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 자주 오는 사람이 있다. 많고 많은 죽 중에 늘, 언제나 호박죽만 먹는다. 그 사람은 작가라고 한다. 말수가 없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와서 호박죽을 주문해서 천천히 먹고 간다. 작가는 60대 정도로 보인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작가라고 해도 남자는 20년 전에 단편 소설집을 한 권 발표했을 뿐이다. 그 뒤로는 전혀 글을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니 글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 이후 발표된 글은 없다고 한다. 작가는 호박죽을 먹는다는 느낌보다 조용하게 배 안에 그 음식을 채운다는 기분이 들게 먹었다. 작가는 내가 가게에서 일하기 훨씬 전부터 왔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 작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 작가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작가는 늘 앉는 자리가 있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드는지 꼭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거기에 앉았다.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으면 밖의 의자에 앉아서 그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렸다. 사장님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작가가 오는 시간에는 될 수 있으면 그 자리를 비워두려 했다. 하지만 작가는 자주 왔지만 매일 오지는 않았기에 그 자리에 손님이 앉는 다고 하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작가는 그 자리 때문인지 언젠가부터는 이른 오전에 오기 시작했다. 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에 오기도 했다. 와서는 느긋하게 앉아서 호박죽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작가는 음식을 재촉하지 않았다. 작가가 늘 앉는 자리는 비워두기는 공간이 남아 돌아서 2인용 작은 테이블을 두었는데 작은 창이 있어서 밖으로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이곳은 작은 해안이 있는 바닷가로 밤이 되면 해안의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왔고 이른 오전까지 불을 밝혔다. 작가는 호박죽이 나오기 전까지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작가는 늘 호박죽만 먹었는데 질릴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죽은 본사에서 재료를 받아서 죽을 만들었지만 호박죽은 사장님이 재배한 호박으로 호박죽을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사장님이 말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호박죽만을 먹는다고 했다. 어느 날은 소주를 시킬 때가 있었다. 소주를 마실 때에는 꼭 두 병을 마시는데 한 병은 약 3분의 2 정도를 남기고 갔다. 소주를 마시면서 크으 하는 추임새 같은 건 내지 않았다. 술도 취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시간을 들여 마셨기 때문이다. 작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인사를 건넨 사람 중에는 작가의 맞은편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는 이도 있었다. 작가는 거의 표정이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은 작가의 팬이라며 작가의 책을 꺼내 사인을 부탁한다고 했다. 작가는 난처해하는 표정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하더니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호박죽의 색을 좋아해요.”


 어느 날 작가는 사장님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장님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한 번 지었다. 단골들은 주로 오전에 온다. 작가도 이른 아침에 와서 호박죽을 먹고 갔다. 나는 작가를 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이른 오전으로 바꾸었다. 저녁보다 손님도 많고 일도 많아서 더 힘들었지만 작가를 보기 위해서는 이른 오전에 올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도 작가와 비슷한 연배로 어린 시절 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게에는 사장님이 살뜰하게 써 놓은 죽에 대한 설명이 문학적이었다. 사장님은 작가의 소설집을 읽었다고 했다. 나도 그 소설집을 읽고 싶었지만 절판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그 소설집을 빌려 주었다. 나는 단편소설집을 읽고 더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5편으로 된 단편소설은 주인공들은 전부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이야기는 작가와 작가의 부인, 그리고 작가의 자식의 이야기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궁금해서 작가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어떤 결계를 쳐 놓은 것처럼 호박죽만 갖다 주고 나면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작가는 호박죽을 즐긴다는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작가의 소설 중에 ‘슬픔에 기대어 위로받는 건 아무 인간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은 나의 내부 속 어떤 부분을 계속 두드렸다. 작가는 어디에 살까. 이 근처에 살까. 자주 혼자서 호박죽을 먹으러 이른 아침에 오는 것을 보니 독신자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닐까. 부인은 어디 갔을까. 첫 소설집이 나온 후 더 이상 작품이 발간되지 않은 걸로 보아 다른 일을 하며 지내는 것일까. 그건 알 수 없다. 나는 작가의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에 두 번째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거기에는 아내가 좋아했던 음식에 대해서 나왔다. 물론 소설에서는 아내라는 칭호는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나왔다. 남자가 그 음식을 먹고 있으면 여자의 창자와 간 따위를 잘 갈아서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 음식은 죽처럼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흐물흐물한 것이며 색은 노랗다고 했다. 정확하게 호박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건 호박죽에 가까웠다.


 소설 속 여자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서로 사랑을 했고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서로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했다. 아내에게 예쁜 집을 선물하는 게 남자의 목표였다. 아내는 남자를 위해 식사를 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음식에 대해서 일절 맛없다고 하지 않았다. 음식을 먹고 짜네, 맵네, 밍밍하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맛있게 먹었다. 그런 남편이 좋아서 아내는 매일 열심히 장을 봐서 남편의 식사를 만들었다. 남편은 미소로 아내와 식사를 했다. 매일 맛있는 표정으로 음식에 대해서 맛없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남자는 회사, 집, 회사, 집이었다. 주말에도 회사에서 일을 했다. 아내가 같이 보내자 하면 음식을 맛있게 먹던 표정으로 집을 장만해서 아내에게 줄 거라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어느 날 여자의 어머니가 집으로 왔다. 사위에게 줄 거라며 닭을 삶을 거라고 했다. 닭을 삶는 동안 여자는 남편에게 내놓은 식사를 어머니에게 내주었다. 어머니는 그 음식을 맛보고는 아니 이렇게 간이 안 되어 있어서 어떻게 먹었니?라고 했다. 그녀가 만든 음식은 전부 너무 짜거나, 너무 간이 안 되어 있어서 먹을 수 없는 음식들뿐이었다. 여자는 어릴 때 식이장애를 한 번 겪었다. 다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미각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남편이 늘 짓는 그 미소가 이상하게 보였다. 맛없는 음식을 맛있다고 억지로 웃으며 먹는 그 표정. 쉬지 않고 회사를 나가버리는 이유가 자신의 음식 솜씨가 없어서 그렇다고 믿게 되었다. 그 뒤로 아내는 사라졌던 식이장애가 심해졌다. 아내는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점점 퀭해지고 말라가는 자신의 모습도 보기 싫어서 아내는 구석진 곳으로 숨기만 했다. 남자는 그럼에도 그 미소를 지으며 밖에서 사 온 음식을 아내에게 먹였다. 아내는 남편의 그 미소를 보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그 이상하고 일그러진 미소, 늘 괜찮다고 하는 미소, 남편이 사 온 음식을 먹고 아내는 구토를 하고 오바이트를 했다. 남편은 아내의 구토물을 그릇에 담았다. 그날도 아내는 씻지 못해 냄새나는 몸으로 어두운 방구석에서 쭈그리고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들어와 노란색의 흐물렁 거리는 음식을 숟가락으로 떠서 아내의 입으로 넣어 주었다. 그 음식을 먹는 아내는 더 이상 구토를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 노란색의 음식을 다 먹으며 소설은 끝이 났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재미있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지만 섬뜩했다.


 더 섬뜩한 소설이 있었다. 5편의 소설 모두가 노랗고 흐물렁거리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호박죽이라고 대 놓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호박죽이라는 건 읽어보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소설이었는데 끔찍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서 빨려 들어간 소설이었다. 한 비빔밥 식당의 이야기였다. 비빔밥 식당은 치료를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주 외전 곳에 위치한 식당은 주택풍 건물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중 2층까지 있고 음식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와서 이 식당의 비빔밥을 먹고 조금씩 식사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갔다. 그런 소식이 알음알음 처져 외진 곳이지만 차를 몰고 일부러 이곳까지 왔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식당은 경치가 좋아서 사람들은 밥만 먹고 돌아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마음의 안정도 취했다. 식당의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물이 맑아서 산천어도 살고 있었다. 3층짜리 식당은, 2, 3층은 숙박이 가능했다. 물론 비용이 꽤 들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부유층들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엄선된 재료를 가지고 만든 신선한 비빔밥을 먹으러 오는 것이지만 비빔밥을 먹고 나오는 후식 때문이었다. 후식이 노란색의 물컹한 음식으로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었다. 그 음식을 먹는 순간 우황청심환을 먹은 것처럼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대외적으로는 괜찮지만 가정적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이 상태라면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돈은 있을 만큼 가지고 있었다. 다 쓰지 못하고 죽을 부유층들은 속사정은 그만큼 따라주질 못했다. 아이들 중에서 신경이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끌어안고 있는 집이 많았다. 대마를 넘어 약을 하고 자동차로 질주하여 사람을 치어 받기도 했고 그대로 아무 집이나 들어가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음식에 대한 장애가 깊었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음식을 거부한다. 그러니 약을 해서 그 모든 것을 해소하려는 부유층 자제들이 많았다. 이 식당을 알게 된 후에는 몸도 균형이 잡히고 체력이나 체격도 좋아졌다. 부모들은 이 비빔밥 식당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돈을 더 지불하고서라고 후식을 악착같이 먹었다. 하지만 이 후식에는 비밀이 있었다. 후식의 주 재료가 되는 호박은 인간의 몸에서 딴 호박이었다. 사람을 땅에 밤쯤 묻고 거름과 물을 주어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묻어 놓은 사람의 몸과 얼굴에서 호박에 자랐다. 주로 집을 나온 아이들이나 자살을 하려는 젊은 사람을 잡아와서 땅에 묻고 채소화 시켰다. 반은 식물상태로 반은 인간의 상태로 있었다. 묻어 놓은 사람은 미미하지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하는 건 힘들었다. 거름만 잘 주면 사시사철 끊임없이 호박을 자라게 했다. 비빔밥의 재료 역시 그랬다. 거기에서 한 손님으로 온 부유층의 아들이 노란색의 음식에 매료되어 자신이 땅속으로 들어가 몸이 점점 채소화 되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 과정이 몹시 끔찍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과 식물과의 혼합이었다.


 첫 번째 소설에는 음식 맛을 못 느끼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무래도 젊은 시절의 작가 자신은 것 같았다. 주인공은 전혀 음식의 맛에 접근할 수 없었다. 미각을 상실한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노란색의 액체에 가까운 음식을 먹기까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소설에는 밥을 먹지 않아서 마른 체형을 하고 있던 여고생은 오히려 그 몸매 때문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수학여행을 가게 된 날, 여고생들을 미워하던 반 친구들이 마시는 음료에 수면제를 탔다. 경주까지 가서 불국사를 돌아보던 중에 여고생은 몸이 나른하고 잠이 자꾸 오는 것을 느끼며 어딘가에 앉아서 그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무도 없고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여고생은 한 사찰의 방에서 일어났는데 몸을 일으키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고생은 무서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쓰러진 여고생을 안고 온 사람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여고생의 몸에 독이 있으니 그 독을 다 빼내야 한다고 했다. 여고생은 스님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몸에서 기운이라는 것이 몽땅 빠져나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님의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받은 덕에 다음 날 새벽에는 일어날 수 있었다. 맑은 공기를 마셨다. 공기가 맛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알았다. 스님은 아침식사 시간에 여고생에게 노란색의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는 죽을 주었다. 그 죽에는 냄새라는 것이 소거되어 있었다. 여고생은 음식을 먹는 것이 고욕이었다.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아주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점점 음식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속의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여고생은 스님이 만들어준 노란색의 죽을 먹고 이 세계가 더 이상 허무한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만 눈물이 죽 흘러내렸다. 여고생은 그곳에 남아 비구니가 되기로 했다.

 

 또 다른 소설은 삶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주인공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믿음을 가지려 하지만 죽음의 손은 주인공에게 점점 다가왔다. 믿음이 종교나 사람이 아니라 노란색의 음식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사람들은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살려고 하는지, 왜 사람들은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만 하는지 주인공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려고만 하는지 주인공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내는 납득시키고, 남편을 납득시키고, 아이들을 납득시키고, 선생님을, 학생을, 사장을, 직원을, 동료를 납득시키는데만 시간을 소비했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다가온다는 두려움에 떨던 어느 날 노숙자가 밥퍼에서 얻은 노란색의 액체에 가까운 음식을 내밀었을 때 그걸 먹고 알게 되었다. 어떤 믿음이라는 것이 그 노란색의 음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노란색의 음식을 한 숟가락 떠먹을 때 ‘혼자다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또 한 편의 소설은 음식 맛 자체를 못 느끼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무래도 작가 자신인 것 같았다. 주인공은 전혀 맛이라는 것에 접근이 불가능했다. 미각을 상실한 채 태어난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노란색의 액체에 가까운 음식을 먹기까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다섯 편의 소설들은 전부 허무와 그 허무에게 둘러 쌓인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이야기였다. 인간은 마치 태어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관념이 축복이라고 부여받았다. 이 세상의 누군가는 식사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와 섞여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간혹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나는 작가의 삶이 궁금했다. 작가의 얼굴은 어떠한 결락을 한껏 그려놓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간혹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그럴 때 더 얼굴이 안돼 보였다. 작가의 삶을 글로 써보고 싶었다. 나도 소설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욕망처럼 들끓었다. 왜냐하면 작가는 호박죽을 깨끗하게 비웠지만 점점 생에 대한 애착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작가는 왜 이후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 걸까. 인간의 허무란 무엇일까. 나는 허무에 대해서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허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허무는 우울과 다르겠지, 그리고 슬픔과도 다를 거야. 그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게 나의 한계다. 허무라는 건 그저 텅 빈 공동 같은 마음일 거라는 모호한 상상만 할 뿐이다. 작가에게 허무에 대해 묻고 싶었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허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어째서 그런 소설을 썼을까. 어째서 거의 매일 같이 호박죽만 먹을까. 어째서 호박죽을 먹는다, 라는 느낌보다 위장에 그저 넣어 둔다, 라는 느낌으로 보일까. 60대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작가는 사장님이 가끔 말을 시키면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그는 주로 예, 아니오, 로 대답을 할 뿐 길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작가가 호박죽을 먹는 모습은 카메라가 확대를 한 것처럼 크게 보였다. 숟가락으로 호박죽을 떠서 수염이 군데군데 잡초처럼 난 입을 움직여 호박죽을 먹는 장면이 꼭 티브이 화면 속에서 확대한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부드럽고 달콤한 노란색 호박죽이 작가의 입으로 들어가서 혀 위에서 사라지는 그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사장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작가만 오면 나는 딴 사람이 된 것 마냥 멍하게 작가가 호박죽을 먹는 모습을 봤다. 마치 그래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다. 거친 무엇인가로 피부를 많이 문지른 것 같았다. 아니다, 그 정도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벽돌로 몸을 갉아 버린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딱지가 앉고 또 괜찮아질 만하면 벽돌로 피부의 그 자리를 문질러 버린 것처럼 형편없었다. 피부는 나이 듦을 피해 갈 수 없어서 늘어져 탄력도 이미 잃고 있었다. “작가님, 몸은 왜 이런 거죠?” 작가는 나의 물음이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천장을 보며 누웠다. 나는 말이 없는 작가가 순간 너무 미웠다. 이루 말도 못 할 정도로 미웠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랬냐고. 왜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몸을 이렇게나 방치를 하느냐고 왜! 왜! 왜!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말았다. 눈물이 이렇게나 많이 나올 줄 몰랐다. 눈물은 흘러 가슴으로 떨어졌다. 작가는 내가 울도록 가만히 내버려 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작가가 미웠지만 그래서 고마웠다. 작가는 나의 가슴을 안아준다든가,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나의 몸을 더듬고 탐닉하고 사정까지 해버린 주제에. 나는 엉엉 울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허무를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할까.


그때 작가가 호박죽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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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을 먹다 떠오른 글을 적어 보았다. 잘 다듬어서 중편소설로 써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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