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걷는사람 시인선 40
손병걸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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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걸 시인은 시각장애인이다. 하지만 이건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에서 시각이 부재하는 화자를 연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시인은 눈이 아니라 귀와 피부의 감각만으로도 얼마든지 시적 세계를 그려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베췌증후군은 시인이 실제로 병을 앓으며 느꼈던 고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온몸으로 느끼는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화자는 행복과 불행은 선택의 문제라고/삶의 고통을 극복하라고말하는 희망도서를 떠올린다. 세상은 값싼 말을 던지며 개인의 고통을 무시한다.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착함극복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한다. 베췌증후군의 화자도 그런 지극히 당연한 문장들이 몸속에서 끓어오름을 느낀다. 그러나 통념과는 다른 사유로 나아간다. “극복은 없다 빛이 오면/ 어둠이 머물렀던 자리를 빛에게 내어주듯/ 어둠이 돌아오면 빛이 머물렀던 자리를 어둠에게 내어주는방식으로 고통과 장애를 인정한다. 단순 좌절이나 극복이 아니라 그 너머의 초월인데,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내가 이런 아프고 부정적인 상황에 처했더라면 매일 울면서 죽기만을 바랐을 텐데, 시인은 어떻게 궁극을 딛고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국지성 호우를 통해 그 계기를 짐작해 보암직하다. 빗방울은 느닷없이찾아와서 화자의 온몸을 적셔 버린다. 그리고 화자는 쏟아지는 빗줄기 골고루 헤아리며집으로 돌아가는데, 계획에 없던 소나기를 맞는사건이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시커멓게 찌든 내 생활도/ 빗속으로 뛰어들면/ 꾹꾹 주무르다 탈수하여/ 무지개로 턱 널어 줄 것 같은”, “착각이라 해도 좋고 용기라 해도 좋은 마음이 생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소나기가 화자의 염원이나 기대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화자로 하여금 오늘은 나를 통째로 빨래하는 날이라는 긍정적인 말을 하게 만들었다. 소나기를 어떤 인물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한다면, 혼자만의 고통을 겪고 있던 주체가 타자(빗방울 또는 소나기)와의 만남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 버리는 변화가 발생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구를 만났길래 자신의 삶에 무지개빨래를 들여놓게 된 것일까.


답은 댓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재래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위층 아저씨와 이웃인데, “오늘밤은 다른 날보다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힘찬 아저씨 때문에 원고 쓰기가 힘들다. 밤을 새워 겨우 원고를 마감한 화자가 빌라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침 해를 기다리는데, ‘느닷없이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퉁명스럽게도, “어제는 무슨 글을 쓴 게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니까.”라고 아저씨가 시비를 거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기습을 당한 나도 질세라 댓거리를 한다. 싱싱한 채소 같은 글을 쓰려고 했는데요. 아저씨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못 썼어요. 물어내세요.”라고 받아치는 순간, “골목 안에 팽팽한 햇살이 번진다. 아저씨도 웃고 화자도 웃는다. 채소장수에게 싱싱한 채소 같은 글을 쓰려고 했다니 웃을 수밖에. 결국 웃으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아저씨는 일하러 골목길을 내려간다. 만남, 대화 그리고 웃음을 통해 눅눅한 산동네가 오랜만에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느닷없이귀에 꽂히는 이웃의 코 고는 소리, 처음엔 화자가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방해하는 불편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러나 밤새도록 몸집 키운 햇덩이가오르면, 그는 웃음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변모한다. 외부에서 먼저 다가오는 타자로 인해 주체의 상태가 바뀐다는 점에서 아저씨국지성 호우빗방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맛있는 악수에서는 이러한 만남이 더욱 확장된다. 목소리를 이미 알고 있었던 아저씨와는 다르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들이 온다”. 화자는 달팽이관을 열고 타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모든 소리가 형체를 가지고 달려온다. 그들은 환한 얼굴로”, “맛있는 악수를 청하며”, “떨리는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만지며 나를 흔들며/ 나를 깨우며 파동이 되어 온다”. “까무룩히 꺼져 가는 내 이름도 그들이 불러주면 몸이 일으켜진다. 시인이 살면서 만난, 특히 장애인이 된 이후에 마주한 수많은 소리들이 시인을 세계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이웃사람뿐만 아니라 달빛, 햇빛, 강물, 숲속, 먹구름, 허공에서 무지개처럼 다가온다. 시인은 스스로 잘나고 대단해서 특별한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귀를 열었더니, 쏟아지듯이 소리들이 악수를 청했다고 감사를 표하며 겸손하게 고백할 뿐이다.


이제 시인이 어떻게 궁극을 딛고 감사할수 있었는지 답이 거의 다 나왔다. 마지막으로 빗방울 점자를 살피며 일어서는마음가짐을 알아보자. 비 내리는 어느 날 화자가 천둥 소리에 깜짝 놀라점자책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시가 촉발된다. “와르르 쏟아진” “점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고화자가 빗방울 소리 따라반지하 방바닥을 더듬을 때” “두두두두, 빗소리는 꽉 닫힌 창문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 같다. 빗방울 점자천둥 소리빗소리국지성 호우에서의 빗방울처럼 피부에 직접 닿지는 않지만, 닫힌 창문 너머를 통과하여 화자를 찾아와 귓전을 때리고 점자책을 떨어뜨리게 함으로써 반응을 이끌어낸다. 점자책을 주워 올리면 다시 펼친 책갈피마다/ 하얀 여백을 딛고 오뚝한/ 점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화자는 그래 다시 일어설 일이다라고 다짐한다. 쏟아져도 여전히 오뚝한 점자를 읽으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마음을 흡수한다. 화자가 점자를 손가락으로 만지는 모습은 악수를 연상케 한다. 맛있는 악수에서 악수를 청하며 다가오는 소리들과 빗방울 점자에서 훑어지는 점자들이 겹쳐질 때, 시인의 자세를 알 수 있다. 귀를 열고 손을 펼쳐 소리를 듣는다. 나보다 앞서 우뚝 딛고 선소리들이 기꺼이 나를 이끌어주면 따라 걸어갈 수 있다. 그 태도는 서슴없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느닷없이 찾아 온 빗방울, 아저씨, 악수, 점자들이 시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초청할 때, 귀를 기울이고 고마워하며 수락하는 시인의 자세를 나도 본받고 싶다.

시커멓게 찌든 내 생활도
빗속으로 뛰어들면 꾹꾹 주무르다 탈수하여
무지개로 턱 널어 줄 것 같은

오늘은 나를 통째로 빨래하는 날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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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