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 대학이 사과문을 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식 대학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분노하고 있다. 이번 피식 대학의 영상은 사람들의 마음속,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악착같지 눈물겹게 버텨야 겨우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과가 설령 진정성이 있어도 모두가 [앞으로 잘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피식 대학의 사과문 밑에 달린 댓글은 압도적으로 분노하고 있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욕설이 들어가면 댓글이 삭제가 되니까 욕설은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욕설을 퍼붓고 싶다.


대중은 이미 질주하는 폭주기관차다. 폭주기관차는 멈추지 않고 달리고 달려 속도가 미친 듯이 붙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고 결국 멈추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왜 분노하고 있을까. 이런 분노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왜 피식 대학에 이렇게 강하게 분노하며 화를 내고 있을까.


어쩌면 혹시 피식 대학이 접근성이 용이해서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 시인의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가 생각이 난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사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십사 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이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음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의 모습이 오버랩이 된다. 정말 분노해야 하는 것에는 입을 모으지 못하고 작은 것, 거스름돈, 식당에서 국물이 튄 것, 나를 노려 본 것에 분개하고 화를 내고 있다.


대중은 화가 나 있다. 진실로 화가 많이 나 있다. 한두 군데에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자기 미모에 도취된 대통령 부인은 인스타그램에나 올려야 할 사진들을 대통령 실에 도배를 했다. 선물로 받은 책들은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비싼 술은 버리지 않은 대통령 부부. 전 국민이 대통령 부인이 뇌물을 받는 장면을 봤지만 기소조차 하지 못하는 검사들을 보면서,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60여 일 만에 나타나서 다시 자기도취식의 사진들이 언론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이치 모터스 사건부터, 가석방된 모친의 일까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노를 아무리 해봐야 대통령 부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데 일개 국민 따위가 무슨 말이 많아! 같은 느낌이다. 대중은 화를 내고 분노하지만 전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대중은 그 화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된다.


김호중은 그런 식으로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는데 계속 부인했다. 억울하다면서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는 망언을 내면서 공연을 강행했다. 김호중의 팬들은 마치 우리 가수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기세다. 결국 공연을 하면서 공연 티겟을 반납해 달라는 사람들까지 안 된다며 전부 돈을 벌여 들였다. 대중은 공연감행하기 전까지 분노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먹히질 않는 것이다. 김호중은 음주에 뺑소니에 온갖 범죄행위를 했지만 돈은 돈대로 다 벌어들였다. 대중은 허탈한 것이다. 이 쌓인 분노를 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채 상병 사건도 그렇다. 오늘 날짜로 이제 거부권이 이틀 정도 남았다. 채 상병 사건은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잠 못 자고 억울한 점을 풀고 자 했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 여름에 돌입했다. 이렇게 또 시간은 흘러간다. 분노하고 분노했지만 그 분노는 그저 반사되어 튕겨 나올 뿐이다. 그저 대중은 고통스러울 뿐이다.


BBC 코리아에서 ‘버닝썬’ 다큐멘터리 영상을 올렸다. 보는 내내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 언론이라면 절대 내 보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영상들이 가득했다. 인간쓰레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범죄자들이 살기 좋은 나라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듯 범죄자들은 너무나 짧은 기간 복역을 나고 나왔고, 대중은 도대체 승리, 정준영 같은 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었고, 복역하고 나왔다는 것에 뭐 그래,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영상에서 정말 인간이 얼마나 쓰레기가 될 수 있는지 잘 볼 수 있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해야 하는데 잘 모르니까 분노할 수 없었던 것까지 다 해서 분노를 하고 싶다. https://youtu.be/J1FNN34HCsQ?si=vlNfXyQDLZeYt5mh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피식 대학으로 물려 들어 분노하게 되었다. 피식 대학이 그동안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건네주었던 건 전부 소용없는 일이다. 영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지만 대중은 그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다. 다른 모든 곳의 분노까지 끌어안아야 한다. 피식 대학은 타격이 먹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진화론에 속한 인간이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해서 경쟁사회에 나가게 되는데 경쟁구도는 크게 타 기업과 한다지만 개개인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경쟁을 한다. 생물진화론에서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처럼 사회진화론에서 상사는 신입사원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그 책임을 묻지 않게 되었다.


90년대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되면 여러 회사에서 입사지원서를 학교에 보냈다. 우리 회사에 들어오기만 해 달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취업에 대한 걱정을 하는 대학생들은 없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성적이 나쁘지만 않으면 괜찮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100군데의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넣어도 가망이 없다. 사회적으로 신입직원을 뽑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점점 비싸고 책임져야만 하는 정규직보다는 계약직과 인공지능, 하청을 택하게 되었다. 이제 은행에서 신입사원을 뽑지 않게 되었다. 전부 계약직이다.


그렇게 바늘구멍 같은 지옥의 취업대란을 뚫고 입사를 했지만 조직은 신입사원의 몸보다는 일을 우선시했다. 건강은 일을 열심히 하면 따라오는 하나의 옵션 같은 기능이 되었다. 입사 후 경쟁이 시작된다. 경쟁은 바로 옆의 사람을 밟고 올라설 때 확실하게 표가 난다. 경쟁 속에는 업무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서 내 인간관계 역시 경쟁의 한 부분이다. SNL에서 우리는 그 단면의 예를 잘 볼 수 있다. 신입과 기존의 선배들과의 기싸움과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술수와 계략이 난무하는 회사는 전쟁터다. 반나절 전쟁터에서 총을 사정없이 쏘면서 에너지를 소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무기력으로 시달린다. 무기력은 점점 사람을 갉아먹는다. 고객은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와 사람의 피를 말린다. 클레임을 걸고 하루에 불친절하다는 메일을 수십 통을 보내왔다. 머리가 아프고 등이 너무 아파서 그저 근육통인 줄만 알았다. 무기력은 결국 저 밑바닥에 있는 우울증을 꺼내 올렸다. 주말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게 되었다. 누구나 바라는 좋은 직장이라고 들어왔지만 사회진화론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인간관계가 수직이다.


옷차림을 지적하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라 하고, 회식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를 비난했다. 조직에서는 다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런 부당함 쯤 참아야 해. 누구나 다 참고 버텨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내가 가자고 하면 술을 마시러 가야지. 네가 뭔데 빠지고 싫다고 하는 거야. 너 부모님을 생각해야지. 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좋아하시던 부모님을 생각해야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노가 있었는데 이제는 분노하기도 싫다. 분노가 뭘까. 분노는 왜 하는 걸까. 누군가는 이런 자신이 싫어서 인터넷 사건사고에 댓글로 화를 내고 있다. 분노를 풀고 있다. 현대 시대에 우리는 죽기 위해 살고 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는 세계.


음식 장사 하는 부모는 자식세대에게 절대 이런 거 물려주기 싫어서 공부를 시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이트 컬러가 모여서 일하는 여의도 증권가. 점심시간이 되면 우르르 잘하는 식당 앞에 줄을 선다. 그렇게 물려주기 싫은 식당 앞에 제일 잘 나가는 직장인들이 매일 점심 배를 잡고 줄을 서서 배를 채우고 있다. 그 대부분이 어젯밤에 새벽까지 마신 술 때문에 복국을 먹게 위함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여러 해 취업준비 끝에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회사생활 몇 년 만에 얻은 건 간경화와 건강 악화뿐. 행복하려고 들어간 좋은 직장은 사람을 점점 죽이고 있다. 무기력은 기본이고 우울증은 감히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다. 아픈 건 죄가 아니지만 마음이 아픈 건 죄가 되는 조직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멀쩡하니까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라고 한다. 왜냐고 물으면 남들 다 그렇게 하니까.


분노할 수 없는 곳에 분노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없는 시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작은 일에만 분개하고 있다. 즉각적은 반응이 있는 곳에 대고 화를 낸다. 분노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분노한다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분노를 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감지하는 게 인간의 능력으로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옷가게 아가씨가 있다. 하루는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두 사람은 일 년 가까이 맹렬히 사랑했다. 남자 친구를 나도 봤는데 잘 생긴 얼굴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도 좋고 무엇보다 너무나 착했다. 여자친구에게 지극정성이었다. 그래서 세 명이서 같이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깨지기도 한다.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그 사실을 받아 들을 수 없었던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를 스토킹 하기 시작했다. 요즘 옷가게는 매장에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 판매는 대부분 인터넷으로 하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는 혼자 살고 있는 여자 친구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그 안에서 이삼 일씩 기다리는 것이다. 그게 여자 친구는 너무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남자 친구에게 분노하고 화를 내면 그렇게 온순하던 남자 친구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변할지 모른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이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노하지 않고 일 년 이상 생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분노했을 때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런데 이 분노를, 만약 이 분노를 끌어낸 것이 의도적이었다면 어떨까.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는 말을 우리는 달고 산다. 간사한 생명체가 있다면 바로 인간이다. 김호중의 사건만 봐도 김호중과 소속사는 살다 보니 운이 없어서 걸려버렸다는 식이다. 대중이 뭐라고 하든 간에 잡아떼다가 안 되면 미안하다 하면 되고, 공연은 취소할 수 없으니 그냥 하면 된다는 식.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라는 식. 마치 대통령 부부가 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분노하지만 이 분노를 풀 곳이 없다.


그래서 피식 대학은 그럼 사람들의 분노를 끌어내볼까.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인간은 아주 간사하여 백화점에 가서 백화점에서 물건을 구입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지만 구경을 하며 직원에게 이것저것 반말 비슷하게 한다. 화려한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시골 촌으로 가면 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느낀다. 자신들보다 약간 밑에 있는, 약간 더럽고, 약간 못 배우고, 약간 못 먹는다고 느낀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하대하고 천박하다고 느낀다.


좋은 대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3류 대학에 친구를 만나러 가서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낀다. 3류 대학의 학식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의 학식보다 못하다. 먹을 만한데도 몇 숟가락 뜨지 않고 남긴다. 맛이 없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냥 배부르다고 말한다. 인간은 간사해서 속의 말을 겉으로 다 뱉지는 않는다.


예전에 수원에 사는 애가 울산에 고래가 막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울산은 지방이라지만 인구가 150만의 광역시다. 한때 트위터에 부산에서 서울로 대학을 갔는데 거기 친구들이 부산에 살면 전부 바다가 보이는 걸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을 자신들보다 밑으로 보고 있다. 단지 입 밖으로 그 속마음을 꺼내지 않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건 그렇게 하대하는 속 마음을 가진 도시인간들, 그 도시인간들은 서울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살고 있는 도시보다 더 거대하고 복잡하고 멋진 도심지 속으로 들어가면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자신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식 대학 3인방과 작가들이 모여서 논의를 하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의 분노를 끌어내볼까. 어떻게? 속 마음을 그대로 밖으로 꺼내는 거지. 이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영상을 만드는 거야. 그러면 파장이 대단할 텐데. 뭐 어때? 사람들이 분노하고 우리는 욕받이가 되고. 그리고 금방 지나갈 거야. 영상이 풀리면 사람들 반응이 대단할 거야. 분명 모든 사람들이 분노할 테니 사과문도 작성해놔야 해 알겠지.


그래서 피식 대학은 분노하고 싶은 대중에게 마음껏 분노할 포인트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컷 분노하고 욕을 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하니까. 그 이면에는 사악한 인간의 간사한 면이 있어서 나만 분노하고 욕을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동조하는 것이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논란은 대중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논란으로 잃는 것도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반사이익을 엄청나게 얻는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논란을 회피하면 영원히 무명이다. 무명은 무능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대중은 논란의 중심에 선 아티스트들을 욕하고 화내고 싶어 한다. 그것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면 안 된다.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는 분노하고 싶다.

우리는 정말 분노하며 살고 싶다.

피식 대학은 대중의 분노를 알고 분노를 이끌어 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엊그제 써 놓은 내용인데 며칠사이에 김호중은 자수를 했다. 자수를 했지만 다음 공연은 그대로 진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피식 대학의 저 부분의 쓸데없는 이야기는 또 김갑수 평론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개개인이 분노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옆구리가 터진 김밥처럼 엉뚱한 곳에 분노를 풀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분노라는 감정은 사랑만큼 알 수 없다.



 분노를 풀어야지 https://youtu.be/6tex4F2iVNY?si=VEznCDWtRDRv8v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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