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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8

프랑스어로 쓰시오: 아쉽게도 나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그나마 익숙한 영어로 글을 써보았다. 1976년, 차학경이 프랑스에서 영화 이론을 공부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시기에 그녀도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이런 식으로 연습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문장을 만들고, 그것을 다른 언어로 옮겨보는 과정은 언어를 익히는 데 있어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문장들은 완벽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따라 해본다. 다음에는 프랑스어로 써보고 싶다.


1. 이것을 더 좋아한다면, 즉시 내게 그렇다고 말하세요.

-> If you prefer this, let me know right away.


2. 그 장군은 단지 잠깐 동안 이곳에 남아 있었다.

-> The general stayed here only for a brief moment.


3. 당신이 그렇게 말을 빨리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당신을 더 잘 이해했을 것이요.

-> If you hadn’t spoken so quickly, they would have understood you better.


4. 나뭇잎들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한 며칠 동안은 안 떨어질 것이요.

-> The leaves haven’t fallen yet and won’t fall for several more days.


5. 그것은 당신에게 잘 맞을 것이요.

-> That will suit you well.


6. 이 나라의 국민들은 당신 나라의 국민들보다 덜 행복합니다.

-> The people of this country are less happy than those in your country.


7. 다음 달 십오 일에 다시 오시오, 더 빨리도 더 늦게도 말고.

-> Return on the fifteenth of next month, neither earlier nor later.


8. 나는 그를 우연히 아래층에서 만났습니다.

-> I happened to meet him downstairs.


9. 근면하라: 일을 많이 할수록 더 잘 성공한다.

-> Be diligent: the more you work, the more successful you’ll be.


10. 일이 어려울수록, 더욱 명예로운 노동이다.

-> The more difficult the work, the more honorable it is.


11. 사람은 자신을 칭찬할수록, 남들은 그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덜 생긴다.

-> The more people praise themselves, the less others feel inclined to praise them.


12. 다음에는 좀 더 조용히 가시오.

-> Next time, please be a bit more qu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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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힛 맨>(Hit Man)은 2023년 개봉한 코미디와 로맨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특히, 프로이드의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가 주인공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듯한 전개는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주인공 게리 존슨(글렌 파월 분)은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경찰서의 IT 담당자로 이중의 삶을 산다. 그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경찰의 함정 수사 작전에 투입되면서 자신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설정 자체가 흥미롭다. 철학을 가르치는 인물이 가짜 청부살인업자가 되어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그에 맞는 캐릭터로 변신한다는 점에서, 그는 마치 무대 위 배우처럼 다양한 인격을 연기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의 변화는 니체의 '열정적으로 살아라'는 강의 주제와 맞물리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게리는 맡은 임무에서 러시아의 거친 남자, 유럽풍의 세련된 범죄자, 무기를 좋아하는 미국 남부의 남자로 변신하며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특히 "나쁜 파이는 없어(There’s no bad pie)"라는 대사로 대표되는 그의 기조는 그

가 내세우는 가벼운 인생 철학처럼 보이지만, 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깊이를 시사한다. 그는 단순히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들을 체포하는 존재로 자리잡는다. 이 과정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과도 연결된다. 게리가 청부살인업자로서의 새로운 자아 '론'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자아(ego)와 초자아(superego) 사이의 균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본래의 게리는 자아로서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며 살아왔지만, '론'이라는 인격은 그가 억눌러온 이드(id)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자아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영화의 로맨스 요소는 매력적인 서브플롯으로 작용한다. 게리가 매디슨(아드리아 아르호나 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이한다. 매디슨은 남편을 제거하기 위해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지만, 게리는 단순한 함정 수사를 넘어 그녀의 삶에 개입한다. 게리는 매디슨에게 그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그녀의 존재는 게리의 숨겨진 '론'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더욱 확립시킨다. 관객은 그가 단순히 범죄자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로만 보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는 타인의 삶을 바꾸는 존재로, 자신의 인생마저 바꾸는 역설적인 인물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청부살인업자는 영화에서만 존재한다"는 메시지다. 이는 다소 충격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으로 청부살인업자가 현실에도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영화는 유머와 아이러니로 전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그들에게 그런 판타지를 부여한다. 영화는 단순한 코미디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과 무기력감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게리의 변화는 칸트의 자아 이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 존재라는 인식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게리라는 평범한 인물이 '론'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고, 그 자아가 다시 그의 삶을 지배하는 과정은 자아의 유동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범한 대학 교수였던 게리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매력적인 인물로 변신하는 과정은 단순히 외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상징한다.


또한, 글렌 파월의 연기력은 이 영화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이전의 그에 대한 인상은 다소 밋밋하고 자만심이 느껴지는 이미지였으나, 영화에서 그는 능청스러운 코미디와 진중한 철학적 탐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특히, 그가 각본을 공동 집필했다는 점도 그의 잠재력을 입증하는 요소다. 단순히 외모와 매력으로만 소비되던 배우가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배우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들고 있던 "Stop Trying To Make Glen Powell Happen"이라는 피켓은 배우로서의 자기 인식과 유머 감각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하며, 관객에게 그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힛 맨>은 단순한 범죄 코미디 이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아와 정체성의 복잡한 문제, 삶의 열정과 억압된 욕망의 충돌을 다룬다. 로맨스와 범죄, 코미디와 철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단순한 웃음 그 이상을 선사한다. 과연 우리 내면에는 어떤 또 다른 자아가 숨어 있을까? 그 자아는 언제, 어떻게 깨어날까? 게리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고, 평범한 혼다를 모는 인물이다. 혼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는 가장 흔한 자동차 중 하나로, 특별히 주목받을 일이 없다. 게리는 이러한 평범함을 선택함으로써 외부의 시선을 피하고자 한다. 평범함을 선택한 그의 삶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자아 '론'을 깨우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게리의 변화를 통해 그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화려함이나 과시보다 내 안에 숨은 가능성을 찾아내는 삶. 그 가능성은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유머와 진지함의 균형을 유지하며, 관객에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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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청소부 마담 B
상드린 데통브 지음, 김희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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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흔적을 남기는 존재다. 발자국처럼 눈에 보이는 물리적 흔적부터, 기억처럼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정신적 흔적까지,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적을 생성하고 축적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적을 지우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의 실수, 아픈 기억, 혹은 단순히 낡고 불필요해진 것들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상드린 데통브의 소설 『범죄 청소부 마담 B』는 인간의 삶과 흔적, 기억과 망각, 죄책감과 구원 등의 주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블랑슈' 바르자크는 범죄 현장을 청소하며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한다. '블랑슈'는 프랑스어로 '흰색'을 의미하는데, 이는 깨끗함과 순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작가는 '흰색'이라는 상징을 통해 겉으로는 깨끗함을 유지하지만 내면의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블랑슈의 모순적인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블랑슈는 피비린내 나는 범죄의 흔적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임무다. "마지막 전체 점검만 마치면 그 아파트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있었다"는 문장처럼, 블랑슈에게 범죄 현장 청소는 단순한 일이 아닌, 과거의 사건을 종결짓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있는 행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랑슈는 타인의 흔적은 지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거는 지우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처럼 블랑슈의 이야기는 단순히 범죄 현장 청소부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뇌와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다. '블랑슈'라는 이름은 이러한 주제 의식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핵심적인 장치이며, 작가는 '흰색'이라는 상징을 통해 주인공 블랑슈의 내면세계와 작품 전체의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블랑슈는 15년 동안 완벽하게 타인의 흔적을 지워왔지만, 정작 자신의 흔적은 지우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에 붙들려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죄책감, 트라우마는 마치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그녀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특히 하얀 실크 스카프에 묻은 핏자국은 블랑슈의 정신적 상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오브제다. 그녀는 스카프를 "최면에 걸린 듯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흔적을 넘어,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며, 동시에 인간의 기억과 망각,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블랑슈는 "지워야 했던 것은 증거가 아니라 내 과거였다"고 고백한다. 범죄 현장의 핏자국을 지우는 행위는, 사실 그녀 자신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죄책감과 고통을 지우고 싶어하는 욕망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는 늘 되돌아오는 법이다"라는 블랑슈의 말처럼, 과거의 흔적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자신의 죄를 씻으려 할수록 더욱 깊은 죄책감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인간의 숙명적인 딜레마를 보여준다.


블랑슈가 기도를 모르면서도 기도하는 장면은,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그녀의 내적 투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흔적을 지우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인 청소가 아니라,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자,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의 표현인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이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보편적인 염원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범죄 청소부 마담 B』는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잔재인가, 아니면 우리 존재의 증거인가? 삶은 끊임없이 흔적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흔적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어떤 흔적은 지우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어떤 흔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우리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흔적들은, 그것이 설령 고통스러운 기억일지라도 우리를 성장시키고,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뒤따르는 법이다. 네 행동들에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야." 이 말은 마치 오래된 격언처럼 익숙하게 들리지만,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한 묵직한 울림을 준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들은 우리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며, 동시에 삶이라는 캔버스에 책임감 있는 흔적을 새겨나가는 것이라는 것을『범죄 청소부 마담 B』는 블랑슈의 삶을 통해 묵직하게 보여준다. 블랑슈가 타인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행동이 남긴 흔적들과 마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흔적들에 책임을 지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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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chan Lim 임윤찬 plays Chopin - 12 Études op. 25


그의 쇼팽 연주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 같았다. 15세 소년의 손끝에서 쇼팽의 에튀드 Op. 25의 음들이 영롱하게 빛났을 때, 나는 마치 음악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는 듯한 초월적 경험을 했다. 격정적인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겨울바람'의 강렬함과, 나비의 날갯짓처럼 섬세한 Op. 25-9의 경쾌함이 서로 다른 세계의 대조적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객석의 공기는 찰나의 정적과 폭발하는 환호의 순간을 반복했고, 나는 쇼팽의 음들이 소년의 손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임윤찬의 연주는 단순히 쇼팽의 음악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조성진의 해석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그가 만들어내는 불꽃 같은 손놀림과 폭포수처럼 몰아치는 패시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대담했다. 특히,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로 치닫는 순간은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그의 연주는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긴장을 유지했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몰입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파리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지켜보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뢰 같은 포르티시모와 속삭이듯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교차할 때마다 청중은 숨을 멈췄다. 단순한 음악 감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감하는 하나의 서사였다.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지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연이었다. 큰 키와 긴 팔로 공기를 가르며 그려내는 유려한 동작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그 힘 있는 제스처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임윤찬의 음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울리는 힘을 지닌 예술이다. 쇼팽의 음악을 연주할 때도,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도, 차이코프스키의 독주곡을 연주할 때도, 그의 음악에는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서는 고통과 슬픔, 회복과 구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이 영혼의 대화처럼 느껴졌던 이유일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나로 하여금 삶의 고통과 슬픔을 잠시 잊게 했고, 순수한 아름다움에 몰입하게 하는 초월적 경험을 선사했다. 나는 그의 음악을 통해 고통의 세계 너머에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 그의 연주 일정을 찾아보니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코스타 메사, 샌디에고, 샌프란시스코, 라 호야... 마치 캘리포니아가 나를 임윤찬의 음악 여행으로 초대하는 듯했다. 지역적으 가까운 곳에서 네 번이나 그의 연주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이 네 번의 여정이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의 음악을 따라 걷는 이 여정 자체가 예술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2월이 기다려진다.


임윤찬이라는 이름은 앞으로도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는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섰고, 그의 연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나는 그의 음악 여정을 묵묵히 응원하며, 언젠가 그의 연주를 통해 또 다른 차원의 경이를 마주하길 기대한다. 그의 음악이 나처럼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NPR의 Tiny Desk Concert에서 그의 연주를 보며 또 다른 매력에 사로잡혔다. 진지한 표정과 성실한 답변에 자연스레 마음이 기울었다. 이틀 전에 감기에 걸려 목이 아프다고 하면서도, 연주할 곡들을 차분히 소개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여러분도 즐겁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이며 미소 지을 때의 담백함과 진솔함은 그의 연주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October를 소개하며 "이 곡이 청취자들의 마음과 영혼에 가득 차길 바란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단순한 멘트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음이 유창하거나 표현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 꾸밈없음이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웅장한 콘서트홀의 폭발적인 에너지와는 달리, 이 영상에서 듣고 보는 그의 연주는 숨겨진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법 같은 선율에 흠뻑 빠져든다. 햇살과 바람, 비와 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처럼, 그의 연주는 들을 때마다 전혀 다른 빛깔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것은, 매 순간 그의 영혼과 호흡하며 살아 숨 쉬는 음악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수술 날짜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다. 회복 기간 동안 나의 친구가 되어줄 음악을 이미 선택했기 때문이다. 임윤찬의 앨범들이다.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법의 책과도 같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 누워 그의 연주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영혼 깊은 곳까지 부드러운 빛이 스며드는 듯한 위로가 전해진다. 


여기서 연주하는 곡들은 Franz Liszt: Sonetto del Petrarca No. 104, Tchaikovsky: Moment lyrique, 그리고 Tchaikovsky: “October” (from The Sea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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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2-19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제가 요즘 빠진 거.. 임윤찬이었는데.......... (하지만 곡 해석 같은 건 잘 모릅니다...) 그치만 천재의 자기몰입에 약한 편...

dbTlla 2024-12-19 20:51   좋아요 1 | URL
요즘 저도 임윤찬한테 완전 빠졌어요! 공쟝쟝님도 임윤찬에 빠져있으시다니, 우리 이제 친한 사이 맞죠? ㅎㅎ 특히 연주할 때 그 몰입하는 모습이 압도적이죠. 곡 해석이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임윤찬의 몰입하는 표정과 손끝의 움직임은 해석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말씀처럼 저도 천재들의 몰입에 약한 편이라... 우리가 은근히 통하는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공쟝쟝님은 어떤 연주가 인상 깊으셨나요? 함께 그 느낌을 나누고 싶어요... 😊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저력을 세계에 알린 쾌거이자,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그녀의 작품을 아껴온 독자로서 깊은 감동과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수상은 더욱 빛나는 희망의 등불처럼 느껴졌다. 한강은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섬세하고 시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며, 인간의 고통과 존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본 글에서는 한강 문학의 핵심 주제인 트라우마, 고통, ‘몸의 언어’ 등을 중심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임레 케르테스, 알베르 카뮈, 프리모 레비 등 고통과 트라우마, 인간의 존엄을 탐구한 대표적인 작가들과 비교 분석하여 한강 문학의 독창성과 문학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개인의 경험, 특히 여성의 성적 고통을 통해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고, 임레 케르테스는 홀로코스트 경험을 바탕으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탐구하며,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 경험을 증언하며 인간 존엄의 의미를 되묻는다. 
















한강 문학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는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고통을 독창적으로 엮어낸다는 점이다. 그녀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국가 폭력의 현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그 이후의 삶까지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통의 연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강은 고통을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인물의 존재 전반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면밀히 분석한다.

이러한 고통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 한강은 ‘몸의 언어’라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서 ‘몸의 언어’란 단순한 신체를 매개로 한 고통의 표현을 넘어, 육체의 변화, 감각의 마비, 질병, 상처, 심지어는 죽음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는 고통을 표출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억압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 되기도 하고,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되기도 하며, 단절된 소통을 시도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채식은 단순히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를 넘어,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이자 자기 방어의 몸짓이며, 동시에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의 앙상하게 마른 몸은 폭력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상징이자,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몸의 언어’는 가부장제라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영혜의 유일한 저항 방식인 동시에,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단절을 초래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흰』에서 흰색 이미지가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형상화하는 방식 역시 ‘몸의 언어’와 연결된다. 흰 것은 망자의 옷, 뼈, 눈, 서리 등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연상시키며, 이는 상실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출산의 경험과 연결된 흰 이미지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고문으로 인한 신체의 훼손, 감각의 마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신 등의 묘사를 통해 고통은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훼손된 몸은 폭력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혹은 잃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몸의 언어’는 한강 문학의 독특한 특징으로, 언어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 이러한 ‘몸의 언어’라는 독특한 형상화 방식을 다른 작가들의 고통 및 존엄 형상화 방식과 비교함으로써 한강 문학의 독창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고통과 트라우마를 탐구하는 작가이지만, 그녀는 주로 개인의 경험, 특히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억압과 성적 고통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관계를 미세하게 드러낸다. 『연인』에서 보여지는 불안정하고 파격적인 관계는 소녀의 욕망과 불안, 그리고 식민지 사회의 인종적, 계급적 차별이 얽히면서 발생하는 복잡한 감정과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뒤라스는 언어를 통해 인물의 내면 심리와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때로는 모호하고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강과 뒤라스는 개인의 고통을 통해 사회적 주제를 드러내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고통의 기원, 표현 방식, 그리고 문학적 초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고통의 기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뒤라스의 고통은 주로 개인적인 경험, 특히 성적인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반면, 한강의 고통은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즉 집단적 트라우마에서 기인한다. 뒤라스가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탐구한다면, 한강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삶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고통, 즉 역사적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사회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고통의 표현 방식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뒤라스는 섬세한 언어적 묘사와 암시적인 표현을 통해 고통의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한강은 언어와 더불어 ‘몸의 언어’를 통해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형상화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앙상한 몸은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폭력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몸의 언어’는 뒤라스의 언어 중심적인 고통 표현 방식과는 차별되는 한강 문학의 독특한 특징이다. 『흰』에서 흰색 이미지를 통해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몸의 언어’와 연결된다.


문학적 초점에서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뒤라스가 개인의 욕망과 심리, 그리고 사회적 억압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내밀한 인간 경험의 심층을 탐구한다면, 한강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관계, 그리고 집단적 트라우마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즉, 뒤라스가 개인의 심리적 풍경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낸다면, 한강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거울을 통해 개인의 고통을 반사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려는 목표를 지향한다.


임레 케르테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고통과 트라우마를 심도 있게 다루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한강과 뚜렷이 구분된다. 『운명』에서 케르테스는 소년 죄르지의 시선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의 서술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고통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방식으로 각인되는지를 치밀하게 탐구하는 데 있다. 특히 그의 문체는 건조하고 냉정한 톤을 유지하며, 감정의 과잉을 철저히 배제한다. 이는 독자가 고통을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고통의 본질에 대해 차분히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고통의 추상화 과정 속에서, 케르테스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도한다.


반면, 한강의 고통 서사는 훨씬 더 구체적이며 몸의 언어에 의존한다. 그녀의 소설에서 고통은 몸의 표면에 드러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의 몸은 마치 세계와의 단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앙상한 몸의 이미지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고문으로 인한 감각의 상실과 훼손된 시신을 통해 고통의 실체가 생생히 부각된다. 이처럼, 한강은 몸의 언어를 통해 고통의 물리적, 감각적 차원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며, 독자의 신체적 공감을 유도한다. 이는 케르테스의 '냉정한 고통의 추상화'와 대비되는 한강의 독창적인 서술 방식이다.


고통의 원천 또한 다르다. 케르테스의 고통은 '개인의 생존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그는 생존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탐구한다. 그의 소설에서는 개인의 내면 변화와 자아의 변형에 초점을 맞추며, 생존 이후에도 지속되는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을 천착한다. 반대로, 한강의 고통은 '집단의 역사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은 한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집단의 고통으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억압된 역사적 기억과 불의의 서사에 대한 기록으로 확장된다. 한강의 고통은 역사의 목격자와 증언자로서의 책임감을 내포하고 있다.


문학적 지향점에서도 두 작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케르테스는 고통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그는 고통을 하나의 '운명'으로 인식하며,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을 파헤친다. 그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자,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실존적 상황으로 드러난다. 이와 달리, 한강은 집단적 기억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소설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억압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공론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러한 서사적 전환을 통해 한강의 문학은 역사적 부조리를 고발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결 속에서 공동체의 윤리적 책무를 묻는다. 케르테스의 고통이 실존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어진다면, 한강의 고통은 역사와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윤리적 탐구로 이어진다


한강은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고통 속에서도 인간 존재의 의의를 찾아내려 노력한다. 특히 그녀는 역사적 폭력 앞에서 개인이 겪는 절망과 고통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인간이 지닌 최소한의 존엄과 인간성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기억의 관계를 탐구하며, 역사적 폭력에 의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강이 이 작품에서도 '색채의 상징성', '침묵의 미학', '부재의 서사'라는 독창적인 서술 방식을 활용하여 존엄성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먼저, '색채의 상징성'은 『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흰색은 단순한 시각적 색이 아니라,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드러내는 공간이자 애도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작품 속에서 흰색은 신생아의 내복, 죽은 아이의 천 조각, 뼈와 눈 등으로 등장하며, 생명과 죽음, 상실과 애도의 경계가 중첩되는 장면을 형성한다. 이러한 색채의 상징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고통의 추상성을 구체화한다.


또한, 한강의 문학에는 '침묵의 미학'이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녀의 소설에서 발화되지 않는 고통은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의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를 상징한다. 죽음 이후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침묵 그 자체가 그의 존재를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 침묵은 고통의 크기와 비례하며, 발화하지 못하는 고통이 독자에게 더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정적의 표현이 아니라, 발화 불가능성의 공간을 가시화하여 고통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소설에서는 '부재의 서사'가 중요한 서술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녀의 소설 속 부재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공백으로 기능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사라진 사람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유골의 흔적이 끊임없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부재한 존재의 흔적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사라진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독자는 그들을 기억하게 되며, 그 부재는 오히려 존재의 증거로 남는다. 한강의 서사에서 부재는 잊혀진 역사를 다시 불러내는 기제로 작용하며, 독자들에게 역사적 부정의 잔혹함과 잊혀진 이들에 대한 기억의 책무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한강은 '몸의 언어', '색채의 상징성', '침묵의 미학', '부재의 서사'라는 네 가지 서술 방식을 통해 역사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그녀의 소설은 단순히 고통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문학의 힘을 보여준다. 이는 한강 문학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고통과 연결시키고, 다양한 서술 기법을 통해 인간의 심층적인 경험을 전달함으로써, 문학이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치유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임을 드러낸다.


카뮈와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탐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들이 그리는 고통의 서사, 기원, 그리고 문학적 지향점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고통을 주로 다룬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규범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이는 외부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고통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의 유한성, 무의미성에서 오는 고통이다. 카뮈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와 부조리한 세계의 충돌에서 고통이 발생한다고 본다. 세상은 인간에게 의미나 목적을 제공하지 않으며, 인간은 이러한 무의미성 속에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로 인해 육식을 거부하고,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당하며 고통받는다. 영혜의 극단적인 채식 행위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카뮈가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통해 보여준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다만, 뫼르소의 저항이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반항이라면, 영혜의 저항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뫼르소는 사회의 규범과 가치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영혜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문학적 지향점에서도 두 작가는 차이를 보인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찾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신에게 반항하는 시지프를 통해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반항 정신을 강조하며, 부조리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강은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고 치유하며, 폭력으로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녀의 작품은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동시에 연대와 공감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처럼 카뮈와 한강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카뮈가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강조한다면, 한강은 역사적 상처를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에 주목한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는 고통과 트라우마라는 인간 경험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깊이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문학의 힘을 보여준다.


​프리모 레비와 한강, 두 작가는 폭력과 고통이라는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하지만, 그 접근 방식과 표현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레비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례 없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에게 내재된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 작가이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환경, 체계적인 폭력, 그리고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는 빵 한 조각을 나누어 먹는 행위, 동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 등을 통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레비의 증언은 언어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숭고한 노력의 일환이며, 인간 존엄의 문제를 윤리적, 철학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그는 과거의 사건을 증언의 형태로 서술하고,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한강의 접근 방식은 이와 사뭇 다르다. 레비가 언어와 증언을 통해 고통을 전달하는 반면, 한강은 '몸의 서사'와 '감각의 언어'를 통해 고통을 시각화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묘사되는 고문과 시신의 잔해들은 고통의 실체를 생생히 드러내며, 독자는 이를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된다. 레비가 고통을 언어로 서술하는 자라면, 한강은 고통을 '보여주는 자'다. 또한, 한강은 색채의 상징성을 통해 고통의 부재와 애도의 과정을 형상화한다. 『흰』에서 흰색은 죽은 자의 흔적과 잊힌 기억을 상징하며, 신생아의 천, 뼈, 눈 등의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이 과정에서 고통의 형상화는 감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독자는 레비의 서술을 '이해하는' 대신, 한강의 서사를 '느끼게' 된다.


한강의 고통 서사에서 침묵의 미학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의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를 상징한다. 레비의 증언과 대조적으로, 한강은 침묵을 통해 발화 불가능한 고통의 공간을 제시하며, 독자에게 고통의 크기를 체험하게 만든다. 레비의 증언이 윤리적 질문을 유도한다면, 한강의 침묵은 독자에게 물리적 감각의 체험을 강요한다.


마지막으로, 두 작가는 고통의 시점과 관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레비는 과거의 고통을 회고적 증언의 형태로 전달하며, 독자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기억 속에서 되새기도록 한다. 반면, 한강은 고통을 현재로 불러와 독자가 그 고통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도록 만든다. 과거의 고통이 독자에게 현재화된다는 점에서, 한강의 소설은 독자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서사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레비와 한강의 고통 서사는 고통의 매개체(언어 vs. 몸), 고통의 시점(과거의 회고 vs. 현재의 체험), 독자의 체험 방식(윤리적 성찰 vs. 감각적 체험)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레비가 언어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면, 한강은 '몸'과 '색채', '침묵'을 통해 고통을 형상화하고 독자들이 직접 고통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두 작가는 각각 윤리적 각성과 감각적 체험이라는 서로 다른 문학적 목표를 제시하며,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한강 작가의 수상은 한국인 최초일 뿐 아니라, 최초의 아시아 여성 수상자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한국 문학의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동양 여성의 서사가 세계 문학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일부 한국 보수단체들이 서울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그녀의 수상을 반대했던 사건은 그녀의 문학이 단순한 예술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건드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강의 작품이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작품은 상처와 고통을 넘어 인간 존엄성과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학의 힘을 증명한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한강의 작품은 과거의 상처를 직시하고 공동체의 치유를 위한 성찰을 촉구한다. '몸의 언어', '침묵의 미학', '부재의 서사'는 단순한 서술 기법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도구로 기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강의 문학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임레 케르테스, 알베르 카뮈, 프리모 레비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통과 존엄을 탐구하는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팬의 한 사람으로서, 한강의 문학이 세계 문학의 중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녀의 문학은 단순히 문학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변혁의 힘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도 그녀의 문학이 한국 문학의 경계를 넘어 세계 문학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기를 기대하며, 그녀의 문학이 던지는 질문들이 더 넓은 독자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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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4-12-2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문학의 중심에서 독보적인 존재라....노벨상 탔다고 한강이 세계문학의 중심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한강 작가보다 더 좋은 작품 냈던 작가들 많아요. 하지만 한강 작가는 운이 좋았죠. 세계문학의 그 주류인 앵글로색슨 문학계의 번역가가 한강 작품을 영어로 아주 잘 번역한게 대박이었죠. 한국이 노벨 문학상 탈 만한 시기가 되었고 그 작가가 운좋게도한강이었을 뿐...물론 팬인 분들은 호들갑 떨만하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dbTlla 2024-12-14 14:05   좋아요 2 | URL
ㅎㅎㅎ님의 의견이 재밌어서 몇 가지 제 생각도 함께 나눠보고 싶네요.
1. 먼저 운이 좋았다고 하셨죠? 운이 좋았다?
노벨문학상은 로또가 아니에요. 운으로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라, 수십 명의 심사위원들이 매년 논의와 투표를 거쳐 선정합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이 운으로 뽑혔다면, 수백 명의 세계적인 작가들이 매년 운이 나빴던 것일까요? 심사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한 번 살펴보시면, 운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겁니다.
2. 앵글로색슨 문학계의 번역가가 한강 작품을 여어(영어)로 어주(아주) 잘 번역한게 대박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번역의 중요성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번역가가 번역을 아무리 잘해도 원작이 좋지 않으면 노벨상은 받을 수 없어요.
심사위원들은 한글 원문과 영어 번역본을 모두 봅니다.
쉽게 말하면, 번역은 필터, 원문은 원천이에요.
한강의 수상은 그 원천(원문)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죠.
3. 팬인 분들은 호들갑 떨만하다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죠.
사실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역사적 사건이라서 팬이 아니라도 호들갑 떨 만하지 않을까요?
월드컵에서 골 하나 넣어도 호들갑 떠는데, 노벨문학상은 그 이상이라고 봅니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다양한 시각이 오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리고, 같이 더 이야기 나누면 좋겠네요. 😊

yamoo 2024-12-20 15:01   좋아요 0 | URL
제 댓글에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셔서 저도 몇 자 부가합니다.
1. 노벨문학상은 로또 맞아요. 모든 문학상이 운입니다. 그 많은 작가 중에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니까요. 하루키가 한강보다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 안됐을까요? 심사위원이 있는 모든 상들은 상당한 운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모든 문학상은 운의 결과입니다. 더 정확히는 심사위원들의 성향이 좌우하는 거죠.
2. 노벨상 심사위원들이 한글판을 보고 판단한다?? 한글판은 제외입니다. 읽지도 못하는 걸 위원들이 어떻게 봅니까?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심사대상에 한글원문과 영어번역본을 모두 본다는 건 님의 댓글에서 제가 처음 봅니다. 심사대상에 한글본 자체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글본과 영어본이 동시에 심사대상이라하셨는데, 타당한 근거를 가져오시면 수긍하겠습니다!
3.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골을 넣으면 저는 호들갑을 떱니다. 헌데 노벨문학상 수상에 한강이 됐다는 거에 좀 놀랐습니다. 호들갑 대신 상당한 놀람이 첫 느낌이었습니다. 왜 한강이지?하는...성향상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에 실망했던지라...

dbTlla 2024-12-26 12:11   좋아요 0 | URL
댓글 다신 시간을 보니 제가 수술을 기다리던 시간이었네요. 이 댓글을 이제야 봐서 지금에야 답을 드립니다. 늦어진 점 사과드립니다.

지난번 제 댓글이 다소 주제 넘게 느껴졌다면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노벨문학상의 심사 과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위원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부분이고, 50년간 봉인되는 심사 기록의 특성상 모두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죠.

다만, 위키피디아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노벨문학상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다양한 언어 전문가와 번역가, 문학 비평가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는 원문을 가능한 한 고려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결국 원문과 번역본이 모두 작품 평가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그녀가 한국 문학의 가시성을 세계적으로 높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상 결과가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곧 그녀의 성취를 문제 삼는 이유가 되어야 할지는 의문입니다.

좋은 의견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2024-12-14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4-12-1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 레비, 임레 케르테스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뒤라스와 한강을 엮어 써주신 데에는 매우 공감하고 그렇구나 끄덕끄덕 했어요. 노벨문학상은 작가에게 주는 상이라 잖아요. (뒤라스는 수상하지 않았지요? 아닌가..ㅋㅋ 모름) 두 작가 모두 쓰면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쓰면서 삶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어떤 경외가 있습니다. 이번에 수상 소감문 읽으면서 한번 더 놀랐어요. 작가는 그런 존재인 걸까요. 실은 누구도 쓰라고 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쓰고자 하는 사람.

어쨌든 저는 역사적 사건을 한강이 다뤄줘서. 누구도 아닌 한강작가님이 다뤄줘서 다행였고, 고마웠고, 좋았습니다. 2014년의 5월은 특별히 더 그랬고요. 한강이 쓰지 않았다면 다르게 기억되었겠지만 한강이 써서 또 다르게 기억될 수 있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노벨문학상보다 한강이 더 좋은데 한강 덕에 노벨문학상의 권위가 올라가버렸달까요? ㅋㅋㅋ 그래도 뿌듯 뿌듯!- 한강 팬 올림

dbTlla 2024-12-19 21:33   좋아요 1 | URL
“(뒤라스는 수상하지 않았지요? 아닌가..ㅋㅋ 모름)” 이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그 솔직하고 귀여운 말투 덕분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거든요.😊뒤라스는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공쟝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두 작가 모두 쓰면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쓰면서 삶을 만들어왔다”는 그 과정 자체인 것 같아요. 그 문장은 저도 공쟝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일 많이 곱씹었던 부분이었어요.
한강 작가님의 작품이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할 수 있게 해줬다”는 공쟝쟝님의 말씀에도 크게 공감했습니다. 한강 작가가 아니었다면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었던 그 시간과 사건이,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는 사건으로 새롭게 각인되었다는 것. 그 힘이야말로 문학의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벨문학상보다 한강이 더 좋다”는 말도 공쟝쟝님의 애정이 가득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오늘 공쟝쟝님의 댓글을 읽고 뭔가 뿌듯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쟝쟝님도 남은 하루 따뜻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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