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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키 1 - 스티븐 킹 장편소설 ㅣ 밀리언셀러 클럽 8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스티븐 킹의 소설을 접한 것은 대략 14,5년 전쯤. 어학연수 받으러 갔던 나라에서 우연히 사게 된 한 권의 페이퍼백 소설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왕무식하여 스티븐 킹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다만 표지가 그럴듯하게 음산하여 골랐던 기억이 나는데. 여튼 처음 몇 페이지를 보고 그때의 그 짧은 영어 실력에도 사전을 무시하고 읽어내려가게 만든 그의 필력에 황홀해하며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던 기억이 난다. 그후로 스티븐 킹이란 작가에 대해 조금 공부해보니 전세계 독자들이 장시간 비행기 여행을 하게 될 때 가지고 가는 책 1위가 킹의 소설이란 걸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10시간이 넘는 비행기를 탈 때는 항상 킹의 소설을 가방에 챙기곤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킹에 대한 애정은 드림 캐처 이후로 약간 시들해졌다. 그러다 점점 게을러지기 시작하면서 소설보다는 영화로(미저리-쇼생크 탈출-그리마일과 같은 작품들로) 그를 만나게 됐다. 이 와중에 항상 드는 생각은 킹은 최고이자 따봉이자 짱이라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로 이상한 점은 세계 초특급 대박을 내는 이 작가의 책이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리 열렬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점은 아직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긴 하지만... 그러다 2년 전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으며 셰익스피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다작의 제왕이자 이야기의 마법사의 창작 비결을 잠깐 훔쳐보고 즐거워하기도 했고 중간 중간 '애완동물 공동묘지'도 읽고 셀도 읽기도 했지만 처음과 같이 무조건 반한 감정은 아니었는데.
며칠전 '듀마 키'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래서 오늘 아침 책을 잡았다. 처음에는 초반만 살짝 읽어보고 일을 하자는 속셈이었는데 읽다보니 점심도 건너뛰고, 가끔은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또 가끔은 실제로 심장이 쪼그라들 만큼 섬뜩한 공포에 시달리면서 책장을 넘겼다. 아침 먹고 9시 30분에 시작한 독서는 점심도 건너뛰고 오후 6시가 넘어서 드디어 끝장을 넘기게 됐다. 다 읽고 나니 지독한 허기가 밀려왔다. 마치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나면 찾아드는 엄청난 허기에 익히지도 않은 생 스테이크를 씹었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그리고 드는 생각은 왕의 귀환이라는 출판사 선전 문구가 과장이 아니었다는 반가운 확인이었다. 킹의 이번 작품은 이를테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간의 문학적 성과를 '해변의 카프카'라는 소설에 쏟아 부은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내가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듀마 키'는 킹의 작품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이라면 100% 새롭고 신선하고 충격적인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 초반부에 나오는 교통사고에 이은 재활과 고통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충분히 맛본 내용이고,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아픔은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묘사됐으며, 듀마 키를 둘러싼 악마란 존재는 킹의 작품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악역이고. 듀마 키 해변의 여왕과 그 여왕을 섬기는 전직 변호사이자 집사와의 관계는 돌로레스 클레이븐에 나오는 두 여인의 관계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번 작품 '듀마 키'는 그 모든 유사성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후 정교한 플롯으로 가늘고 촘촘하게 각각의 캐릭터들을 단단하게 엮었고 그러면서도 킹 특유의 공포와 유머감각을 감칠나게 정확히 반반으로 버무려 놨다.
그 결과 듀마 키를 읽으며 나는 주인공이 머무르고 있는 별장 빅 핑크 밑에서 수런거리는 조개들의 수다가 들리는 듯 했고, 우리 집 아파트 13층 창문으로 플로리다의 오렌지와 적색 석양이 밀려드는 착각이 들었고, 주인공 에드거가 매일 아침 하는 해변의 산책길에 밟히는 모래가 내 발치에서 버석거리고, 사고로 잃은 오른쪽 팔이 가려워 미치는 주인공처럼 갑자기 내 한쪽 팔이 스멀스멀 가려워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듀마 키’는 한 마디로 소설 쓰기라는 분야에서 절정의 기량에 이른 장인이 그 기량을 한껏 발휘한 작품이다. 어쩌면 스티븐 킹은 다시는 이런 작품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예감마저 들게 하는 소설. 그래서도 이 작품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이 한 권의 소설 속에 킹의 재능의 정수, 그 무궁무진하고 광막한 상상력의 세계가 아낌없이 펼쳐져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해변에서 읽어야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