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저력을 세계에 알린 쾌거이자,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그녀의 작품을 아껴온 독자로서 깊은 감동과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수상은 더욱 빛나는 희망의 등불처럼 느껴졌다. 한강은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섬세하고 시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며, 인간의 고통과 존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본 글에서는 한강 문학의 핵심 주제인 트라우마, 고통, ‘몸의 언어’ 등을 중심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임레 케르테스, 알베르 카뮈, 프리모 레비 등 고통과 트라우마, 인간의 존엄을 탐구한 대표적인 작가들과 비교 분석하여 한강 문학의 독창성과 문학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개인의 경험, 특히 여성의 성적 고통을 통해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고, 임레 케르테스는 홀로코스트 경험을 바탕으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탐구하며,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 경험을 증언하며 인간 존엄의 의미를 되묻는다.
한강 문학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는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고통을 독창적으로 엮어낸다는 점이다. 그녀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국가 폭력의 현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그 이후의 삶까지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통의 연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강은 고통을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인물의 존재 전반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면밀히 분석한다.
이러한 고통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 한강은 ‘몸의 언어’라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서 ‘몸의 언어’란 단순한 신체를 매개로 한 고통의 표현을 넘어, 육체의 변화, 감각의 마비, 질병, 상처, 심지어는 죽음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는 고통을 표출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억압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 되기도 하고,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되기도 하며, 단절된 소통을 시도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채식은 단순히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를 넘어,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이자 자기 방어의 몸짓이며, 동시에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의 앙상하게 마른 몸은 폭력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상징이자,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몸의 언어’는 가부장제라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영혜의 유일한 저항 방식인 동시에,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단절을 초래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흰』에서 흰색 이미지가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형상화하는 방식 역시 ‘몸의 언어’와 연결된다. 흰 것은 망자의 옷, 뼈, 눈, 서리 등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연상시키며, 이는 상실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출산의 경험과 연결된 흰 이미지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고문으로 인한 신체의 훼손, 감각의 마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신 등의 묘사를 통해 고통은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훼손된 몸은 폭력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혹은 잃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몸의 언어’는 한강 문학의 독특한 특징으로, 언어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 이러한 ‘몸의 언어’라는 독특한 형상화 방식을 다른 작가들의 고통 및 존엄 형상화 방식과 비교함으로써 한강 문학의 독창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고통과 트라우마를 탐구하는 작가이지만, 그녀는 주로 개인의 경험, 특히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억압과 성적 고통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관계를 미세하게 드러낸다. 『연인』에서 보여지는 불안정하고 파격적인 관계는 소녀의 욕망과 불안, 그리고 식민지 사회의 인종적, 계급적 차별이 얽히면서 발생하는 복잡한 감정과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뒤라스는 언어를 통해 인물의 내면 심리와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때로는 모호하고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강과 뒤라스는 개인의 고통을 통해 사회적 주제를 드러내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고통의 기원, 표현 방식, 그리고 문학적 초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고통의 기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뒤라스의 고통은 주로 개인적인 경험, 특히 성적인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반면, 한강의 고통은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즉 집단적 트라우마에서 기인한다. 뒤라스가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탐구한다면, 한강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삶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고통, 즉 역사적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사회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고통의 표현 방식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뒤라스는 섬세한 언어적 묘사와 암시적인 표현을 통해 고통의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한강은 언어와 더불어 ‘몸의 언어’를 통해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형상화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앙상한 몸은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폭력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몸의 언어’는 뒤라스의 언어 중심적인 고통 표현 방식과는 차별되는 한강 문학의 독특한 특징이다. 『흰』에서 흰색 이미지를 통해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몸의 언어’와 연결된다.
문학적 초점에서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뒤라스가 개인의 욕망과 심리, 그리고 사회적 억압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내밀한 인간 경험의 심층을 탐구한다면, 한강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관계, 그리고 집단적 트라우마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즉, 뒤라스가 개인의 심리적 풍경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낸다면, 한강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거울을 통해 개인의 고통을 반사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려는 목표를 지향한다.
임레 케르테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고통과 트라우마를 심도 있게 다루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한강과 뚜렷이 구분된다. 『운명』에서 케르테스는 소년 죄르지의 시선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의 서술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고통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방식으로 각인되는지를 치밀하게 탐구하는 데 있다. 특히 그의 문체는 건조하고 냉정한 톤을 유지하며, 감정의 과잉을 철저히 배제한다. 이는 독자가 고통을 감정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고통의 본질에 대해 차분히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고통의 추상화 과정 속에서, 케르테스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도한다.
반면, 한강의 고통 서사는 훨씬 더 구체적이며 몸의 언어에 의존한다. 그녀의 소설에서 고통은 몸의 표면에 드러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의 몸은 마치 세계와의 단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앙상한 몸의 이미지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고문으로 인한 감각의 상실과 훼손된 시신을 통해 고통의 실체가 생생히 부각된다. 이처럼, 한강은 몸의 언어를 통해 고통의 물리적, 감각적 차원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며, 독자의 신체적 공감을 유도한다. 이는 케르테스의 '냉정한 고통의 추상화'와 대비되는 한강의 독창적인 서술 방식이다.
고통의 원천 또한 다르다. 케르테스의 고통은 '개인의 생존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그는 생존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탐구한다. 그의 소설에서는 개인의 내면 변화와 자아의 변형에 초점을 맞추며, 생존 이후에도 지속되는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을 천착한다. 반대로, 한강의 고통은 '집단의 역사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은 한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집단의 고통으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억압된 역사적 기억과 불의의 서사에 대한 기록으로 확장된다. 한강의 고통은 역사의 목격자와 증언자로서의 책임감을 내포하고 있다.
문학적 지향점에서도 두 작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케르테스는 고통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그는 고통을 하나의 '운명'으로 인식하며,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을 파헤친다. 그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자,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실존적 상황으로 드러난다. 이와 달리, 한강은 집단적 기억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소설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억압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공론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러한 서사적 전환을 통해 한강의 문학은 역사적 부조리를 고발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결 속에서 공동체의 윤리적 책무를 묻는다. 케르테스의 고통이 실존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어진다면, 한강의 고통은 역사와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윤리적 탐구로 이어진다
한강은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고통 속에서도 인간 존재의 의의를 찾아내려 노력한다. 특히 그녀는 역사적 폭력 앞에서 개인이 겪는 절망과 고통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인간이 지닌 최소한의 존엄과 인간성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기억의 관계를 탐구하며, 역사적 폭력에 의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강이 이 작품에서도 '색채의 상징성', '침묵의 미학', '부재의 서사'라는 독창적인 서술 방식을 활용하여 존엄성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먼저, '색채의 상징성'은 『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흰색은 단순한 시각적 색이 아니라,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드러내는 공간이자 애도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작품 속에서 흰색은 신생아의 내복, 죽은 아이의 천 조각, 뼈와 눈 등으로 등장하며, 생명과 죽음, 상실과 애도의 경계가 중첩되는 장면을 형성한다. 이러한 색채의 상징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고통의 추상성을 구체화한다.
또한, 한강의 문학에는 '침묵의 미학'이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녀의 소설에서 발화되지 않는 고통은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의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를 상징한다. 죽음 이후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침묵 그 자체가 그의 존재를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 침묵은 고통의 크기와 비례하며, 발화하지 못하는 고통이 독자에게 더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정적의 표현이 아니라, 발화 불가능성의 공간을 가시화하여 고통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소설에서는 '부재의 서사'가 중요한 서술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녀의 소설 속 부재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공백으로 기능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사라진 사람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유골의 흔적이 끊임없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부재한 존재의 흔적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사라진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독자는 그들을 기억하게 되며, 그 부재는 오히려 존재의 증거로 남는다. 한강의 서사에서 부재는 잊혀진 역사를 다시 불러내는 기제로 작용하며, 독자들에게 역사적 부정의 잔혹함과 잊혀진 이들에 대한 기억의 책무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한강은 '몸의 언어', '색채의 상징성', '침묵의 미학', '부재의 서사'라는 네 가지 서술 방식을 통해 역사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그녀의 소설은 단순히 고통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문학의 힘을 보여준다. 이는 한강 문학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고통과 연결시키고, 다양한 서술 기법을 통해 인간의 심층적인 경험을 전달함으로써, 문학이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치유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임을 드러낸다.
카뮈와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탐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들이 그리는 고통의 서사, 기원, 그리고 문학적 지향점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고통을 주로 다룬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규범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이는 외부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고통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의 유한성, 무의미성에서 오는 고통이다. 카뮈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와 부조리한 세계의 충돌에서 고통이 발생한다고 본다. 세상은 인간에게 의미나 목적을 제공하지 않으며, 인간은 이러한 무의미성 속에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로 인해 육식을 거부하고,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당하며 고통받는다. 영혜의 극단적인 채식 행위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카뮈가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통해 보여준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다만, 뫼르소의 저항이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반항이라면, 영혜의 저항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뫼르소는 사회의 규범과 가치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영혜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문학적 지향점에서도 두 작가는 차이를 보인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찾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신에게 반항하는 시지프를 통해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반항 정신을 강조하며, 부조리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강은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고 치유하며, 폭력으로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녀의 작품은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동시에 연대와 공감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처럼 카뮈와 한강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카뮈가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강조한다면, 한강은 역사적 상처를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에 주목한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는 고통과 트라우마라는 인간 경험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깊이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문학의 힘을 보여준다.
프리모 레비와 한강, 두 작가는 폭력과 고통이라는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하지만, 그 접근 방식과 표현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레비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례 없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에게 내재된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 작가이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환경, 체계적인 폭력, 그리고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는 빵 한 조각을 나누어 먹는 행위, 동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 등을 통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레비의 증언은 언어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숭고한 노력의 일환이며, 인간 존엄의 문제를 윤리적, 철학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그는 과거의 사건을 증언의 형태로 서술하고,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한강의 접근 방식은 이와 사뭇 다르다. 레비가 언어와 증언을 통해 고통을 전달하는 반면, 한강은 '몸의 서사'와 '감각의 언어'를 통해 고통을 시각화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묘사되는 고문과 시신의 잔해들은 고통의 실체를 생생히 드러내며, 독자는 이를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된다. 레비가 고통을 언어로 서술하는 자라면, 한강은 고통을 '보여주는 자'다. 또한, 한강은 색채의 상징성을 통해 고통의 부재와 애도의 과정을 형상화한다. 『흰』에서 흰색은 죽은 자의 흔적과 잊힌 기억을 상징하며, 신생아의 천, 뼈, 눈 등의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이 과정에서 고통의 형상화는 감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독자는 레비의 서술을 '이해하는' 대신, 한강의 서사를 '느끼게' 된다.
한강의 고통 서사에서 침묵의 미학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의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를 상징한다. 레비의 증언과 대조적으로, 한강은 침묵을 통해 발화 불가능한 고통의 공간을 제시하며, 독자에게 고통의 크기를 체험하게 만든다. 레비의 증언이 윤리적 질문을 유도한다면, 한강의 침묵은 독자에게 물리적 감각의 체험을 강요한다.
마지막으로, 두 작가는 고통의 시점과 관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레비는 과거의 고통을 회고적 증언의 형태로 전달하며, 독자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기억 속에서 되새기도록 한다. 반면, 한강은 고통을 현재로 불러와 독자가 그 고통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도록 만든다. 과거의 고통이 독자에게 현재화된다는 점에서, 한강의 소설은 독자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서사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레비와 한강의 고통 서사는 고통의 매개체(언어 vs. 몸), 고통의 시점(과거의 회고 vs. 현재의 체험), 독자의 체험 방식(윤리적 성찰 vs. 감각적 체험)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레비가 언어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면, 한강은 '몸'과 '색채', '침묵'을 통해 고통을 형상화하고 독자들이 직접 고통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두 작가는 각각 윤리적 각성과 감각적 체험이라는 서로 다른 문학적 목표를 제시하며,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한강 작가의 수상은 한국인 최초일 뿐 아니라, 최초의 아시아 여성 수상자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한국 문학의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동양 여성의 서사가 세계 문학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일부 한국 보수단체들이 서울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그녀의 수상을 반대했던 사건은 그녀의 문학이 단순한 예술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건드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강의 작품이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작품은 상처와 고통을 넘어 인간 존엄성과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학의 힘을 증명한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한강의 작품은 과거의 상처를 직시하고 공동체의 치유를 위한 성찰을 촉구한다. '몸의 언어', '침묵의 미학', '부재의 서사'는 단순한 서술 기법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도구로 기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강의 문학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임레 케르테스, 알베르 카뮈, 프리모 레비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통과 존엄을 탐구하는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팬의 한 사람으로서, 한강의 문학이 세계 문학의 중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녀의 문학은 단순히 문학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변혁의 힘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도 그녀의 문학이 한국 문학의 경계를 넘어 세계 문학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기를 기대하며, 그녀의 문학이 던지는 질문들이 더 넓은 독자들에게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