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 광고에 공익광고가 나오는데 자동차 운전을 할 때 우회전에 관한 것이다. 2022년 1월 1일부터 우선 멈춤을 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붙는다. 우회전 멈춤 광고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라디오서 한다. 라디오를 매일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데, 늘 할 때마다 '오늘부터' 지키지 않으면 과태료가 붙는다고 한다. 오늘은 5월 27일이라고.
Necessary Evil
광고의 미학은 영화를 뛰어넘었다. 15초의 광고 속에는 15시간이 가지는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 광고에 현혹이 되어 지갑을 열고 안 돌렸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광고를 만드는 이들은 광고 한 편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경우도 있다. 뮤직비디오 보다, 영화보다, 다큐보다 더 멋지고 혼을 빼놓는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광고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마케팅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광고가 우리는 싫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는 늘 광고가 있다. 광고가 붙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망하고 만다. 오죽하면 유튜브 영상에는 영상이 돌아가는 중에도 광고가 나온다. 유료로 전환하면 이런 보기 싫은 광고를 보지 않게 해준다고 한다. 지들도 사람들이 광고를 싫어한다는 걸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 광고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절대적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광고는 없어지는 일은 없다. 그런 광고를 보기 싫어 광고가 길어지면 채널을 돌리고 만다. 광고의 홍수 속에서 광고는 쓰레기가 되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왜 수고롭게 미학적인 광고를 찾아야 할까. 프로그램의 수장들은 광고를 따내기 위해, 광고를 받기 위해 광고주들에게 굽신 굽신이다. 광고는 거대 빅브라더이며 몹들은 그 안에서 조밀하게 움직일 뿐이다. 그런 광고를 우리는 거부한다. 그러나 나에게 광고가 들어온다면 지금까지의 얼굴을 지우고 호의적으로 바뀐다. 광고란 그런 것이다. 어쨌거나 마릴린 맨슨의 뮤직비디오를 죽 보는데 광고가 튀어나오는 건 어떻게든 싫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검색을 하다가 네이버 한 페이지에 동시에 뜬 두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하나는 코로나가 풀려 해외에 여행을 가는 행복한 기사였고, 또 하나는 죽음을 일주일 남긴 이십 대 유튜버의 작별 인사에 관한 기사였다. 한 페이지에 이렇게 동시에 뜬 두 기사를 보니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삶을 한 시간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불안하면서 두렵기도 하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두 기사는 상반된 내용이었는데 의미도 달랐다. 해외에 여행을 가는 가족의 기사에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경비가 너무 들어서 행복하지 않다는 내용이었고, 이제 죽음을 앞둔 23살의 유튜버는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고 눈을 감을 수 있어서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도대체 인간의 행복이란 뭘까.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행복이라는 건 멋진 몸매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날씬하고 근육이 좋은 멋진 몸매는 그걸 유지하기 위해 매일 몇 시간식 운동을 한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이 신기루는 도망가고 만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유지하기란 행복에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노력을 많이 해야 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고 어렵다. 행복은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난 행복보다 이번 행복이 훨씬 크고 넓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어제 기사에 난소암 4기 판정을 받았던 23세 그 유튜버가 세상을 떠난 기사가 났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준 모든 이들 덕분에 행복하다고 하며 눈을 감았다. 행복이란 뭘까. 23살에,, 너무하지 않은가.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면서
마음의 한구석이 아직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어른들과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9살의 점잖은 소년의 우정을 그렸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다시 보니 예전만큼 감흥은 없다. 철없는 어른과 철이 들어버린 소년의 이유는 비슷했다. 왜 철이 없는지, 왜 철들어 버렸는지, 그 이유는 같았다. 두 사람은 마사오의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며 아직 아이로 남으려는 마음이 많은 어른들과 함께 어울린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는데 마음이 통하고 노는 게 재미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기적이다. 요즘 공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취준생을 보면 공부는 너무 힘들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의 어려움을 알아준다. 작은 선물에 크게 기뻐하고 아프면 챙겨주는 친구들. 이런 친구들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막막한 취업 문턱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러나 인고의 노력 끝에 시험에 합격해서 취업이 되면 그런 불안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반나절 이상 마음이 맞지 않고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매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불안이 있던 공백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게 된다. 운이 나빠 성적인 희롱을 당하고 나면 더 이상 여기는 내가 바라던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만다. 기적은 그렇게 현실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마사오는 과묵하고 어른 같은 9살이지만 생판 모르는 형들을 만나서 실컷 웃는다. 어른들이지만 말도 잘 통하고 노는 것도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때가 되면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간이 온다. 그때는 과감하게 사요나라 할 수밖에 없다.
마릴린 맨슨
위에서 잠깐 마릴린 맨슨을 언급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마릴린 맨슨의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이런 목소리, 목을 긁어서 내는 이런 소리를 아주 좋아한다. 록에 미치도록 딱 맞게 장착되는 강렬한 소리다. 그러니까 인간의 목에서 이런 소리가 난다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인 것이다. 이렇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이다. 20 초반에서 중반 그 언저리다. 그리고 연습과 피나는 노력을 하면 30대까지 이어지지만 더 이상 하게 되면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밴드에게도 타격이 오게 될 수도 있다. 엑스제팬의 히데가 이런 목소리였다. 굉장했다. 특히 다우트 리믹스 록 버전에서 첫 인트로 부분은 마릴린 맨슨의 더 돕쇼에서도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서태지도 울트라맨이야 앨범을 들고 나왔을 때 이런 목소리였다. 강력했다. 서태지가 강력하게 목소리를 긁어서 노래를 부르다니! 우리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드래곤 역시 목소리를 긁어서 노래를 부른다. 역시 멋지다. 지디의 무대를 보면 록적이다. 록 스피릿이 외국의 록밴드만큼 강렬하다. 지디를 뒷받침하는 밴드들 역시 드럼과 일렉 기타로 록 사운드를 뿜어낸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적 뿌리가 록인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지드래곤은 음악도 스타일도 멋지다. 잘 다듬어진 화초 같은 아이돌이 쏟아지는 한국에서 나올 수 없는 드문 케이스다. 아무튼 마릴린 맨슨의 맨 얼굴은 아마도 텍사스 주 어디 시골에서 아버지 차에 올라서 멍하게 노을을 바라보는 미국 소년의 얼굴 같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릴린 맨슨이 성폭행 범죄에 휘말렸다. 마릴린 맨슨을 고소한 사람은 ‘왕좌의 게임’에서 조프리에게 벽에 과녁처럼 화살이 몸 여기저기에 꽂혀 죽은 시녀 역이었던 에스미 비앤코. 2월에 성범죄 고소가 이루어졌고 그 내용만을 보자면 마를린 맨슨은, 본명이 브라이언 워너는 그녀를 10대 때부터 그루밍하고 몇 년씩이나 끔찍하게 학대를 했다고 했다. 지금 현재 마릴린 맨슨은 자신의 개인비서, 예술가 등 여섯 명이나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sns에 그런 사실을 공유했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브라이언의 변호사는 터무니없는 비앙코의 재정적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비앙코 측의 변호사는 브라이언 워너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잠도 재우지 않고 술과 마약만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마릴린 맨슨 하면 예전에 괴기하고 강렬한 록을 하지만 모친에게는 아주 잘하는 효자라는 말이 있었다. 또 비앙코를 만나기 전에는 지구에서 가장 예쁘다는 디타 본 티즈와 2006년에 결혼을 했었다. 헤어질만해서 헤어졌겠지만 아니 왜. 디타 본 티즈는 패션계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 중 한 명인데 스타일이 끊임없이 아주 확고하다. 무대 위나 일상이나 거의 변화가 없는 스타일이다. 또 너무 늙지 않아서 오히려 더 무섭기까지 하다는 그녀가 마릴린 맨슨의 어떤 점을 봤을까. 하지만 그건 두 사람만 아는 사실이고 이 사실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서 진실에 다가가려고 하면 진실이란 사실과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짙다. 마릴린 맨슨은 뮤직 비디오 보는 재미가 있다. 그의 뮤비는 광고보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충격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눈치 보지 말고 글을 쓰자
여기서 말하는 눈치는 타인에게서 느끼는 눈치 보다 자기 자신의 눈치를 말한다. 자신이 자기에게 보는 눈치, 자기만의 눈치, 자신이 검열을 통해 눈치는 보는 것을 말한다. 6월 1일까지 공모전 마감인데 두 달 전에 와서 아직 처음을 시작하지 못했다고 하는 녀석의 말을 들었는데 아직도 몇 줄 적지 못하고 고민만 한다고 했다. 속으로 때려치워라. 쓰기 전에 왜 생각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적고 보면 글이라는 건 어떻게든 써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글은 알아서 써진다. 다 쓰고 난 뒤에는 공모전 마지막 날까지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면 된다. 머릿속에 써야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싶을 때 바로 적지 않으면 어느새 다른 생각이 그 생각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온다. 그것의 반복적 순환이 계속된다. 왜 자꾸 잘 쓰려고 할까. 물론 잘 써야 하겠지만 잘 쓴 글은 이미 다 출판되어서 세상에 나와있다. 사람들은 이름도 없는 무명의 잘 쓴 글보다 유명한 작가들의 글을 읽을 뿐이다. 그러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 누가 보던 말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쓰면 된다. 타인이 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자신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게 되면, 자신과 마주하면 꼭 타인이 나의 창작물에 크게 관심이 없더라도 나 자신이 나의 글을 통해서 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 하루에도 인터넷에는 수천 개의 글이 올라온다. 아니다, 수만 건의 글은 올라올 것이다. 그중에 중앙매체의 기고 란에 제대로 편집이 되어 제대로 실린 제대로의 칼럼도 수두룩하다. 그런 좋은 글도, 잘 쓴 글도 사람들은 대부분 읽지 않는다. 끊임없이 쓰고 버티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글을 발견하는 자신만의 기쁨을 느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한계를 느꼈을 때 글쓰기를 함으로 나의 일부가 모든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굉장한 일이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중략] 잘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김영하 [말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