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것들에 대하여
잊혀지는 것들 중에는 골목이 있다. 골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다. 골목이 잊혀지는 것들이라면 골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 역시 잊혀지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죽고 나면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면 매일, 매시간 그 사람을 기억할 것 같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게 된다.
봄이 세상에 도래하면 세상의 모습은 확 바뀐다. 골목의 모습도 달라진다. 골목은 겨울 내내 쾡한 모습을 하고 있다가 봄의 손길이 닿으면 골목의 구석진 곳에서 찬미가 흐르고 봄 향기에 길고양이들이 봄햇살을 받으려고 어딘가에서 슬슬 기어 나온다. 4월 중순이 되면 딱딱한 시멘트 사이에서 생명이 몽골 몽골 얼굴을 내민다. 옥상과 마당에는 빨래를 촥촥 펴서 빨랫줄에 널고 바짝 마르기를 바라는 엄마들이 보이고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골목에 나와서 우르르 소리를 지르며 논다. 골목의 가로등 밑에서 첫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헤어지기 싫어 땀이 밴 손으로 그녀의 손을 놓지 못하던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도 이제는 다 잊혀졌다.
서울은 아직 골목이 많다. 골목의 도시가 서울이기도 하다. 서울의 골목골목을 따라서 사진을 촬영하며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골목에는 사람들의 삶이 녹록히 스며들어 있다. 골목에는 사람들의 소리가 있고, 따스함이 있고, 공기도 다르다. 골목이 바로 삶의 얼굴이기도 하다. 서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말 그대로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내가 있는 도시도 골목이 많았지만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이런저런 이해타산과 맞물려 아파트가 끝없이 세워졌다. 도대체 아파트의 모습은 어디를 가니 비슷한데 계속 하늘을 뚫고 오른다. 사진 속의 골목은 이제 싹 다 없어졌다. 골목은 가난과 밀접하고 가난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곳이 골목이다. 그래서 지금은 전부 허물고 거대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봄이 되면 골목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 놓은 덕분에 지금은 사라지고 잊혀진 골목을 볼 수가 있다. 골목이 소거되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다. 철거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홍역을 앓는다. 주민들과 건설사, 시의 공무원들이 1년이나 2년 가까이 붙어서 대치를 이룬다. 그러다가 보상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론이 나면 철거명령이 이루어지고 보상금을 받고 골목을 빠져나간 집에는 페인트로 ‘철거’라고 낙인찍어 놓는다. 모든 주민들이 다 빠져나가는 동안 골목은 휑해지며 고양이들이 일정기간 점령을 하고, 멀쩡하던 유리창 같은 것들이 시간을 들여 깨지거나 박살이 난다. 그리고 개발이 시작되면 전부 허물고 벌판처럼 만든 다음 입찰을 따 낸 건설사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공사에 돌입을 한다.
그러고 나면 골목은 완전히 잊혀지게 된다. 잊혀지는 것들에 대하여는 성시경의 노래를 들으면 잘 알 수 있다. 성시경이 스물일곱에 부른 ‘잊혀지는 것들에 대하여’를 듣고 있으면 가사의 이야기가 영화 필름처럼 테이크 1, 2, 3이 되어 촤르르 지나간다.
https://youtu.be/ifDpV0Tr4bY
눈물 젖은 영화라도 본 날엔
온종일 여운이 맘에 남아
텅 빈 방구석에 몸을 움츠리곤 해
죽을 만큼 서로 사랑해도
헤어진 주인공 핑계 삼아
멋있는 이별을 앓는다고 애써 날 위로해
먼지가 쌓이듯 진한 그리움은
몸서리치며 쓴 눈물로 거부해도
갈라져버린 내 맘 그 틈에 벌써 자리 잡아
빛바랜 추억을 내게 심어놓고
누구도 잠시도 들리지 못하게
난 너라는 틀 안에 머물며 더 시들어 가겠지
날 바라보던 따스한 너의 두 눈 땀이 쏙 배도록
꼭 잡은 내 손을 못 놓고 어쩔 줄 몰라서
발그레 물들던 네 얼굴
잊혀 지기엔
너무 아까운 날들 사라져 가기엔
더 소중한 우리의 추억을
조금씩 흘리는 널 위해
내가 모두 주워 간직할게
진한 커피라도 마신 밤이면
새벽이 온 소릴 듣고서야
힘없이 들었던 전활 내려놓곤 해
어쩜 너도 나와 같을 거란
쓸쓸한 걱정을 핑계 삼아
얼굴도 맘도 젖은 나를 애써 또 위로해
먼지가 쌓이듯 진한 그리움은
몸서리치며 쓴 눈물로 거부해도
갈라져버린 내 맘 그 틈에 벌써 자리 잡아
빛바랜 추억을 내게 심어놓고
누구도 잠시도 들리지 못하게
난 너라는 틀 안에 머물며 더 시들어 가겠지
늘 아쉽기만 했던
너의 집 골목 첫 입 맞추던 날
놀란 맘 숨겨 덤덤한 척
어설픈 인사 뒤 잠 못 든
그날 밤의 나를
잊혀지기엔
너무 아까운 날들 사라져 가기엔
더 소중한 우리의 추억을 조금씩 흘리는
널 위해 난 너만을 위해
날 바라보던 따스한 너의 두 눈 땀이 쏙 배도록
꼭 잡은 내 손을 못 놓고 어쩔 줄 몰라서
발그레 물들던 네 얼굴 잊혀 지기엔
너무 아까운 날들 사라져 가기엔
더 소중한 우리의 추억을
조금씩 흘리는 널 위해
내가 모두 주워 간직할게
성시경의 노래들은 가사들이 참 좋다. 요즘도 그렇지만 초기의 노래들은 꼭 문학작품을 보는 듯하다. 멈춘 시간이 우리 뒤에서 따라온다던가, 그런 가사가 많다. 봄이 되면 추억을 반추하고 그 추억 속에서 끈을 잡아당기면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기도 하지만 마음 구석에서는 또 아프기도 한 기억이 딸려 나온다. 그래서 봄은 잔인하다. 잊혀지는 것들은 칼로 두부를 싹둑 자르듯 단번에 잊어버리지 않고 아스라이 잊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