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때리는 데 쓰던 둔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들어 남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행동이 과연 합리적 선택인지 아니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기인한 일종의 방어 행위인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나라마다 그 판단 기준이 다릅니다. 영미권의 판례를 보면 ‘현재성의 원칙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정하면 안 된다. 장기적으로 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기준이 보입니다. 총기로 매일 위협을 당하던 아내가 남편이 잠깐 놓아 둔 총기를 집어 들고 남편을 쏠 때, 그 순간 남편이 위협하고 있는것은 아니지만 그 아내의 심리 상태는 여전히 총기로 머리를 위협당하고 있을 때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영미권 법의 판단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매 맞는 아내가 남편을 살해할 때는 분노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포 때문에 죽이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살인의 고의성이 성립하지 않죠. 형사 책임의 고의는 분노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 죽어라!‘ 하는 분노와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하는 공포는 완전히 다른 정신 상태입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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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 최근에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굉장히 여러 가지 맥락에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무시하는 것부터 시작해 이래라저래라 행동을 조종하는 것까지 전부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단어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이수정 -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을 조종하는 행위라고 볼 수있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조종을 당한 사람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 혼란을 틈타 조종자가 조종 대상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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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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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은 한국 수어의 날이다. 특히 올해 2월 3일엔 KBS 뉴스에서 앵커와 수어통역사가 화면을 반씩 나누어 가져 클로징 멘트를 하는 영상이 화제였다. 이분할된 화면이 불편하지 않았고 ‘아니 이 좋은 걸 왜 이제서야...‘하는 ‘현타‘가 스쳐갔다. 이 에피소드는 훈훈했지만... 대선토론이 수어통역되는 현장의 열악함에는 눈을 감고 싶어진다. 수어통역사 한 명이 대선 후보 여러 명의 구화를 수어로 옮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혹한 노동 같다.

요새 이렇게 수어와 농인에 대해 관심이 생긴 참이었는데, 마침 동아시아에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보내주셔서 적절한 시기에 책을 읽고 농인, 그리고 소수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간략히 소감을 전하자면, 내가 이렇게 무지한 사람이었다니- 라는 생각과 함께 괜히 헛기침을 하게 된다.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저자 이길보라가 여성 코다(CODA, 농인 부모의 청인 자녀)로서 포착한 지점들을 엮은 책이다. 그동안 여성 작가의 페미니즘 색이 짙은 책은 종종 접했는데, 코다로서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책은 처음이다. 그래서 낯설기도 하고 뒤통수를 오함마;;;로 맞는 듯한 문장이 많았다. 농인이 수어로 소통하는 방법은 청인이 구화로 소통하는 것과 다른 층위의 일임을 알게 되었다.

🔖(166-167쪽)엄마는 자꾸만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다. 나도 고모도 몰랐다. 그냥 ‘핵‘이었고 ‘위험한 것‘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디는 못해도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시각에 의존하는 사람이고,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인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기에 시각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나와 고모는 분명 농인도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탈핵과 정치 이야기를 하겠다고 야심 차게 촬영을 시작했지만 정치의 ‘정‘ 자도, 탈핵의 ‘핵‘ 자도 설명하지 못했다.

수어는 농인에게 ‘언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청인은 수어를 단순한 기호로 인식하고 그 뒤에 가려진 농인을 지나쳐 버린다. 15년 전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아름다운 세상> 노래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수어 안무를 했던 일, 5년 전 수어 안무가 일부 포함된 아이돌 노래 <그리워하다>를 팬들이 칭찬했던 일이 생각났다(누워서 침 뱉기지만 내돌은 내가 깐다;;). 왜인지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불편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런 무대를 보고 듣는 사람은 대다수가 청인이고, 수어는 그저 하나의 미학적 장치에 불과할 뿐이라는 문장에 동의할 수 있었다. 수어를 사용하고 ‘뿌듯‘해하는 무대 위의 공연자나 그걸 보고 감동적이라고 반응하는 관중은 여전히 시혜적인 청인중심주의에 찌들어있을 뿐이다. 농인은 가사를 들으면서 청인과 같은 타이밍에 수어로 노래하기 힘들다. 이게 정말 우리의 최선인가? 그걸로 충분한가?

이 책을 리뷰하는 건 결국 나의 편협함을 까발리는 일이기 때문에 솔직히 버겁고 미루고 싶다. 내가 청각장애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농문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마뜩잖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길보라도 베트남전쟁에 대해 말할 때 비슷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49쪽)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자 누군가는 물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네가, 군대도 가지 않은 여성인 네가, 새파랗게 어린 20대인 네가 전쟁에 대해서 뭘 아냐고(...) 이 문제는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인 대한민국 군대와 피해자인 베트남 사람만 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책임이 없다며 떠넘기고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돌아보고 짚어보고 어떻게 기억해야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나누고 나는 차별하지 않았다며 발뺌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길보라가 마이크를 쥐고 있을 때 먼저 듣고 그가 마이크를 넘겨줄 때 기꺼이 받아서 ‘당신을 이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표정과 손끝을 보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결국 공존하려고 태어났으니까 말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을 책: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사계절,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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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겼는지 설명 부탁. 그거 나도 모르고 다른 농인들도 모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어."
엄마는 자꾸만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다. 나도 고모도 몰랐다. 그냥 ‘핵‘이었고 ‘위험한 것‘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는 못해도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시각에 의존하는 사람이고,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인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기에 시각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엄마의세계에서 ‘단어‘는 어떤 생김새를 표현해야 쉽게 이해할 수있었다. 농인들이 잘 모르는 개념이기에 더더욱 그래야 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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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위한 문화예술 - 미술관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친절한 예술 가이드
널 위한 문화예술 편집부 지음 / 웨일북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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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거나, 혼자서는 작품을 깊이 감상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이런 도슨트 선생님이라면 3시간 정도는 안심하고 맡겨도 괜찮다
구어체로 쓰인 책이라 호불호 갈릴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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