부모님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로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어.


남고였는데 우리는 발목까지 물이 차는 운동장에서 공을 찼어. 공인지 빗물인지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공은 굴러가야 마땅하지만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붙어 버렸지. 수정전은 그야말로 카타르시스였어. 굉장한 경험이었어. 홍수가 아니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순간이었지. 메가데스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어.


근데 한 시간쯤 지나서 운동장의 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거야. 우리는 슬슬 겁이 났지. 화장실로 들어가서 주전자에 물을 받아서 대충 씻었어. 쿠르르릉 쏴아 하는 빗소리가 무섭게 들렸지.


그때 주전자를 하나 더 가지러 교실에 갔던 태형이가 달려와서 학주가 잡으러 온다고 소리쳤어. 학주는 터미네이터로 불리는,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거인이었는데 걸리면 아작 나는 거야. 다리를 절뚝거렸는데 소문이 대단했어. 남고만 다니며 학주를 맡아서 아이들을 때려잡는 거지.


태형이 새끼 우리를 화장실에 남겨 둔 채 팬티만 입고 도망갔어. 우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태형이를 따라갔지. 다리를 절뚝거리는 학주가 악어처럼 따라오는 거야. 우리는 흩어져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같이 복도를 달렸어. 흩어지면 꼭 터미네이터에게 잡힐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지.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이 팬티만 걸친 상태라 흩어져도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우리는 달려서 방송부 옆의 물품실에 숨었어. 이 새끼들 왜 보내 줄 때 집에 안 가는 거야! 집에서 전화 오고 난리잖아 새끼들아. 잡히면 모두 정학이야 새끼들아!라고 학주가 말하는데 너무 무서운 거야. 키 큰 사람은 목소리가 굵어서 더 신경 거슬리는 소리였어. 터미네이터의 무시무시한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지.


학주는 늘 우리를 벼르고 있었어. 그전부터 학교에서 사고 치고 다녀서 학주가 단단히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거든.


씨발 좆됐다.라고 태형이가 말했어. 태형이 입에서 담배냄새가 미미하게 났는데 학주한테 걸리면 아작인거지. 태형이 새끼 이번에 정학 맞으면 전학 내지는 퇴학이거든.


우리는 차가운 물품실 뒤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서 20분을 그렇게 있었지. 팬티만 입고 물을 제대로 닦지 못해 시간이 갈수록 추위가 몸을 엄습해 오는 거야. 날개 잘린 파리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어. 근육이 좋은 태형이도, 하얀 살갗을 가진 상후도, 바짝 마른 효상이도, 모든 것을 글로 표현하던 기철이고, 학교 일진 진만이도, 수영을 잘하는 득재도 홍수 속에 공 차러 모였다가 한껏 쪼그라들었지.


그때였어. 쾅! 하며 문이 열리고 터미네이터가 금니를 반짝이며 웃었어.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고 생각했지. 정학당하면 부모님이 학교에 와야 할 텐데. 학주는 우리를 일렬로 세우고 따라오라고 했어.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포로들처럼 흙탕물에 붉게 물든 팬티를 입고 고개를 숙이고 학주를 따라갔어. 학주는 우리를 교무실 앞의 당직실로 오라고 하더니 당직실에 딸린 샤워실에 우리를 밀어 넣었어. 그리고 쏴하며 뜨거운 물을 틀어 주더라.


감기 들라 샤워해 새끼들아. 타월은 하나씩 있으니까 쓰고 나중에 다 빨아와.


뜨겁게 쏟아지던 샤워기의 물줄기는 차갑게 내리는 비보다 훨씬 보드라웠고 그렇게 오기 싫었던 학교가 처음으로 평안하게 느껴졌어. 샤워실의 수증기가 우리를 따뜻하게 감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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