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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청소부 마담 B
상드린 데통브 지음, 김희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2월
평점 :
인간은 흔적을 남기는 존재다. 발자국처럼 눈에 보이는 물리적 흔적부터, 기억처럼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정신적 흔적까지,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적을 생성하고 축적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적을 지우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의 실수, 아픈 기억, 혹은 단순히 낡고 불필요해진 것들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상드린 데통브의 소설 『범죄 청소부 마담 B』는 인간의 삶과 흔적, 기억과 망각, 죄책감과 구원 등의 주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블랑슈' 바르자크는 범죄 현장을 청소하며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한다. '블랑슈'는 프랑스어로 '흰색'을 의미하는데, 이는 깨끗함과 순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작가는 '흰색'이라는 상징을 통해 겉으로는 깨끗함을 유지하지만 내면의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블랑슈의 모순적인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피비린내 나는 범죄의 흔적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임무인 블랑슈. "마지막 전체 점검만 마치면 그 아파트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있었다"는 문장처럼, 블랑슈에게 범죄 현장 청소는 단순한 일이 아닌, 과거의 사건을 종결짓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있는 행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랑슈는 타인의 흔적은 지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거는 지우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처럼 블랑슈의 이야기는 단순히 범죄 현장 청소부의 삶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뇌와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 '블랑슈'는 흰색이 가지는 이중적인 의미를 통해, 외면과 내면, 그리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갈등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작품 전체의 주제 의식을 강화한다.
블랑슈는 15년 동안 완벽하게 타인의 흔적을 지워왔지만, 정작 자신의 흔적은 지우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에 붙들려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죄책감, 트라우마는 마치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그녀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특히 하얀 실크 스카프에 묻은 핏자국은 블랑슈의 정신적 상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오브제다. 그녀는 스카프를 "최면에 걸린 듯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흔적을 넘어,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며, 동시에 인간의 기억과 망각,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블랑슈는 "지워야 했던 것은 증거가 아니라 내 과거였다"고 고백한다. 범죄 현장의 핏자국을 지우는 행위는, 사실 그녀 자신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죄책감과 고통을 지우고 싶어하는 욕망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는 늘 되돌아오는 법이다"라는 블랑슈의 말처럼, 과거의 흔적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자신의 죄를 씻으려 할수록 더욱 깊은 죄책감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인간의 숙명적인 딜레마를 보여준다.
블랑슈가 기도를 모르면서도 기도하는 장면은,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그녀의 내적 투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흔적을 지우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인 청소가 아니라,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자,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의 표현인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이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보편적인 염원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범죄 청소부 마담 B』는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잔재인가, 아니면 우리 존재의 증거인가? 삶은 끊임없이 흔적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흔적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어떤 흔적은 지우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어떤 흔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우리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흔적들은, 그것이 설령 고통스러운 기억일지라도 우리를 성장시키고,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뒤따르는 법이다. 네 행동들에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야." 이 말은 마치 오래된 격언처럼 익숙하게 들리지만,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한 묵직한 울림을 준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들은 우리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며, 동시에 삶이라는 캔버스에 책임감 있는 흔적을 새겨나가는 것이라는 것을『범죄 청소부 마담 B』는 블랑슈의 삶을 통해 묵직하게 보여준다. 블랑슈가 타인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행동이 남긴 흔적들과 마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흔적들에 책임을 지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