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읽은 한 시나리오 작가의 연애 이야기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연애와 사랑에 관한 시나리오 전문작가인 그녀가 요즘은 글을 못 쓰고 있다고. 왜냐. 요즘엔 사랑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니,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두 눈치 보고 계산기 때리느라 너무 바빠서 정작 속속들이 내주고 빠져드는 사랑을 하지 않는 시대에 무슨 사랑 영화를 만들겠냐고. 그 말에 깊이 공감한 적이 있었다.
어제부터 잡은 이 책 '막스 티볼리의 고백'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이야긴줄 알았더라면 맹세코 책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또 하나의 멋진 이야기를 못 읽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내 인생 살아가는 데 별로 달라지는 건 없지만. 어쨌든 태어날 때 70세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점점 어려지는 남자라는 설정. 그래서 70 나이의 절반이 되는 35세에는 딱 제 나이로 보이는 육체를 갖게 된다는 주인공을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이 내 호기심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그래서 유달리 힘들었던 이번 마감을 끝내고 동네 서점에 달려간 나는 사탕 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달콤하고도 어려운 고뇌에 시달리며 표지도 화려한(요새 책들은 왜 이리 표지가 이쁜지 원) 신간 소설들을 하나하나 고르다가 마침내 올 해 초부터 읽고 싶었던 이 책을 사고야 말았다.
고백컨대 소설의 첫 부분은 읽기 쉽지 않았다는 걸 정직하게 써야 할 것 같다. 그동안 한국 소설과 일본 소설 그리고 외국 소설은 주로 스릴러나 공포와 추리물만 보던 터라 주인공의 심리와 배경을 수놓듯이 길고도 아름답게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게 묘사한 첫 부분을 읽으며 그냥 덮을까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필생의 연인 엘리스를 만나 그녀 옆을 맴도는 주인공을 보며 마치 롤리타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늙은 남자인 주인공이 14살 소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면서도 그 뜨거운 열정을 고백하지 못하고 소녀의 어머니와 엉뚱하게 엉키게 되는 줄거리가 언뜻 롤리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 막스 아버지의 신비로우면서도 수상쩍은 행방불명 이후 이야기는 탄력을 받아 박진감이라고까지는 말 못해도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점점 호흡을 가다듬어가는 이 소설은 중반부 이후로 갈수록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판타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여주인공 앨리스의 운명을 보면 시대를 앞서가서 너무 일찍 집을 뛰쳐나간 입센이 낳은 여인 노라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후반부로 가서 아들을 보고도 아비라 밝히지 못하는 주인공의 서글픈 운명이 홍길동을 살짝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거, 왜 있지 않은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슬픔 비슷한 슬픔이 이 소설에도 있다. 그리고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해서 자식을 낳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은유한 부분도 나온다. 걸출한 작가들이 모두 극찬했다는 이 소설은 읽어보면 왜 그런 칭찬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말이 가까워질수록 내 눈시울을 가렵게 만든 건 바로 시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도 공평하지 않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들자면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서글픔, 인간조건의 가장 큰 비애를 이토록 뛰어난 플롯에 담아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놀랬기 때문이다. 막스 티볼리의 고백은 슬픈 소설이며 사랑 소설이며 시간에 관한 소설이다.
그리고 사랑을 할 수 없는 메마르고 불안한 심장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주는 플라시보 즉 위약과 같은 소설이다.
'나는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다 해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란 거짓 효과를 주는 소설.'
소설을 읽고서 막스 티볼리의 슬픈 운명에 눈물 흘려준다면 당신도 위약 효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