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두고 겨울 방학에 서울에 있었다. 고등학교 방학에는- 여름방학이든 겨울방학이든 방학에는 늘 상경해서 열흘정도 머무르곤 했다. 사진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서울에 가서 백남준 비디오 아트를 관람했다. 3년 동안 일 년에 두 번씩, 나는 총 여섯 번 백남준 비디오 아트센터에서 그의 예술 세계를 둘러보았다. 사실 내가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아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경주의 우양 미술관에서도 백남준의 작품은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진부에 들어온 1학년들에게 2학년은 어떤 주제로 강연을 해야 했다. 강연이라고 하지만 그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사진에 관한 이야기, 사진가 이야기나 사진이 아니더라도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백남준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호응도 좋았다.


나는 당시에 플럭서스에 심취(까지는 아니지만)해 있었다. 관심이 많았다. 백남준은 70년대 장발은 잘라버리는 한국에서는 예술활동을 할 수 없다며 독일로 건너가서 일종의 문화 새마을운동을 하는 1세대 예술가가 되었다. 거기서 같이 공부를 했던 사람이 오노 요코였고 그녀의 남편이 존 레넌이었다. 존 레넌의 친구가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었고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할 정도로 전부 친구였다.


백남준의 아트센터에 가면 도슨트가 설명을 해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갔을 때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도슨트는 설명을 잘해주었지만 나는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다.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잠깐 쉴 때 도슨트는 나를 불렀다. 나에게 음료를 하나 건네주었다. 사실은 나도 백남준의 예술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술은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면 된다. 보고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삐딱하면 삐딱한 대로 받아들이면 백남준의 예술이 조금은 편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거짓말처럼 그 뒤로 백남준의 예술이 생각하는 것처럼 엉망이지는 않았다.


가끔 답답하고 내 마음처럼 말도 나오지 않고 나의 옆에 내 편이라고는 1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백남준의 전위예술을 보면 이상하지만 괜찮아졌다. 가끔 대형마트에 아파트처럼 쌓아 놓은 라면들을 무너뜨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백남준의 전위예술 중에는 바이올린을 연주다가 미친 듯이 부숴버렸다. 그럴 때가 있다.


서울의 이문동에 있는 고모 댁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거의 볼 수 없기에 고모는 내가 하루 묵고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고모가 편하게 대할수록 어쩐지 더 불편해졌다. 대궐 같은 집과 연예인 같은 형과 누나들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후에 의사가 되었지만 그때는 대학생이었던 사촌 형이 나를 데리고 하루 동안 같이 놀아 주었다. 서울을 구경시켜 주었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았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나에게 브라이언 아담스의 앨범을 하나 사주었다. 형은 형의 친구들을 불러서 나를 데리고 당구장으로 갔다. 형과 친구들은 가죽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정말 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분명 날씨가 굉장히 추워서 나는 파카에 내복까지 입었는데 형들은 그렇게 추워 보이지도 않았다. 당구장은 내가 당구를 100 정도 친다고 해서 갔는데 나의 당구실력은 형편없었다.


외삼촌의 딸인 사촌누나에게는 고모 댁에서 하루 보내고 온다고 나왔지만 막상 고모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당장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앞일이 불투명했다.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는데 라면을 먹고 나면 밑에 깔리는 미미한 찌꺼기처럼 막연한 불안 때문에 뭐든지 척척 해내고 멋있는 고모 댁의 형과 누나들과 하룻밤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저녁에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고모댁을 나왔다. 둘째 외삼촌의 집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어딘지로 모를 서울의 거리를 떠돌아다니다가 늦은 밤에 되어서 구로공단 쪽으로 가서 허름한 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고모댁에는 외삼촌 집으로 잘 왔다고 연락을 드리고, 외삼촌의 사촌 누나에게는 고모댁에서 하루 자겠다고 했다.


여관이었지만 여인숙만큼 허름했다. 나는 그날 가출을 한 셈이다. 바닷가가 있는 집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가서 친척집에는 잘 있다는 연락을 한 채 혼자서 12월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여관의 방에는 침대는 없고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이불이 곱게 몇 겹으로 개 있었고 방에 난 창문은 앉아서 여는 여닫이 창문이었다. 앉은 채 창문을 여니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의 별이 냉정하게 반짝였다. 그 별들을 보니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티브이도 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은 채 작은 창으로 12월 마지막 밤을 서울의 밤하늘을 보며 있었다. 나는 몹시 외로웠고 어디에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반기지 않을 것 같았고 나는 1과 0 사이에 낀 존재 같았다.



자주 만나는 카페에 은주가 나오지 않았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은주는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으면서 잘 안 될 때는 꼭 나에게 뭔가를 털어놓거나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얄미운 모습이 보기 싫으면서도 또 며칠 연락이 없으면 카페에서 만나서 수다를 떨곤 했다. 은주는 늘 원피스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아래위로 붙은 치마 같은 옷. 나는 그 옷을 입은 은주를 약 올렸다. 뚱뚱해 보인다고 그 옷에서 좀 벗어나라고 했다.


은주가 그 녀석을 왜 좋아하는지 나는 몰랐다. 단지 덩치가 커서? 이유를 말하라면 그 이유가 가장 컸다. 깡패 같은 놈에다가 늘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좋아하다가 잘 안 되면 나를 찾아와서 울곤 했다. 아무튼 알 수 없는 게 은주였다. 은주가 카페에 나타나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 집에 전화를 하니 은주의 언니가 원래 심장이 안 좋았는데 지금 너무 안 좋아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했다.


은주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은주는 그것 때문에 심하게 운동을 하거나 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녀석 때문에 술도 마시기도 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달려서 그 녀석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은주는 나에게 심장은 다 괜찮다고 했다. 은주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렇게 믿었다. 입술은 립스틱 덕분인지 생기가 돌았다.


고 3은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대학이니 미래니 같은 분위기가 등에 붙어서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고 3 여름방학이 끝나고 은주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녀석과 잘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름방학에 그 녀석이 다른 여자애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나는 봤다. 졸업을 앞두고 은주는 영영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다.


구로공단 쪽으로 난 여관의 작은 창으로 밤하늘을 보니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고요하고 조용한 성격인가 봐] 하지만 조용한 성격이란 없다. 사람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말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보통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 수가 적은 아이도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말을 많이 했다.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상대방이 나의 말을 대체로 무시했기에 그러한 것이다. 은주는 그 녀석 앞에서는 말 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조잘조잘 잘 도 떠들었다.


나는 술을 사 와서 마실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서울의 12월 마지막 밤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반짝이는 별은 유난히 크게 보였다. 인간의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내일은 백남준 아트전을 보러 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방 안에는 물이 담긴 주전자가 있었다.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다. 보리차였다. 보리차를 오랜만에 마셨다. 맛이 좋았다. 구로공단이 보이는 허름한 여관방에서 마시는 보리차가 이렇게 맛있다니. 별거 아닌 보리차가 갈증을 시원하게 내려가게 했다.


시간을 보니 11시 55분이었다. 5분이 지나면 해가 바뀐다. 나는 보리차를 마시며, 작은 창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을 보며 해가 바뀌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운다고 해서 해가 바뀌는 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눈물을 아무리 흘린다고 해도 별이 된 은주가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저 조잘조잘거리던 은주의 추억을 연소 삼아서 조금 태워가며 늙어가야 한다. 세상은 나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그대로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은주가 나타나서 나를 운다고 놀리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음 날 사촌누나가 일하는 곳을 찾아갔더니 누나는 [나는 다 알아]하는 얼굴을 한 채 짬뽕을 시켜 주었다. 너 소주 마실래?라고 하기에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사촌누나와 함께 사촌누나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앉아서 짬뽕을 한 그릇씩 먹고 나는 나와서 고모에게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오후 내내 백남준의 아트 센터에서 그의 작품들을 구경했다. 작은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갇혀 소리를 지르고 나오려고 했다. 우리는 갇혀 있지만 자유한 존재다빛은 만질  없지만 리는  만질  없는 빛을 다룰  아는 존재다. 손에 카메라만 있다면 그 빛을 원하는 대로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상실을 극복하고 견디며 살아낸다. 그게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운명이며 동시에 능력이다.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서 나왔다. 나는 그때야 알았지만 내가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던 12월 31일은 31일이 아니라 30일이었다. 졸지에 나는 그해 하루를 더 살게 되었다. 둘째 외삼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부천이었다. 이상하지만 부천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와서 그런지 익숙하고 마음에 편했다.


둘째 외삼촌은 뇌가 망가져 집에서 누워서 지낸 지 오래되었다.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하던 외숙모가 나를 위해서 어려운 살림에 파티를 열어 주었다. 외가 쪽에도 나의 사촌들이 있었다. 우리는 거의 얼굴만 알아서 그런지 데면데면했다. 외숙모는 음식솜씨가 좋아서 차린 음식들이 아주 맛있었다. 중간에 케이크도 있었다. 케이크는 무엇을 위해 올라온 케이크인지 몰라도 사촌 동생들이 맛있게 잘라먹었다. 그날 밤 사촌동생들과 한 방에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게 되었다. 31일 밤에 모두가 이불을 덮고 반쯤 누워서 티브이를 봤는데 스타워즈가 했다.


모두가 두꺼운 한 이불에 발을 집어넣고 귤을 까먹으며 스타워즈에 빠져들었다. 스타워즈의 캐릭터와 몬스터들에 대해서 떠들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몰랐는데 같이 보는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솔로가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젊디 젊은 해리슨 포드가 빛이 났다. 티브이 속 밀레니엄 팔콘이 쏘아대는 빛과 츄바카의 움직임이 마치 백남준의 아트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세계도, 그리고 사람들도. 그러면 곧 봄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바뀌는 해를 맞이했다. 바야흐로 진짜 31일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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