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
크리스터 스텐달 지음, 김선용.이영욱 옮김 / 감은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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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크리스터 스텐달은 논문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1954)로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에서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1984년 스톡홀름의 주교로 선출되기 전에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대학원 교수였으며 학장도 역임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Shalom Hartman Institute의 종교 다원주의 센터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대화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소위 바울의 새관점 학파와 관련해서, 논의 초기의 물꼬를 튼 학자로 자주 언급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신학적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 ˝사도 바울과 서구의 성찰적 양심˝, ˝심판과 자비˝, ˝방언: 신약의 증거˝, ˝자료와 비평˝이라는 다섯 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중요한 글은 스텐달이 1961년 미국 심리학회 연례 학회 초청 연설로 강연한 원고인, ˝사도 바울과 서구의 성찰적 양심˝과 이를 좀 더 완성된 형태의 신학적 에세이로 보완한 글이며, 이 책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입니다.

스텐달은 기존의 바울 해석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고, 그 해석은 바울 신학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바울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당대의 시대 배경에 근거한 성서 본문 연구를 통해 밝혀 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루터신학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신칭의‘의 해석은 틀렸으며,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뼈아픈 성찰에서 나타난 인간의 분열된 내면과 죄책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와 씨름하면서 바울이 내놓은 일종의 해결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본래 유대인들의 율법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바울이 추구했으며, 그는 이방인들이 율법과 상관없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했고, 그것이 바로 이신칭의라고 봅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유대인은 유대인만의 길이 있고 이방인은 이방인만의 길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스텐달이 약간은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지점 때문에 케제만을 비롯한 루터주의 신학자들이 스텐달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한 지난한 논쟁이 아직까지도 있는 것을 보면, 스텐달이 성서학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심판과 자비˝라는 에세이가 좋았는데요, 스톡홀름의 주교직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글은 한 편의 훌륭한 설교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었던 설교 중 단 2편만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스텐달의 이 글을 설교로 본다면 이제는 3편의 설교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은 사서 읽어 보시면 될 것 같아서 굳이 적지 않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것이, 아무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이 주목을 받았고, 유대인과 유대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아졌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루터교의 한 분파인 스웨덴 교회의 주교가 루터주의 바울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씁슬한 기분이 들었는데, 기본적으로 한국에서는 이런 신학적인 논의를 따라가는 게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1970년대에 출간되었고, 바울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번역이 되었고, 어떤 신학책을 봐도 마찬가지이지만, 저자들이 인용한 논문이나 책은 대부분 번역은 커녕,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중요한 학자들이 티키타카하는 것을 따라갈 수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뭐 교수들이 다 학생들을 믿어서 번역 따위는 하지 않고, 학생들만 읽는 자기 저서만 출간하는 열악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이렇게 사상사에서 중요한 글들을 번역하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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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선교의 시대가 끝났을 때 고해성사의 신학적, 실천적 중심이 단 한 번만 시행되는 세례(침례)에서 계속 반복되는 미사(예배)로 이전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어난 이 미묘한 변화는예민한 자기 성찰을 더욱 강화했다. - P175

바울서신의 주요 부분이 그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글의 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변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정반대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바울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했다는 구체적 언급은 놀라울 정도로 찾기 어렵다. 물론 바울이 자신의 육신과 고투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고전 9:27), 우리는 바울의 말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감에 찬 사람의 어조를 본다. - P188

자비, 구원, 해방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의 일부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비가 필요한 자들에게 자비를 가져다준다. 심판은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빼앗기고 박탈당한 자에게 정의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들을 바로잡고 공의를 세우는 활동 안에 있다. … 정의를 세우는 일은 필연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자들에게는 자비를,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자들에게는 잃음을 의미한다. - P203

세상의 진정한 악은 선을 위해, 인류를 위해, 자유를 위해, 이념을 위해, 인간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떤 거짓-신을 위해 행해진다. 그렇기에 죄책은 무거워지고 정체가 밝혀져야한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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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편견에 따른 처리를 낳았던 언론, 가족 및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는 정보가 바뀌지 않는다면, 편도체는 계속 그 정보를 주입받게 되어, 사라졌던 두려움을 차츰 다시 일깨운다. 그 사람이 장래에 흑인과 마주칠 때, 만약 전전두엽 피질이 계속 휴지 상태이면(편견을 거부할 동기의 부족, 극심한 스트레스나 약물 섭취로 인한 기능 약화 또는 위기 상황 및 너무 빠른 마주침 때문에), 자동조종 반응이 작동해 분노에서부터 자기방어를 위한 살해까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답은 뇌바깥, 즉 사회 자체에 있다. 편도체가 잠재적 위협이라고 감지하는 것을 바꾸려면, 우리는 사회를 개혁하고 사회 제도들을 개혁해야만 한다. - P122

다른 일련의 기능들과 더불어 뇌섬엽은 현저성 네트워크 saliencenetwork에 핵심 역할을 한다. 이것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처리하는 네트워크이다. 가령, 여러분은 파트너나 친구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 표현을 낯선 이의 얼굴보다 더 빠르게 포착할 텐데, 이런 처리를 하는 곳이다. - P123

일반적으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할 때 힘들어 한다. … 2차 세계대전의 군인들에 관한 연구들을 보더라도 많은 군인이 목표물을 조준하지 않았고, 상당수(아마도 대략 70퍼센트)가 총을 단 한 발도 쏘지 않았다. 정확한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분석을 바탕으로 군대는 적을 향해 ‘내장 깊숙한‘ 혐오를 느끼는 군인들의 성향을 키우는 심리 훈련을 마련했다. 전장에서 적들을 쉽게 죽이기 위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 후 20년이 지나,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병사 가운데90퍼센트 이상이 무기를 발사했다." 사용된 심리 기법들은 주로 탈개인화deindividuation, 전치displacement(또는 치환) 및 비인간화를 바탕으로했다. 개인화는 개인이 큰 집단의 일원이라고 여겨 책임감에서 벗어난다고 느끼게 되는 심리적 과정이다. - P132

혐오는 인간의 개념인지라, 그것을 전담하는 뇌 안의 단일 영역이나 영역들의 집합을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뇌의 특정 부분을 짚어내 제거한 다음 우리가 혐오를 잘라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P135

혐오에 신경 관련 요소가 있기야 하지만, 뇌 영상은 스캐너 바깥에 있는 맥락-어떠한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요소들이 ‘우리‘에 대한 선호(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편견과 혐오로 변환시키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주지 못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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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문제나 윤리적 문제는 실제로 집단 내지 공동체의 문제다. 기독교는 철저하고 정확하게 따라야 하는 원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시도다-그리고 분열되지 않고 서로 간의 차이를 고려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 P149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 율법과 약속, 칭의와 진노에 관한 바울의 생각들은 이런 이유들로 초대 교회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적 인물이었다. 베드로후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표현했다: "우리 바울 형제님은 이해하기 좀 어려운 사람이다" (벧후 3:15이하). 바울은 존경을 받았지만 관심의 영역 밖으로 밀려난 인물이었다. 그는 사역자들 중에서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지적인 인물이었다. - P156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한 바는 이러하다. 본문을 해석할 때, 후대의 해석들을 재해석하지 말고 원문 자체(the original)를 해석해야 한다는말이다. 실제 기독교 역사에서는 원문 자체를 가지고 씨름하는것이 아니라 유력한 해석에 대한 연쇄적 반응과 논쟁들만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바울 해석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성장하며 완성되었고, 중세신학자들은 특정 주제만을 파고들면서 다른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원문과는 거리가 먼 반박과 논박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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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10에서 바울은 우리(즉, 바울)가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바울이 짊어지고 있는 죽음의 과정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그리고 이것은 바울과 고통당하는 그리스도를 하나 되게 한다. 나는 지금 이 구절을-겸손한 유비로서-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언어의 구체성과 실제성을 느끼기 원한다면 먼저 이를 바울에게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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