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형제들 -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을 넘나드는 근현대 형제 열전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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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말 첫줄부터 강렬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특별한 형제들‘ 중에 김일성종합대 교수와 서울대 교수 형제가 있었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피곤한 인생을 살았을 듯싶다. 나도 가족들과 정치성향이 정반대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처음 봐서 자세한 내막이 궁금해졌다🤔

책을 펼쳐보니 이 이야기는 평양 출신 정두현, 정광현 형제에 관한 것이었다. 개화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출세보다 학문연구와 사회공헌에 더 관심을 가졌던 이들의 행보는 동생 정광현이 윤치호의 사위가 되면서 갈리기 시작했고(윤치호는 <애국가> 작사가, 식민권력에 협력함) 결국 각자의 진영으로 나아갔다.

첫장부터 스케일이 굉장한데 다음 장도 검찰총장 형 vs. 남로당원 동생 이야기라 만만치 않다;; 물론 책 내용이 전부 이런 식으로 대립하는 형제들만 나오는 건 아니고,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형제(근데 이제 친일을 곁들인?)라든가,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삼남매가 투옥하는 경우라든가, 의형제를 맺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큰 흐름 위주로만 쓰인 교과서에서는 생략되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라 새롭고 신선했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구나, 그리고 이렇게 평가 받았구나- 하는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어조는 차분하지만 분명하다. 끊임없이 독자에게 권하고 묻는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다르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여태 월북한 시인, 소설가, 예술가를 빨갱이라며 매도하기만 하고, 그들의 작품에 귀기울인 적이 없지 않았나?

항일운동과 독립투쟁에 인생을 다 바친 사람들을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을 진지하게 연구해볼 기회를 차단해버리지는 않았나?

친일 매국노 또는 종북 공산주의자라는 프레임만으로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사람들을 단정했던 걸 멈추고 다른 방향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유연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다시 짚어보자.

그동안 역사를 서술형이 아니라 객관식으로,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한다고 배웠던 사람들은 『특별한 형제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사람의 정치 성향을 친일 아니면 종북(요즘엔 친중이라고 말하던가?)이라고 이분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굳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긋기와 축출로 무장한 정신은 잠시 내려놓은 채 일단 책을 펼치고, 각자의 형제를 떠올리며 읽어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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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활 건강
김복희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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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도 수필도 잘 못 쓰지만 확실히 아는 게 하나 있다. 시인들이 쓴 에세이집은 군더더기가 없고 부드럽다. 단순히 문체가 마일드하다는 뜻이 아니라, 작위적이지 않은데 영양가는 엄청난 느낌, 탈탈 털어 먹고도 혈당 걱정할 필요 없는 99.9% 두유 느낌이랄까(광고 아님🙃)


『나의 생활 건강』은 저자 라인업을 보자마자 바로 샀던 책이다. 여성 시인 10명 앤솔로지? 아ㅋㅋㅋ 이건 못참지ㅋㅋㅋ 판형도 작고 얇아서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할 때 들고 다니며 읽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내가 '건강할 때'가 아니라 '건강해지고 싶을 때' 읽는 게 도움이 될 듯해서, 백신 접종하러 간 병원 대기실에서도 읽고, 혼자 미술관으로 힐링하러 가기 위해 탄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그동안 밖에 너무 안 나가서 이제야 완독하긴 했지만🙄 앞의 내용을 다 까먹어서 처음부터 읽으며 복희 시인님 얘기는 네 번이나 펼쳐 보긴 했지만...🙄 아무튼 무너진 마음을 붙잡아주는 문장들이 많아서 좋았다.


이 책에서 작가님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완벽히 건강한 사람이 아니고, 완벽히 건강해질 수도 없다. 혼자서는 절대 못한다. 곁에 인간이든, 반려동물이든, 예술이든 무언가가 있어야지만 계속 살아진다.


내가 붙잡을 존재는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치만 『나의 생활 건강』을 쓴 작가님들 덕분에 늘 염두에 두며 살아갈 것 같다. 모르고 지나쳤던 일상을 자세를 낮춰 다시 관찰하면서 말이다.

최소한 내게는, 좋아하는 일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기력 대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해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효율적인 방도를 찾느라 무기력한 상태를 더 길게 끌었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보다 무엇을 싫어하는가를 더 많이 생각했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더 신경을 쏟았다. - P18

강한 자가 건강한 자이고 건강한 자는 약한 자(건강하지 않은 자)를 보호하기로 약속된 그 세계를 거부할 수 있게 됐다(…) 잔잔하게 망가져 있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 모두가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좋다고 썼다. - P22

나를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준 이 멀쩡한 한 육체는 타인의 정성과 수고가 만든 것. 엄마의 토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비실비실 앓다 죽었을 거야. - P31

강화도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을 싸주시는 할머니를. 곁에서 그걸 얻어먹는 엄마를. 내가 보지 못했지만, 이미 충분히 내 몸 속에 있을지도 모를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 좋았다. - P98

다만 내가 아는 건, 이 알 수 없는 사랑이 나를 생활하게 한다는 것. 이 사랑이 나의 살과 기립근을 이뤄 날 일으키고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을 때에도 아주 혼자는 아니게 한다는 것. 그러므로 아주 먼 길을 걷는 데에도 끄떡없게 한다는 것을, 안다. - P101

주먹을 꼭 쥐고. 건너편으로 가보자. 조금만 더 가보자. 타이른다. 세계가 나를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K는 점점 오기가 생긴다. 괜찮아, 괜찮아. 미안하지만 아직 안 죽어. - P121

빛의 형식이 다양할수록, 빛의 스위치가 많을수록, 방은 점점 더 많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다. - P135

나는 설화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장소에 와 있다고 느끼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느끼도록 해주고 싶다(…) 서로의 생활이 섞인 최선의 공간은 무엇일지 상상한다. 다음 단계의 건축하기 거주하기 사유하기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 P140

사랑의 다른 이름은 약속일 것이다. 배고프지 않게 밥을 주고, 많이 기다리지 않도록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집에 들어가고,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도록 해주고, 실수해도 혼내지 않고, 아프지 않게 미리 병원에 데려가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자도록 자리를 마련해주고, 다시는 버려질 일이 없을 거라는, 네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 그 이후에도 너를 잊지 않을 거라는 약속. - P156

나는 반복적이고 건강한 삶만이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157

가끔 회사에서도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고 근처의 작은 갤러리를 우체국 가듯이 은행 가듯이 붕어빵이나 호두과자를 사러 가듯이 가곤 한다. - P171

예술적인 행위란 자신의 일상을, 자신의 삶을 열렬히 바라보고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보고 나오면서 나도 현실을 새롭게 각색하고 색칠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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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구의 각종 자원을 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부모의 돈을 소비하며, 받은 만큼 대단한 일을 해내지 않고, 큰돈을 벌 수도 없으며, 사회와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오디와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난 이후로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오디를 구조했고 오디도 나를 구조했기에 나는 살아야 한다. 나로 인해 기쁨을 느끼는 친구들, 내 시를 읽는, 더 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계속 살 것이다. 나는 계속 시를 쓸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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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1
이수정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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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힘없이 읽힌다. 아무래도 오디오클립(팟캐스트)을 문자로 옮긴 책이다보니 처음부터 문자로 쓰인 원고보다 덜 딱딱하고 자연스레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멋있으면 다 언니에서 이수정 교수님의 인터뷰를 읽고 프로파일러는 현실과 영화의 범죄를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져서 찾은 책이다. 범죄 영화를 가해자의 서사 정당화 측면에서 분석하지 않고, 피해자와 약자를 대변하며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리뷰들로 가득하다. <가스등>, <적과의 동침> 등 여성 피해자를 특히 고려하여 영화를 선정하거나, 비교적 최근의 화제였던 <살인의 추억>, <기생충>, <조커>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16개의 영화 리뷰에서 가장 많이 강조된 것은 연대였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말자', '그의 고통이 나와 관련 없지 않다'고 일깨워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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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다혜 - 성범죄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반인들도 불법 동영상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성에 대한 인식 문제와 관계가 있을까요?

이수정 - 관계가 있죠. 그리고 이 문제가 곧 내 문제일 수 있다는 연대 의식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이 불법 동영상을 보면 피해자 여성이 자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상을 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동영상을 보지 않는 많은 여성들도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이런 동영상에 노출될 리 없으니까,
나는 안전한 관계만 맺고 있으니까, 하면서 불법 동영상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동영상을 보는 남성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결코 일부 여성 또는 일부 남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컨대 안전한 화장실을 사용하고, 안전한 차량을 타고, 안전한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집에도 보안 장치가 잘 돼 있어서 아무나 집에 들어올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여성이, 디지털 성범죄에 취약한 환경에서 사는 여성들에 대해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실은 동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하는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 자체가 가해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무심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들이 오늘날 디지털 범죄의 만연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형사 사법 기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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