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상반기에는 시집을 꽤 정기적으로 읽었다. 사실 과제 때문에 시작한 리뷰였지만, 이제는 관심이 더 깊어져서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신작 시집을 사는 단계까지 왔다. 과제차 읽었던 시집은 『당신은 겨울로 왔고 나는 여름에 있었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재와 사랑의 미래』,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도움받는 기분』,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이곳의 안녕』 등 8권이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건 『재와 사랑의 미래』,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도움받는 기분』 등 3권이었는데 문제는… 좋아하는만큼 리뷰를 매끄럽게 쓰지 못했던 것이다. 과제는 모두 기한 내에 제출하긴 했지만 『재와 사랑의 미래』, 『도움받는 기분』 리뷰는 다시 읽어봤을 때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알라딘에는 올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좋았던 시들을 옮겨 적어 본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어요? 남자의 중얼거림과

거짓말 말고 말해요, 심령술사의 다그침

춥지 않아요? 나의 외침이

직사광선 아래 어지러이 놓일 때


이곳으로 걸어오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곳에서 내내 얼어 갈

영원히 남아 있을 손을 뻗어 나는

그것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기구의 고리와 이음새가 내 머리를 세게 조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거대한 입김이 내 얼굴과 남자의 완전히 덮는 것을 바라보다 최면에서 깼다.


(중략)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기구는 못 쓰게 돼.

담요를 고쳐 올려 주며 그들의 묻고


사람과 겨우 비슷해진 얼굴로 나는 답한다.

"간직하고 싶었어요."


(중략)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수영모를 쓰고

복잡하게 고안된 컴퍼스를 쥔

미래로 가는 사람 곁에


모르는 사랑 곁에 서 있다.


―「재와 사랑의 미래」(부분), 『재와 사랑의 미래』43~53쪽


여기서부터 다시 노래해

우연은 새가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

부리가 길고 가느다란 희귀종의 새가, 날개가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다친 새가

상처 부위에만 온기가 남아 있는 새가

네 손안에서 죽어가고 있네


(중략)


너는 이름이 많지 그 이름들은 모두 훔치기 좋고 훔치기 좋은 이름들을 꽃다발처럼 끌어안고 사는 삶을

너는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 시든 꽃들이 밟히면서 풍기는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해

이름이 많다는 건 이름이 없다는 것과 같아

색깔을 다 빼앗기고 표백된 드라이플라워처럼, 목매단 꽃처럼


(중략)


여기서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나의 새야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쓴 악필의 편지」(부분),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 30~33쪽


언니 나는 단지 언니의 아름다운 시를 읽고 얼굴이 빨개졌을 뿐인데 왜냐하면 어떤 것은 꼭 내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고 어떤 문장은 내가 잊기 위해 평생 애쓴 계절 같아 나는 가끔 언니가 너무 밉고 너무 좋고 언니의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나를 벗어버릴 것 같고 영원히 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언니


(중략)


모래 속에서 빗속에서 눈보라를 안고 있으면 너무 춥고 너무 힘들지 않을까 언니가 적은 대로 언니가 그렇게 지낼까 봐 걱정이 돼 언니, 언니


시가 뭘까


언니 나는 궁금한 것이 없어

그게 제일 궁금한데 그런 것도 모르면서 시를 써도 될까?


―「언니의 시」(부분), 『도움받는 기분』 42~46쪽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 채」는 원래도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쓴 리뷰가 이달의 당선작에 올라서 더 좋아졌다🙃 과제로 시집 리뷰를 써낼 때 곧바로 피드백을 듣지는 못해서 내 글의 어느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게도 6월 당선작으로 뽑혀서 기분이 좋았다.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 덩달아 자신감과 흥미도 충전되어서 학기 중 남은 과제들을 기쁘게 해낼 수 있었다.


4월말부터 매주 시집을 한 권씩, 짧게나마라도 리뷰를 쓸 목적으로 독해하다보니 취미로 시를 읽을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저 눈에 띄는 몇몇 구절을 필사하고 다시 책장에 꽂던 옛날과는 달리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의도나 특징을 찾아내려고 자세히 보게 되었다. 문학동네/창비 위주로 시집을 모으던 취향도 넘어서서, 다양한 출판사의 경향을 접하게 된 것도 좋은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달의 당선작 부상으로 받은 적립금을 쓰기도 하고, 동네 책방에 스탬프를 받으러 다니며 신간 시집을 샀다. 시집으로 가득찬 책장 한켠을 보면 왠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직은 종강한지 일주일도 안 지났으니 6월까지는 넷플릭스를 보면서 휴식하고😏 7월부터 다시 시집을 읽으려고 한다.










최근에 『맑고 높은 나의 이마』,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등 6권의 시집을 구매했다. 과제 때문이 아니라 그냥 표지와 제목 때문에 끌려서 산 건데😅 모아놓고 보니 푸른 계열이 많다. 『완벽한 개업 축하 시』는 앞부분을 조금 읽어보았는데 '나무인간'이라는 시어가 특히 마음에 들고,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는 제목부터 감성이 충만해서 기대된다! 여름에도 부지런히 시집을 읽으면서 기민한 감각을 키우는 훈련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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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새해엔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행히 2월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킨 것 같다😁 1월은 6권, 2월은 8권째 읽고 있다.


그중 특별히 좋았던 책들을 꼽아보자면...






























1️⃣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2️⃣ 이상한 정상가족 (동아시아, 2017)

3️⃣ 아주 오래된 유죄 (한겨레출판, 2020)

4️⃣ 그냥, 사람 (봄날의책, 2020)


이 정도? 참고로 저 숫자들은 순위와는 무관하다.

문학은 원래도 좋아했는데 최근 사회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아졌다. 위의 목록에는 들지 못했지만 <장애의 역사>(동아시아, 2020)를 통해 장애학에 눈길을 두기 시작했고, <쌀 재난 국가>(문학과지성사, 2021)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하는 글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요즘들어 읽고 있는 책이 뭐냐하면
















1️⃣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2️⃣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3️⃣ 휠체어를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을유문화사, 2021)


요 세 권이다. <사이보그가 되다>와 <공정하다는 착각>은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놓고 기다려서 빌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책이었다. <휠체어를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는 제목부터 직관적으로 충격적이었고 문체도 잘 읽히는 문체라서 흥미롭게 보고 있다.


다음달에 나올 신간도 기대하고 있다. 출간되는 즉시 사고 싶은데,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못 따라가서 걱정이다😂


출판사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들은 소식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은

















1️⃣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갈라파고스, 2021 예정)

2️⃣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허블, 2021 예정)


이렇게 두 권이다.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는 아프리카 부족 채록 시집이라고 한다. 안희연 시인님이 추천사를 쓰신 걸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열강의 피지배자로만 여겨지던 아프리카가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했던 사람들의 기록은 어떠할지...!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시어를 감상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는 SF작가님들의 앤솔로지이다. 천선란 작가님의 <천 개의 파랑>(허블, 2020)과 이루카 작가님의 <독립의 오단계>(허블, 2020)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어서 기대되는 책이다. 표지도 봄날씨와 잘 어울린다ㅎㅎ


다음주면 개강이라 바빠질 듯하다. 3월에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길,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길...😂 노력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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